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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우산 Dec 26. 2019

스물넷, 종로에서 토익 강의를 시작하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Woman Office Worker, emojipedia.org

취업을 위해 돈과 시간을 투자하여 테솔 과정을 수료했다. 테솔 수료증을 받고 나면 당연히 취업이 금방 될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세상에 당연한 건 없었다. 우리나라 최고의 초중고 대상 A 영어학원 면접에서 떨어지고, 지원했던 또 다른 중고등 대상 영어학원들에서는 연락조차 없었다. 아무리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다 해도 끊임없는 탈락과 거절을 경험하면 절대 떨어질 것 같지 않던 자존감이 어느새 바닥으로 내려와 있다. 내가 이토록 쓸모없는 사람이었나, 나는 왜 더 일찍부터 취업준비를 하지 않았을까, 전공을 잘못 선택했나, 뭐부터 다시 시작해야 하지...? 이런 수만 가지 생각이 들면서 취업이 안 되는 모든 이유가 나에게 있는 듯 자책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절대 그렇지 않다. 지원에서 최종 선발까지 일련의 채용과정을 놓고 봤을 때, 사실 뽑히는 사람보다는 뽑는 사람이 그 과정에 더 큰 영향을 끼친다. 내가 아무리 자격조건에 120% 충족한다고 해도 면접날 인사담당자의 기분이 나쁘면 떨어질 수 있는 노릇이다. 그러니 오늘도 또 탈락했다고 해서 자책하지 말기를. 모든 게 당신 잘못은 아니니까.


다시 나의 스물넷으로 돌아와서.

매일 탈락만 하던 어느 날, 테솔 취업박람회에서 지원서를 냈던 어느 학원에서 드디어 연락이 왔다. 종로에 있는 테스트와이즈 시사영어학원이라는, 길고 긴 이름의 학원이었다. 담당자는 나에게 성인을 대상으로 토익 강의를 해볼 생각이 있냐고 물었다. 그때까지 나에게 토익은 점수를 '올려야 하는' 시험이지, '올려줘야 하는' 시험은 아니었다. 대학생 때 토익 스터디를 할 때도 나는 조용히 내 공부만 하던 조원 1이었다. 취업을 위해 공부하던 토익이 내 업이 될 줄은 정말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런 걸 따질 때가 아니었다. 나는 망설임 없이 하겠다고 했다. 담당자는 시범강의로 LC(Listening Comprehension 듣기) 수업을 준비해오라고 했다. 그리고 시강은 영상으로 촬영될 예정이라 스튜디오에서 진행될 거라고 했다. 그날부터 나는 토익 LC 문제집, 이론서, 단어장 등 관련 서적들을 사서 보기 시작했다. 출판사에서 제공하는 토익 강의 영상도 보면서 토익 LC 강의법을 공부했다. 듣기보다 읽기, 즉 문법이나 어휘, 독해 강의를 더 많이 했었기 때문에 오로지 듣기에만 집중된 강의를 준비한다는 게 쉽지 않았다. 나는 영어가 들리는데 도저히 안 들린다고 하는 사람들에게 뭐라고 해야 할까...


그렇게 토익 강의를 준비하는 데 여념이 없던 어느 날, 약속이 있어 고속버스터미널, 일명 고터에 갈 일이 생겼다. 고터 지하철역에 내려 약속 장소로 가던 도중, 우연히 대학 동기를 만났다. 거의 3년 만에 만났기 때문에 반가움과 놀라움이 교차하면서 서로의 안부를 물었다. 나는 곧 토익 강사가 될지도 모른다고 하니까 그 친구가 도움이 될 거라면서 이 책을 추천해주었다.


https://book.naver.com/bookdb/book_detail.nhn?bid=4764769


초라한 들러리에서 연봉 10억 골드미스가 된 유수연의 성공 비법



겉표지만 읽었을 뿐인데 갑자기 힘이 났다. 바닥까지 내려왔던 자존감이 다시 올라왔다. '20대, 나만의 무대를 세워라'는 유수연 선생님이 스타 토익강사가 되기까지의 과정과 꿈을 잃은 젊은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조언 등을 적어놓은 에세이다. 토익 강사라는 직업이 막연하게만 느껴졌었는데 이 책 덕분에 토익 강의를 하고 있는 나의 미래를 좀 더 확실하게 그릴 수 있었다. 그렇다. 토익강사를 하면 부자가 될 것 같았다. 카피라이터의 꿈은 조금 더 보류해놓기로 했다. 일단 연봉 10억이라는 토익강사부터 해보고.


토익 학원 면접날, 낯선 종로로 향했다. 학원은 종각역 근처에 있는 YMCA 건물에 있었다.(건물에 수영장도 있었다.) 나는 학원 내 작은 스튜디오에서 준비한 강의를 선보였다. 사람이 아닌 카메라가 나의 강의를 지켜보았고, 그래서 그런지 준비했던 것보다 더 잘했던 것 같다. 이때가 2008년 12월이었는데 내 강의를 보고 학원 실장님이 내년(2009년) 1월부터 수업을 맡을 거니까 그전까지 열심히 준비하라고 했다.


와우, 붙었다!


기뻤다. 가족, 친구, 지인들에게 소식을 전했다. 소식을 접한 사람들은 내가 마치 매우 어려운 일을 해냈다는 듯 나를 높이 평가했고 그 말에 어깨가 으쓱해졌다. 그때까지 나는 모르고 있었다. 토익강사는 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버티는 게 진짜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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