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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린숲 Jun 24. 2019

삶이 깡깡 울리는 마을

부산 영도 깡깡이 마을

부산에는 걸어서 5분이면 갈 수 있는 섬이 있다. 바로 영도다. 사실 처음 영도대교를 걸어서 건넌다는 말을 들었을 때만 해도 넉넉잡아 15분은 걸을 각오를 했었는데, 막상 건너고 보니 바다를 건넌다기보다 강 하나를 건너는 것에 더 가까운 느낌이었다. 그럼에도 다리를 건너는 내내 코를 깊숙이 찌르는 짠내는 바다 위를 걷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시며 어디서 기인했을지 모를 향수를 불러일으켰다.


부산에서 나고 자란 내가 바다 냄새에서 느껴지는 향수가 기묘하다고 하면 조금 의아할지도 모르지만, 보통 부산이라고 할 때 으레 떠올리는 바다는 모두에게 마냥 친숙한 존재는 아니다. 당장 바다를 접하고 있는 바닷가 마을에 살고 있는 나부터도 바다 냄새를 맡는 일은 일 년에 손을 꼽을 만큼 적다. 집 뒤편에 있는 듬직한 산이 해풍과 바닷바람의 짠내를 모두 막아주기 때문이다.


굳이 산이 가로막고 있지 않더라도 빽빽이 들어서서 먼 시야를 가리는 콘크리트 건물 숲 사이를 거닐다 보면 바로 코앞에 바다가 있더라도 방향을 잃고 헤매는 경우도 더러 있다. 내가 그랬다. 그러니 막상 부산에 살더라도 맘먹고 바닷가에 나가지 않는 이상 바다를 보긴 쉽지 않다. 가깝기 때문에 오히려 발걸음이 뜸해지는 탓도 있다. 그래서 영도대교가 열리는 도개 행사를 바로 앞에서 구경할 수 있는 유라리 광장에 도착했을 때 바람결에 스며든 짠내가 너무나 반가웠다.


유라리 광장에서 바라본 영도대교
영도대교 위 도로와 인도


하지만 도개교인 까닭에 버스나 트럭 같은 큼직한 차량이 지나갈 때면 덜컹덜컹 흔들림이 느껴지는 발밑에 희미한 불안함을 안고 건너고 있노라면, 이내 바람에 스며든 짠내가 조금 다르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광안리나 해운대 같은 깨끗한 모래사장에서 맡던 바다 냄새와는 달리 어딘가 비릿하기도 하고, 약간 고릿한 듯 하지만 생선 비린내나 썩은 내랑은 또 조금 다른 느낌. 이유는 다리를 건너 깡깡이 마을 초입에 다다르자마자 알 수 있었다.


대동대교맨션 맞은편에 정박해 있는 배들
포구 한쪽 편에 쌓여 있는 녹슨 닻과 사슬


기름때가 섞였는지 물이 다소 탁한 포구에 빽빽이 정박한 배들과 맞은편에 수북이 쌓인 녹슨 닻과 사슬. 뭔지 모를 비린내는 바닷물에 시달린 쇠 냄새였다. 무척이나 생경하고 낯선 바다 풍경이었다.


새삼스런 말이지만 부산은 해양 자원이 풍부한 도시이다. 바다라고 하면 가장 먼저 떠올리기 쉬운 여름철의 흰 모래사장부터 해양 스포츠를 즐길 수 있는 푸른 바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고등어를 출하하는 어시장, 물류 허브센터 역할을 하는 컨테이너 부두까지 부산의 바다는 여러 가지 얼굴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아는 부산의 면면들 중, 정작 바다와 떼어놓을 수 없는 배-조선업-에 관련된 것만은 없다는 사실을 문득 깨달았다. 어째서일까.




한국 근대 조선업의 시작지이자 조선수리산업의 중심지




포구를 지나 골목길 안쪽으로 살짝 걸음을 꺾어 들어가면, 깡깡이 마을의 역사를 알려주는 거리박물관이 그 답을 알려주기 시작한다. 내가 모르는 부산의 조선업에 관한 이야기다.


영도는 지리적 위치상 일본의 영향을 꾸준히 받은 곳으로, 한국 최초의 근대식 조선소인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 곳이기도 하다. 일본과 가깝기도 하고, 내륙과 가까운 깡깡이 마을은 풍랑의 피해가 거의 없어 소형 조선소 단지로 무척 적합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다나카 조선소가 세워진 후 크고 작은 조선소와 수리 조선소가 60여 개 들어섰고, 일본이 매립 공사를 하고 영도와 북항 일대의 부두 시설을 확충하면서 자연스레 한국 조선업의 중심지가 되었다.


