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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Mar 24. 2024

굿모닝, 맥모닝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예순아홉 번째

밤에 거의 잠이 들지 않았지만 눈을 감고 있어서 그렇게 피곤하지 않다. 눈을 뜨지 않으면 50%는 잠든 것과 비슷한 효과가 있다더니 정말인가 보다. 맞춰진 시간에 일어나고 이불을 개고 하는 일들이 이제는 너무나 자연스럽다. 5시 반에 일어나서 알람을 끄고 이불을 개고 주변을 정리하고 식탁에 앉았다. 아직 밖은 캄캄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다. 정말 모처럼 커피 한잔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믹스커피가 아니라 아메리카노 따듯한 걸로. 찬장을 뒤져 아메리카노 커피 봉지 몇 개를 찾았다. 유통기간이 안 적혀 있었지만 먹어도 될 것 같아서 물을 끓이고 잔에 커피를 담아 기다렸다. 치이익하는 소리와 함께 주전자가 달칵하면서 저절로 꺼졌다. 물이 식을 때까지 조금 기다렸다가 커피잔에 물을 따랐다. 아무런 냄새가 나지 않아 이상하다 생각하며 한 모금 마셨는데 신맛만 날뿐 커피맛은 나지 않았다.


먹다 말은 커피 때문에 자꾸 커피를 마시고 싶어졌다. 정말 오랫동안 끊어온 모닝 커피인데 썩은 커피 한 모금이 온몸의 세포를 깨우는 느낌이다. 시간을 보니 출근까지 두 시간 반이나 남아 있다. 주변에 커피를 마실 수 있는 곳을 검색해 보니 10km 정도 떨어진 곳에 맥도널드가 영업 중이라고 나왔다. 한동안 고민을 하다가 옷을 입고 가방을 챙겨 나왔다. 핸드폰을 켜서 택시호출을 했는데 너무 이른 아침이라 택시가 불러질까 고민할 틈도 없이 택시 한 대가 내 앞으로 도착했다. 요즘 택시를 타면 아무 말도 안 해도 되어서 좋다. 목적지를 이야기함과 동시에 시작하는 택시 기사와의 수다는 어려운 상사와의 침묵만큼이나 불편했다.


15분쯤 지나 목적지인 맥도널드에 도착했다. 주말에 차를 가지고 들려본 적은 있어도 이렇게 이른 아침에 택시를 타고 올 줄은 몰랐다. 하지 말아야 할 것에 대해서는 이렇게나 적극적인 행동력이라니.


문을 열고 들어가니 생각과는 다르게 매장의 반 이상이 차 있었다. 혼자 있는 남자, 여자, 연인, 할아버지 등등 다양한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역시나 날 처음 반기는 것은 키오스크였다. 불편하기 짝이 없는 키오스크 중에서도 맥도널드는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하지만 이 시간에 커피와 간단한 아침을 먹을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울 뿐이다. 언제나 가여운 젊은 노동자들의 눈물로 성장하는 패스트푸드점은 달갑지 않아 하면서 필요할 때가 되면 후다닥 방문하는 자신에게 잠시 역겨움을 표하고 메뉴를 주문했다.


맥모닝.


에그머핀과 커피세트로 된 맥모닝을 받아서 내 자리로 돌아왔다. 커피를 마시자 드디어 온몸의 세포들이 일제히 봉기하며 머리를 두들겨 깨워버렸다. 여전히 똑같은 맛의 에그머핀을 한입 먹자 순간 과거로 돌아가는 느낌이 들었다. 이 맛. 이 커피와 에그머핀의 맛.


이제 늙고 초라해져서 약 없이는 하루도 살 수 없는 몸이지만 나도 회사에서 열성을 다해 일을 할 때가 있었다. 회사를 위해 공부하고 하루종일 쉬지 않고 일했을 때의 내가 있었다. 중국과의 자유로운 무역이 시작될 때였고 회사에서는 중국진출을 위해 사람들을 교육시키고 있었다. 중국에 몇 번 다녀왔어서 중국어공부가 필요하다고 느끼고 있었고 해외 업무로 나 자신을 키워보겠다는 생각에 충만했던 나는 힘들다고 하는 중국어 코스에 지원을 했다. 3개월간 공부 후 시험을 봐서 주재원 자격을 부여하는 코스였다. 매일 아침 6시부터 8시까지. 회사가 지정한 학원에 가서 중국어 공부를 했다. 수없이 많은 사람들이 같이 시작을 했지만 한 달 여가 지나자 우리 반에는 4명의 사람들만 남았다. 수업이 끝나면 8시. 회사까지는 걸어서 10분이면 닿은 곳이었다. 그래서 매일 아침 수업이 끝나면 맥도널드에 가서 맥모닝을 먹었다. 맥모닝을 먹으면서 그날 수업을 받은 얘기부터 시작해서 나중에는 자기들의 꿈이나 연인에 대한 이야기까지 스스럼없이 하는 사이가 되었다.


세달 동안 일요일을 빼고 매일 수업을 받고 매일 맥모닝을 먹었다. 중국어 시험이 있었던 마지막 수업이 끝나던 그날도 맥도널드에 모여 서로가 미래에 대해 이야기했다. 중국에 가서 꼭 만나자. 그렇지 않더라도 회사에서라도 연락하자 등등 수없는 약속을 하고 회사로 돌아왔다. 며칠의 시간이 지나 합격자들을 발표했고 우리 중에 둘만 합격했다. 그리고 나는 곧 중국으로 출장을 가게 되었다. 그리고 다시는 그들을 본 적이 없었다.


미친 듯이 일했던 나는 어느새 소모되고 또 소모되어 더 이상 아무런 총명함도, 활력도, 비전도 보이지 않게 된 후에야 서울의 사무실로 돌아와 앉게 되었다. 칠팔 년간 떠돌던 나는 사무실에 앉자마자 지난 모든 일이 꿈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회사가 꾸는 꿈에 잠시 내가 나왔을 뿐 나의 꿈이 아니었다. 남의 꿈속에서 내 꿈처럼 지난 몇 년 동안 나 자신을 잃고 아무도 아닌 자가 되어 사무실에 앉아있었다. 사람들도 더 이상 날 바라보지 않았다.


내 모든 것은 불살라지고 없어졌고 얼마 후 난 회사에서 쫓겨났다.


커피가 강력한 힘으로 날 과거에서 끌어내 현재로 다시 앉혔다. 아직 어둑한 유리창밖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니고 가게 안에는 모르는 사람들이 영혼 없이 무언가를 먹고 있었다. 나는 여전히 맥모닝을 먹고 남의 꿈을 위해 일하는 회사로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그때와 다르게 난 꿈이 있다. 이제부터라도 살아야겠다는 꿈이 있다. 먹기 전에 굿모닝 맥모닝하면서 떠들던 기억 따윈 이제 없어도 된다. 아침이 밝아오고 조금 늦었구나 생각을 하며 가게유리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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