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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Sep 13. 2023

명줄이 긴 김밥 한 줄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열네 번째

혼자 살게 되면서 참 요긴한 것이 김밥이다. 한 줄 먹으면 배도 든든하고 먹기도 편하고 어딜 가나 맛이 비슷비슷해서 실패하는 일도 별로 없다. 밥 차려 먹기 귀찮은 날에는 동네 김밥집에서 한 줄 사서 집에 와서 먹곤 했었다. 그런데 어렸을 때 엄청나게 많은 김밥을 해서 접시 위에 산더미 쌓아서 먹곤 했던 기억이 있는지라 알루미늄 포일에 쌓인 한 줄짜리 김밥은 초라하기 그지없었고 그런 김밥을 볼 때마다 마음이 아픈 나는 귀찮음을 감수하고 김밥을 해 먹기 시작했다. 젊을 때는 집에서 라면조차 잘 안 해 먹었는데 다 늙어서 관절마다 아픈 나이가 되서는 우울함을 떨쳐내는데 도움이 된다는 생각이 들어 의식적으로 집에서 뭘 해 먹으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리고 젊을 때는 그리도 부르는 사람이 많더니 이제는 하루에 문자하나도 오지 않아 시간이 많이 남기 때문이기도 하다. 


김밥이 어느 나라 음식인지 잘 모른다. 일본식당등에서 비슷한 것들을 팔긴 하지만 한국의 김밥 같은 건 없다. 그렇다고 한국 전통음식도 아닌 듯하다. 어쨌든 김밥은 생겨났고 예전에는 특별한 날에 김밥을 해 먹었다. 그중 어린이 생활의 꽃인 소풍을 갈 때 김밥은 기본 중에 기본이었다. 김밥에 사이다 정도 싸가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었다. 다들 모여서 꺼내든 서로의 김밥들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사는 형편이 비슷비슷한 어머니들이 싸준 김밥은 소시지, 단무지, 계란, 시금치 같은 것들로  속이 채워져 있고 크기만 다를 뿐이지 항상 대동소이했지만 남의 집 김밥을 한 개씩 바꿔서 먹는 것도 소소한 즐거움이었다. 


하지만 소풍날 아침에 어머니가 김밥을 싸고 있을 때 근처에서 얼쩡거리면서 주어먹던 김밥 꼬다리가 항상 더 맛이 좋았다. 소시지와 단무지등 속재료가 길어서 김밥 양쪽 끝으로 삐쭉 나온 꼬다리는 김밥의 사치품 같은 느낌이었다. 김밥은 언제나 좋았고 꼬다리는 최고였지만 당연하게도 좋은 날은 영원히 지속되지 않는다. 어머니는 나이 들어가고 나는 머리가 커졌으며 집에는 어머니 외에는 아무도 없는 날들이 점점 늘어났다. 김밥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는 음식이다. 다 큰 자식은 소풍을 가지 않을뿐더러 집에서 밥을 잘 먹지 않게 되었고 어머니는 본인을 위해서는 김밥을 만들지는 않았다. 그렇게 김밥은 잊혀 갔다. 


그런데 잊어버렸던 김밥이 갑자기 천 원짜리 김밥으로 주변에 나타났다. 김밥천국이라는 이름의 분식집에서 천 원으로 김밥을 팔기 시작했고 전국의 대다수 분식집의 김밥은 천 원이 되었다. 어린 시절 먹을 때 느꼈었던 고급스러운 맛은 아니었지만 천 원짜리 김밥은 한 끼를 때우기에 너무나 좋은 가격이었다. 알루미늄 포일에 돌돌 말은 천 원짜리 김밥을 산더미처럼 쌓아놓고 팔던 그 시절에 나는 너무나 가난했었다. 막 서울에 올라왔고 돈은 한 푼도 없었다. 지하철역에서 자기도 하고 친구집을 전전하기도 했다. 겨우 구한 아르바이트로는 방값은커녕 밥 값 대기도 빠듯했다. 그 가난의 기간이 너무 길었고 나는 계속 절망했었다. 수중에 천 원만 남았을 때 목메달아 죽으려고 밧줄을 사야 할지, 살려고 김밥 한 줄을 사야 할지 고민을 하던 날들이었다. 그래서 그때는 김밥 한 줄이 목숨 한 줄이라는 생각을 하곤 했었다. 


