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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Dec 10. 2023

매뉴얼의 라면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서른아홉 번째

시키는 대로 하면 마음이 편하다. 누가 지시해 놓은 것을 의심 없이 그대로 따라 하는 것만큼 마음 편한 것이 있을까. 하지만 현재에서 앞으로 나가기 위해서는 의심을 해야 하고 그 순간부터 가장 멀리해야 하는 것이 매뉴얼이다. 매뉴얼을 멀리하는 순간부터 앞으로 나갈 수도 추락할 수도 있다. 벌써 십수년째 진전이 없는 이 마음의 병을 고치는 방법에 대한 매뉴얼을 깨기로 결심한 후로 상승과 추락이 반복되고 있다. 하지만 조금쯤은 앞으로 나가고 있지 않을까?


그런데 신기하게도 매뉴얼하면 먼저 생각나는 게 라면이다. 라면은 처음 먹었던 기억은 있는데 맛이 기억 안나는 음식이다. 라면을 먹는 상황과 풍경이 생생하게 기억남에도 불구하고 무슨 맛이었는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그냥 지금 먹는 라면 맛으로 그때도 그랬겠구나 하고 추측할 뿐이다.


다른 이들도 그렇겠지만 어렸을 때 집에 아무도 없으면 라면을 끓여 먹곤 했다. 컵라면이 없던 시절이어서 라면을 혼자 끓이는 일도 힘든 일이었다. 등유를 사용하는 냄새나는 석유곤로에 불을 붙이고 냄비에 물을 올려 끓여야 한다. 쉬운 듯 하지만 불을 써서 끓이는 일은 어렸을 적에는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아무리 노력을 해봐도 엄마가 끓여주는 라면 맛이 나지 않는 것이었다.


어린 주제에 노력이라는 게 별거 있었나 싶다. 그냥 라면도 먼저 넣어보고 수프만 먼저 끓여보고 했던 것 같다. 그럼에도 언제나 아무 맛도 안나는, 이상한 맛이었던 라면을 석유곤로냄새가 가득한 부엌에서 먹고는 했다. 그래서인지 라면은 맛보다는 등유냄새로 기억이 나서 주유소에서 기름 냄새를 맡으면 가끔 라면이 먹고 싶어지는 이상한 일이 생기기도 한다.


집에서 라면을 끓여도 맛이 없을뿐더러 어린 시절 기억 때문인지 라면을 끓이는 일은 항상 어려운 일이었다. 돈이 없던 시절 밖에서 사 먹어도 비싸지 않은 라면이었기에 항상 사 먹고 다녔다. 사 먹는 라면은 왜 그리 맛있는지. 어떤 분식집에서는 라면 그릇 밑에 찬 밥을 반공기쯤 넣고 그 위에 라면을 부어주곤 했는데 밥 특유의 끈적함 때문에 라면 국물이 자작해지면서 더 맛있어졌다. 배부름은 덤이었다. 돈 없는 학생들로 가득한 분식점의 부산함과 라면과 밥이 주는 온기와 푸근함으로 나에게는 외식 이상의 의미였지만 배고픈 사람들이 점점 없어지고 라면보다 맛있는 음식들이 수없이 생겨나면서 라면은 저 멀리 머릿속 구석에 처박혀 있었다.


그러다 사람들과 모여서 밥을 먹는 중에 누가 시작했는지 모르지만 라면을 맛있게 끓이는 방법에 대한 토론이 시작되었다. 고기를 넣는 법, 마늘을 넣기도 하고 대파는 기본이요 각종 해산물을 넣어 먹기도 한다는 얘기를 듣고 라면에 무슨 그리 정성을 들이나 싶어 조용히 듣고만 있던 때 누군가 말했다. 라면은 봉투 뒤에 있는 조리법대로 끓이는 게 제일 맛있는 방법이라고. 충격적이게도 수십 년간 라면을 먹으면서 조리법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너무 간단한 음식이라서 조리법 따위가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은 것이다.


집에 갈 때 라면을 사서 뒤를 보니 정말 조리법이 적혀있었다. 물 550ml를 끓인 후 라면과 수프를 넣어 4분간 더 끓이면 된다는 너무도 간단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처음으로 조리법대로 조리를 해보니 내가 끓여본 라면 중에 제일 맛있는 라면이 되는 것이었다. 그 오랜 세월 봉투뒤도 보지 않을 정도로 무심했던 것도 우스웠고 이렇게 쉬운 방법으로 제 맛이 난다는 것을 몰랐던 어린 시절이 서글프기까지 했다.


조리법을 알고 난 후 라면 끓이기에 자신이 붙어 계란라면, 해물라면, 소고기라면 등등 많은 변종 라면을 해 먹고 있지만 가장 기본인 조리법은 바꾸지 않고 다른 것을 더하기만 할 뿐이다.


라면 조리법을 알게 되고 나서 난 매뉴얼을 잘 읽는 사람이 되었다. 물건을 사도 매뉴얼을 먼저 읽는 것은 물론이고 아주 간단한 일도 매뉴얼을 읽어보고 시작했으며 심지어 매뉴얼만 먼저 구해서 읽어보고 물건을 구매하기도 한다. 매뉴얼을 읽는 습관이 내 인생의 매뉴얼이 된 것이다. 더 고마운 것 중 하나는 그 이후로 약을 먹을 때도 의사나 약사의 지시를 잘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약을 중간에 안 먹거나 제때 먹지 않으면 그 효과가 없다는 얘기를 줄곧 들으면서도 내 맘대로 투약을 중단하거나 건너뛰거나 했었는데 라면 조리법 하나로 약 먹는 습관까지 바꿨으니 고마울 따름이다. 어느 정도까지는 이 방법이 나의 평화에 기여를 했으니 라면이 내 마음의 평화에 많은 부분을 기여한 것이 맞다.


하지만 매뉴얼이 모든 것의 완성이 아니었다. 끝이 보이지 않는 많은 상담 끝에 수없이 많은 매뉴얼을 받아 들고 살았지만 너무 오랫동안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었다. 수많은 투약과 관리가 내 삶을 아무런 개성없는 회색빛으로 만들었다. 그래서 결국 매뉴얼을 버리기로 했다. 모두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보기로 했다. 상담을 줄이고 약을 줄이고. 결국은 그런 매뉴얼을 다 버렸을때 내 마음이 어떨지 들여다보고 싶어 졌다. 아마 맹탕인 라면으로 돌아가게 될지도 모른다. 그래도 무엇인가는 변할 것이고 지금과는 다른 색을 가지게 될 것이다. 이 회색의 세상에서 빠져 나가고 싶다. 그곳이 검정색의 세상이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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