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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Apr 24. 2024

공포의 밤, 야만의 알탕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일흔여덟 번째

모든 일은 균형을 찾아간다. 한없이 좋은 일도 한없이 나쁜 일도 없다. 정말 이젠 바닥이라고 생각하고 포기할 때 무엇인가 손을 뻗어 나를 들어 올려 준다. 이렇게 행복할 까 싶을 때 조각조각 나 바닥으로 다시 흩어지곤 한다.


그래서 어떤 일이 생기면 크게 기뻐하지도 슬퍼하지도 않게 되어 버렸다. 이 일이 앞으로 행복한 일인지 불행을 가져올 일인지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좋은 일 끝에는 나쁜 일이 생기고 지옥에서도 종종 살아옴을 경험으로 알고 있지만 그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에 삶이 힘들어진다.


내일모레까지 지옥, 사흘 후부터는 지상으로.


이렇게 알 수 있다면 인생은 얼마나 견디기가 좋을까. 나쁜 일은 그 일이 힘들고  아파서 견디기 힘들기도 하지만 언제까지 갈지 모르다는 것이 제일 힘든 것이다. 그런 때는 작은 일로도 바삭바삭 무너지기 십상이다. 언제까지 견뎌야 하는지 모르니까.


점심에 혼자서 밥을 먹으려고 나왔다가 내가 자주 혼자서 밥을 먹던 식당이 문을 닫았음을 알았다. 알탕을 파는 가게였다. 나는 알탕을 좋아하지 않는다. 살짝 비릿한 그 탕의 냄새도 싫지만 수많은 알들이 징그럽다. 그럼에도 난 자주 그 가게에 갔다. 왜 였을까.


처음에 먹은 알탕이 문제였던 것 같다. 돈 없고 가난한 학생시절, 선배가 밥 사준다고 하면 쪼르륵 달려 나가곤 했다. 누구든지 그랬고 그래야 했던 시절이었다. 밤새 술을 먹고 괴롭힘을 받고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 어려운 일들이 일어났다. 야만의 시절이었다. 고픈 배를 채워야 함과 동시에 하늘 같은 선배의 말을 따라야 했고 내 몸은 내가 치켜야 해서 신경은 날카로왔지만 판단은 점점 무디어져 갔다.


유독 밤마다 우리를 부르는 선배가 있었다. 커다란 냄비에 든 싸구려 알탕을 하나 시키고 소주를 계속 마시던 선배. 누군가는 항상 그 사람의 희생양이 되었다. 계속 그 선배의 이야기를 듣던지, 그 사람과 함께 다른 곳으로 나가던지, 결국 취해 쓰러져 다른 선배들이 그 선배를 집으로 데리고 갈 때까지. 지금 생각해 보면 새파랗게 어린아이였을 그 선배는 어쩜 그리 많은 인생 경험이 있었던지 매일매일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다. 주린 배를 어찌어찌 채우고 나면 비릿한 탕의 냄새와 부서진 알들만 성기게 떠다니는 냄비만 바라보았다. 어서 이 시간이 가기를. 오늘은 나 대신 다른 사람이기를.  어서 쓰러져 동료 선배들이 데리고 가기를.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에는 참을 만한 잔잔한 공포와 배고픔이 그 비릿한 향을 만들어 냈다. 그래서 알탕을 먹을 때마다 알 수 없는 역겨움이 일었다. 맞서 싸우지 않았던 것에 대한 나의 역겨움. 공포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 앞에서는 어느 것도 또렷하게 남아나지 않는다. 시간은 누구도 느낄 수 없는 속도로 다가와서 모든 것을 마모시킨다. 그리고 난 어느 날부터인지 혼자서 다른 식당을 찾는 고통보다 알탕을 먹은 것을 선택했었다. 긴 세월이 지났고 혼자서 헤매고 눈치 보고 불편해하는 수많은 시도가 있었다. 그래서 난 더 나쁜 것을 피하기 위해 또렷하지 않게 된 것들을 차곡차곡 버려왔다. 그렇게 생각했었다.


그런데 오늘 문을 닫은 알탕집 앞에서 그 비릿함이 다시 떠올랐다. 어디선가 역겨움이 따라온다. 난 항상 도망 다니고 또 도망 다녔다. 내가 이 알탕집을 자주 왔던 건 좋아해서가 아니었다. 도망쳤을 뿐이다. 하지만 도망친 그곳은 내게 안식처가 아니었다. 나 자신을 숨기고 정당화하기를 바랬을 뿐이다. 괜찮았다고 난 그래도 열심히 살았다고 얘기하고 싶었다.


잔잔한 공포였다. 그 공포에 난 아무것도 못했었다. 그때 난 안된다고 말했어야 한다. 더 이상 취하지 않겠다고 말했어야 했다. 그 손을 놓으라고 말했어야 했다. 내 친구를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어야 했다. 되돌리기에 너무 먼 시간이라 그저 합리화했을 뿐이다. 야만의 시절이었다고. 모두 어쩔 수 없지 않았냐고. 하지만 그 작은 공포가 아직도 내 세계에 있었음을 문 닫은 가게 앞에서 깨달았다. 살면서 얼마나 많은 일들을 외면하고 도망쳤는가. 그 수많은 일들이 하나하나 돌아온다면 난 살아갈 수가 없다. 이제부터라도 그러지 않겠다고 결심하기도 전에 난 다른 알탕 가게를 찾고 있었다. 그 잔잔한 공포가 내 인생을 지배했다고 인정할 수 없었다. 앞으로 다가올 수많은 후회도 받아 들일수 없었다. 이제 다시 공포는 끝날 것이다. 그때까지 난 숨을 죽이고 있으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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