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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Mar 27. 2024

너무 구운 김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일흔 번째

집안마다 저마다 좋아하는 것들이 다르다. 어느 집은 파김치를 좋아하고 어느 집은 건어물을 좋아하고 어떤 집은 파전을 좋아하기도 하다. 이런 좋아함은 유전인지 교육인지 모르겠지만 가족들 모두 좋아하는 게 비슷하다


우리 집은 김을 좋아했다. 연탄불에 김을 몇 장 구워서 간장과 같이 찍어먹으면 고소하니 밥을 몇 공기를 먹을 수 있었다. 조미 김 같은 것들도 좋아하긴 했지만 몇십 장씩 종이로 묶여 있는 김을 사다가 구워 먹었다. 아마도 그게 가격이 저렴했을 것 같다.


회사 대표가 가져가고 싶은 선물세트를 가져가라고 했었나보다. 외부업체에서 온 선물이었다. 난 밖에 나와 있을 때여서 듣지 못했었다. 퇴근할 때 보니 선물세트를 한두 개씩 가지고 퇴근하고 있었다. 옆자리 동료는 스팸이라고 적힌 박스를 들고 퇴근준비를 하고 있었다. 동료는 나에게 아무것도 안 가져가냐고 물었고 나는 무슨 이야기인지 이해를 못 했다. 회사 대표가 본인한테 들어온 선물 세트를 회의실에 가져다 놓았고 알아서들 한 개씩만 가져가라고 했다는 것이었다.


그 얘기를 듣고 바로 일어나기는 민망했던 나는 퇴근 후까지 기다렸다가 회의실로 가보았다. 선물세트는 딱 한 개 남아 있었다. A4용지 두 개 정도 두께 되는 박스에는 명품 김이라고 쓰여 있었다. 왠지 하나 남은 것을 가져가려니 모양이 이상하게 보일 것 같아 그냥 밖으로 나왔다. 회의실밖으로 나왔을 때 사무실에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퇴근 가방을 챙기다가 그래도 그거라도 가져가야겠다 싶어 김을 가지고 집으로 왔다.


두꺼운 종이상자를 열어보니 100장은 되어 보이는 김이 비닐포장되어 들어있었다. 조미김도 아니고 구워서 먹어야 하는 날 김이었다. 아마 그래서 이게 회의실에 남아 있었던 것 같다. 가위로 조심스럽게 봉지를 잘라냈다. 김은 꽤 투툼 했다. 얄팍한 종이김만 먹다가 모처럼 이렇게 두꺼운 김을 만져봤다. 집에는 김을 구울만한 어떠한 것도 있지 않았다. 가스레인지불을 켜고 김한장을 손에 들고 김을 구우려고 시도해 봤지만 김을 균일하게 구울 수가 없었다. 타버리고 구멍이 나고 까만 재가 주방에 흩날렸다. 온 집안이 탄내음으로 가득 찼다.


김굽는 석쇠를 사야겠다고 생각하고 밖으로 나왔다. 막상 나와서 생각해 보니 요즘 사람들이 김을 구워먹지도 않을 텐데 편의점에 그런 게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집 근처 마트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거기도 편의점만큼이나 작은 곳인데 김굽는 석쇠 같은 게 있을 리가 없다. 다짜고짜 나와놓고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이미 늦었다. 그래도 명색이 마트인데 편의점보다 낫지 않을까 해서 마트까지 걸어갔다. 슬리퍼를 신고 나왔더니 발등이 쓸려 아파오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기도 늦었고 이미 발등은 까졌고 우는 심정으로 마트로 들어갔다.


그런데 마트 한쪽 구석에 다양한 종류의 석쇠가 구석에 전시되어 있었다. 숯불구이용 석쇠들이었다. 그중에서 김 사이즈에 맞아 보이는 작은 석쇠 하나를 쉽게 찾아냈다. 캠핑용 석쇠들이었다. 뜻하지 않은 유행이 내게 유용하다니 살다 보니 별일이 다 있다. 까진 발등이 너무 아파 나중엔 슬리퍼를 손에 들고 맨발로 걸어서 집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따끔거리는 발등에 약을 바르고 밥을 했다. 그리고 가져온 석쇠에 김을 한 장 끼워서 가스레인지에 구웠다. 처음에는 익숙하지 않아 중간만 타서 구멍이 송송 뚫려 버렸지만 중불에서 빠르게 왔다 갔다 하니 고르게 구워졌다. 5장 정도 구운 후 가위로 잘라내니 반찬통 하나에 가득 찼다.


갓 지은 밥과 간장만 준비해서 김과 함께 테이블 위에 놓았다. 따뜻한 밥을 바삭한 김으로 감싸 간장에 콕 찍어 먹었다. 고소한 김향과 짭짤한 간장의 맛이 더해져 순식간에 밥 반공기를 비워버렸다. 잘 구운 김들 위주로 먹다 보니 구멍이 송송난 김들 위주로 반찬통에 남게 되었다.  


선물세트에서 남겨진 김세트, 그중에서도 또 남겨진 구멍 난 김. 왠지 모르게 헛웃음이 났다. 갑자기 등이 뻐근해지고 가슴이 꽉 조여지며 아파왔다. 너무 아파서 눈물이 찔끔 났다. 약을 먹을까 생각하다가 아프니까 슬프지 않아 내버려 두기로 했다.


그래도 오늘 하루를 또 살았다. 살아남았다. 오늘을 살고 내일이 오면 내일도 살 것이다. 아마 그렇게 계속 살면 되지 않을까. 그럼 꿈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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