일본이 전쟁에서 지고 사업을 철수하고, 그 뒤를 이어 들어선 조선업체가 모두 다른 지역으로 빠진 이후에도 깡깡이 마을은 조선수리산업의 중심지로 그 자리를 굳건히 지켰다. 특히 60년대에 들어서부터는 나라에서 조선장려정책으로 철강선을 많이 만들게 되면서 수리조선 산업이 호황을 누렸다. 무엇보다 6~70년대는 한국 경제가 가파른 성장세에 접어들기 시작할 무렵이었고, 정부 주도 하에 조선업이 육성되면서 수산업과 원양어업이 확장되어 국내 최대 수산물 위판장인 부산공동어시장이 위치한 깡깡이 마을은 자연스레 온갖 선박이 모여드는 해상교통의 중심지가 되었다.


대평동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동네가 깡깡이 마을이라 불리게 된 것도 이 선박 수리에서 유래한다. 철로 만들어진 배는 항해를 하면서 자연스레 녹이 슬게 마련인데, 수리를 하려면 선박에 바짝 붙어 앞이 뾰족하고 뒤는 납작한 조그만 망치로 두드려서 깨끗이 벗겨내야 하기 때문이다. 깡깡이질이라고 부르는 매우 고된 작업이었다.


출처 :대평동 마을박물관


반면 힘든 일에 비해 임금은 무척 적은 편이었다. 그래서 깡깡이질을 하는 이들은 주로 전쟁통에 홀몸이 된 여성이나 전쟁 피난민 여성, 무작정 돈을 벌러 도시로 나온 여성 같은 배움이 적고 돈이 필요한 사람들이었다. 깡깡이 아지매라고 불리는 이들이다.


그래도 이땐 좋았다. 깡, 깡, 망치로 선박 두드리는 소리가 온종일 마을에 울려 퍼지던 시절 깡깡이 마을에는 활기가 있었다. 일을 쫓아 사람이 모였고 사람이 모이니 자연히 돈이 돌아 장사도 잘 되고, 유치원과 학교도 생겼다. 당시를 기억하는 마을 주민의 말에 의하면 영도 돈의 90%가 여기서 돌았다고 한다. 그야말로 살맛 나는 시절이었다.




점점 적막해지는 마을




하지만 내가 만난 깡깡이 마을은 이름과 달리 무척 조용한 동네였다. 마을 이름의 유래가 된 깡깡이 소리는 물론이고, 사람 소리조차 잘 들리지 않았다. 세월의 더께가 느껴지는 작은 공장들이 빽빽이 들어선 거리는 일부 셔터를 내린 곳도 있고, 열려는 있으나 사람이 보이지 않는 곳이 무척 많아 과거의 활기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예전과 달리 이곳을 찾는 선박이 적어졌기 때문이다. 선박은 점점 대형화되어 가는데 매립공사를 한 지 100여 년 동안 손보지 않은 깡깡이 마을 바다 밑은 큰 배들을 받아들일 수 없는 환경이고, 그에 따라 수리 선박 또한 감소하다 보니 자연스레 다른 지역으로 많은 업체가 이동했다. 찾는 배가 줄어드니 남아 있는 수리 관련 부품 회사와 공장 등도 당연히 매출이 줄어들었다.


게다가 1980년대를 기점으로 부산의 원도심권이 쇠퇴하고, 조선경기에 불황이 찾아왔다. 사업은 계속 축소되고, 종업원 수도 줄고, 사람이 주니 돈도 돌지 않는다. 사람이 떠난 자리에는 빈 집만 남고, 일자리가 없으니 새로 들어오는 사람도 없는 동네는 쇠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다.


그래서인지 동네 골목길을 걷고 있노라면 가끔 물건을 그득 실은 용달차가 지나가는데도 딱히 번잡하다는 인상은 받지 않았다. 되레 반가운 느낌이었다.


수리 중인 선박
짐을  싣는 중인 트럭
아직  맥이 살아 있는 오래된 공업사


제2의 부흥기를 준비하는 사람들



그러나 찬바람이 든 것 같은 가슴을 안고 골목길을 꺾어 들어가자, 조금 전과는 전혀 다른 깡깡이 마을의 모습이 나를 반겼다.



마을 곳곳 건물 벽에 감탄성이 절로 나오는 벽화들이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공공예술 프로젝트를 통해 모인 예술가들의 활동의 일환이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각종 체험 프로그램과 서비스를 갖춘 시설들이 깔끔하게 외관을 단장하고 방문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깡깡이 유람선 선박체험관
깡깡이 생활문화센터
깡깡이 마을공작소


오래된 건물 벽에 그려진 벽화, 낡은 건물을 새로운 감각으로 재단장한 공작소와 새로 말끔하게 지어 올린 선박체험관과 생활문화센터의 모습. 이 모든 것들은 과거를 바탕으로 새로운 도약을 준비하는 깡깡이 마을 사람들의 노력이다.


달이 차고 기우는 것을 막을 수 없듯이, 모든 일은 흥하면 쇠하게 되는 것이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오르막이 있다면 내리막이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기울어진 달은 다시 차오르고, 내리막을 내려오면 다시 오르막이 나타난다. 아무리 깊은 늪이라도 바닥은 있다. 여기 깡깡이 마을은 이제 단단한 바닥을 딛고 다시 올라갈 준비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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