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서른여덟 번째
아침에 먹는 약을 끊은 뒤로 낮에 현실세계에 집중이 안될 때가 많았다. 그럴 때 현재를 붙잡기를 멈추고 과거 속으로 뛰어들면 마음이 편해진다. 매일매일 현실로 돌아오기 위해 눈을 부릅뜨고 애를 쓰고 있지만 어떤 날은 그 모든 것을 포기하고 과거 속으로 들어가 몇 시간이고 나오지 못한다. 빠져나오지 못하는 그 깊은 늪이 나를 편안에 이르게 한다. 내가 자신 만만하던 시절, 남들이 날 바라보던 시절, 웃음과 분노가 날 살아있게 했던 시절들. 종이인형처럼 껍데기만 남아 이리저리 흔들리는 현실에 눈을 뜰수록 과거로 돌아가 영원히 그곳에 머물고 싶어 진다.
오랜만에 회사 사람들과 식당에 왔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와 본 콩나물 해장국집. 어제저녁 다 같이 술을 마신 듯 아침부터 해장국 이야기를 하더니 기어이 콩나물 해장국집에 왔다. 그런데 나는 왜 같이 오게 된 것일까. 기억이 간간히 사라지고 있다. 누군가 나를 불러서 같이 왔기만을 바랄 뿐이다. 다들 별다른 고민 없이 해장국을 시켰다. 콩나물 해장국과 황태해장국 등등. 나는 황태해장국을 시켰다. 주문 후 얼마 안 있어 펄펄 끓는 뚝배기에 황태해장국이 나왔다. 달걀이 풀어진 하얀색 국물 안에 콩나물, 황태, 파 등이 들어 있었다. 호호 불어 한 모금 떠먹자 갑자기 미국 생각이 났다
LA에 출장 갈 때마다 회사가 지정한 호텔에 묶었다. 1인 1실 일 때도 있고 2인 1실 일 때도 있고. 대부분 2인 1실로 누군가와 방을 같이 썼다. 그 호텔은 LA 한인타운에 있었고 치안이 그리 뛰어난 곳에 있다고 말하긴 어려웠다. 처음 그 호텔에서 숙박하던 날 밖에서 들리는 총소리와 사이렌소리 등이 날 잠 못 이루게 했다. 지나고 보니 매일 그런 것도 아니고 그날이 유달리 시끄러운 날이었다. 투숙객은 대부분 한국 사람인 그 호텔의 종업원은 대부분 미국사람이었다. 동양계, 멕시칸 등이 있었지만 한국사람은 카운터를 보는 매니저 한두 명이 가끔 보일 뿐이었다. 저렴한 호텔도 아닌지라 다른 직원들은 왜 꼭 그 호텔을 이용해야 하는지 불만들이 많았다. 출장을 가도 밤에 술을 먹지 않는 나는 저녁식사 후 호텔 근처를 산책하거나 근처 몰에 가곤 하는데 그 호텔은 산책하기엔 조금 음침한 거리였고 다른 몰에 가기엔 거리가 있어 할 일이 없었다.
그래도 난 그 호텔을 싫어하지 않았다. 밤거리의 음침함도 LA의 대표적인 모습이라고 생각했다. 4층밖에 안 되는 낡은 호텔이지만 창밖으로 끝없이 펼쳐진 아름다운 LA의 야경이 보였다. 직사각형으로 끝없이 뻗어있는 그 도시를 보면 내가 미국에 있는 것을 끊임없이 일깨워 주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조식 메뉴에 황태해장국이 있었다. 한국에서는 대충 빵이나 커피, 과자등으로 아침을 때우는 나는 그 호텔에 가면 이상하게 꼭 아침에 황태해장국을 먹었다. 외국인 서버가 가져다주는 메뉴판을 보고 이리저리 고민하는 척하면서 결국 황태해장국을 시켰다. 곧이어 웨이터 혹은 웨이트리스가 커다란 흰색 사기그릇에 가득 담긴 황태해장국을 가져다주었다. 고백하건대 난 황태해장국을 미국에서 사랑하게 되었다. 하얀색 뽀얀 국물에 풀려 익은 계란, 고소한 황태. 흰밥과 같이 먹으면 그 짭조름한 국물이 계속해서 밥을 불렀다. 그렇게 아침을 먹고 나면 점심을 간단한 샌드위치나 빵으로 먹기에 부담이 없었다. 사회생활을 하고 나서도 황태해장국을 잘 먹지 않았지만 LA에 가면 항상 조식으로 현지음식처럼 먹은 탓에 한국에서 황태해장국을 먹으면 LA 생각이 났다.
나이가 들면 젊은 날의 그날들이 너무나 그리워진다. 아무리 현재에 마음을 잡고 있어도 작은 틈 하나로 급격히 무너져 과거로 가버린다. 건더기도 별로 없어 휑한 황태국밥을 한 모금 들이키자 모든 것에 균열이 갔다.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바쁜 하루, 날 찾던 사람들, 내가 가야 할 곳이 있었던 날들은 이제 돌아오지 않는다. 내가 아무리 많이 알고 일에 능숙해져도 세상은 다시 젊은 사람중심으로 돌아가게 되어있다. 점점 변방으로 밀려나서 완전히 잊히기 전까지만 겨우 일을 할 수 있을 뿐이다.
떠들썩하게 해장국을 먹던 동료들은 하나둘 일어나서 계산대로 간다. 카드를 꺼내 각자 계산을 하고
하나둘씩 문을 열고 가게를 나간다. 밖에는 햇살이 가득하고 사람들의 얼굴은 빛이 가득하다. 그립다. 그 모든 것이. 하나둘 늘어가는 주름의 그림자에 가려지기 전에 빛나던 얼굴을 가졌을 때가 너무나도 그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