이후 나는 겨우 직장을 잡았고, 월급을 받고, 천 원짜리 김밥을 잊어갔다. 맛이 있었던 것도 아니었고 좋은 추억도 아니어서 김밥을 당연히 찾지 않았다. 하지만 김밥은 명줄이 참 길기도 했다. 어느 날부터인지 김밥은 다른 형태로 다시 주변에 나타나기 시작했다. 값이 좀 있는 스팸류의 햄이나 멸치, 장아찌 같은 것들을 넣은 김밥부터 기본이 되는 쌀부터 좋은 것을 쓰는 건강한 김밥을 표방한 고급 김밥, 계란 지단을 듬뿍 넣어 다이어트에 좋은 김밥 등등 다양한 형태의 김밥들이 속속 생겨났다 더 이상 김밥은 목숨줄을 부지하기 위해 먹는 가난한 음식이 아니게 되었다. 다양한 종류의 김밥들을 먹으면서 나는 가난의 기억들을 잊어갔고 김밥은 다시 좋은 한 끼가 되어 주었다. 오히려 요즘은 가격이 비싸서 잘 사 먹지 않고 있다.  


이제는 집에서 가끔 김밥을 해 먹는다. 시간은 늙어 갈수록 빨리 간다던데 순간은 영원과 같이 늘어지고 지나가면 찰나와 같이 사라진다. 요리를 하는 시간은 영원과 같은 시간에 참 잘 어울린다. 


햄을 기다랗게 잘라서 굽고, 계란을 풀어 얇게 부쳐 지단을 만든다. 단무지는 꼭 챙기고 야채는 있으면 볶아서 준비하고 없으면 생략한다. 밥은 살짝 고슬고슬하게 지은 뒤 참기름, 맛소금등을 넣어 비벼준 뒤 식을 때까지 기다린다. 준비가 끝나면 대나무발 위에 김을 한 장 꺼내 그 위에 밥을 펼치고 재료들을 집어넣어 말아준다. 한 줄 두줄. 김밥들이 쌓여 간다. 분명 한 사람분의 밥을 한 것 같은 데 김밥으로 만들면 양이 꽤 많아 보인다. 김밥 한 줄을 도마 위에 올려놓고 붓으로 참기름을 조금 발라준다. 그 위에 깨도 살짝 뿌려준다. 잘 드는 칼로 터지지 않게 일정한 간격으로 썰어 접시에 담는다. 녹차 한잔과 김밥 한 접시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잠시 기다렸다 꼬다리부터 먹는다. 내가 만든 김밥의 꼬다리는 아무리 노력해도 어린 시절 그때와 같아지지 않는다. 


어머니가 보고 싶어졌다. 지금 고향에서 홀로 나이가 들어 허리가 많이 굽어지고 본인을 위해서는 요리를 하지 않으며 티비시청 외에는 별로 웃을 일 없으신, 내가 때때로 외면하는 어머니가 아니라, 젊고 건강했으며 가난했지만 환하게 웃을 수 있었던 그때의 어머니가 보고 싶다. 그때의 나도 보고 싶다. 


이제는 나도 하루에 한번도 웃을 일이 없이 늙어버렸는데 어머니는 더 깊은 나이에 갇혀 있다. 아무 일도 없는 것처럼. 아무것도 변하지 않은 것처럼. 나도 어머니도 어딘가에 갇혀있는데 서로에게 위로가 되지 않는다. 이번에 고향에 내려가면 김밥을 싸달라고 하려다가 어머니의 모든 시간이 김밥으로 채워질 것 같아 쉽게 말을 꺼내지 못한다. 보고 싶은 마음과 외면하는 마음이 둘둘 말려 서로가 구분이 가지 않는다. 김밥 꼬다리는 언제나 맛있지만 먹을 때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유가 죄책감 때문인지 그리움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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