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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Oct 08. 2023

초콜릿의 분수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스물다섯 번째

갑자기 마음이 착 가라앉을 때가 있다. 당시에는 이유를 모르지만 시간이 지나고 좀 진정이 되면 왜 그랬는지 알게 된다. 원인을 안다고 해결될 문제는 아니지만 그 당시 기분의 계곡은 점점 깊고 넓어져서 건너기가 힘들어진다.


오늘도 갑자기 기분이 너무 가라앉았다. 분명 무슨 일이 트리거가 되었을 텐데 알 수가 없다. 더 가라앉으면 일이 안될 것 같아 화장실 가는 척하면서 사무실을 나왔다.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후다닥 들어간다. 진열대에는 수많은 초콜릿들이 진열되어 있다. 자주 먹는 호두같이 생긴 초콜릿을 집어 들고 계산을 하고 편의점에 있는 바 테이블에 앉는다. 후다닥 껍질을 까서 입에 집어넣으니 온몸에 단 기운이 퍼진다. 한 개 더 까서 입에 넣는다. 오늘따라 다운된 기분이 잘 나아지지 않는다. 복잡한 머릿속이 정리가 되지 않고 이것저것 생각들이 떠돌아다닌다. 내 머릿속에는 호수가 있고 생각들은 배처럼 떠다니는데 오늘은 파도가 거세 생각들이 머릿속 벽에 쿵쿵 부닥치면서 조각조각나고 있다. 그중에서 좋은 기억을 잡아야 한다.


벨기에 출장을 갔을 때 들렸던 초콜릿 거리. 수제 초콜릿을 파는 크고 작은 아름다운 가게들이 골목을 따라 무수히 있었다. 문짝판처럼 넓은 초콜릿을 깨서 무게를 재서 파는 가게, 폭포수 같은 초콜릿 분수가 있는 가게, 초콜릿이 들어있는 예쁜 철제틴케이스를 벽면 가득 전시해 놓고 파는 가게 등등 동화 속 초콜릿가게라면 이렇지 않을까 싶은 아름다운 가게들이었다. 같이 출장을 갔던 회사 선배는 어디론가 없어지고 나 혼자 그 골목들을 헤매고 있었다. 정신없이 초콜릿들을 보고 있는데 갑자기 회사 선배가 나타났다. 한 손에는 생크림을 가득 올려놓은 와플을 들고 있었다.


"먹어봐 이게 진짜 벨기에 와플이라고"


갑작스럽게 권유가 오면 좋은 것이든 나쁜 것이든 일단 거절을 하고 본다. 괜찮다고 했다. 선배가 이유를 모르겠다는 듯이 왜? 한 입만 먹어봐 진짜 맛있어하며 계속 포크를 내게 디밀었다. 괜찮습니다. 배가 불러서요. 계속 거절을 하는 나를 어이없이 바라보며 선배는 광장으로 걸어갔다. 선물용 초콜릿틴케이스 몇 개가 들은 종이봉투를 들고 호텔로 돌아왔지만 아름다운 초콜릿거리는 금세 잊히고 생크림 가득한 와플과 선배의 얼굴만 선명하게 기억에 남게 되었다.


거절할 때는 확실히 싫다고 말해야 한다.


"싫습니다. 아니요. 관심 없습니다."


괜찮다느니 다음번에라느니 하는 것들은 계속 권유를 부를 뿐이다. 아무 말도 못 하는 건 최악이다.


그렇다. 이제 생각이 났다. 오늘 오전에 회사에서 누군가 나에게 갑자기 일을 던졌다. 내가 해온 일이 아니었는데 갑자기 일의 마무리를 내게 던졌다. 일정이 목표보다 늦어지고 있는 일이었는데 나보다 어린 상사가 내게 일을 마무리하라고 하는 바람에 마치 내가 그 일의 담당자이고 나 때문에 늦어진 것 같은 모양새가 되었다. 내가 주저하는 사이 계속 말들이 오갔고 결국 그 일은 내 일이 되었다. 아니라고 했어야 하는데, 내일이 아니라 니 거라고 얘기했어야 하는데 바보같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그때는 당황했지만 지금은 분하다. 공연히 애꿎은 내 마음만 가라앉아서 초콜릿으로 달래고 있다.


세 개를 연속으로 먹었더니 기분이 좀 나아진 듯하다. 달달하다. 맛있다. 하지만 많이 먹으면 변비가 생기는데 하는 걱정이 머릿속에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내게 순수하게 즐거움만 있는 시간이란 없다. 불안은 항상 수면아래 깔려 있어 생각의 배들에 이 리치이고 저리 치이면서 수면 위를 오르락내리락한다. 불안의 배들이 가까스로 항해에 성공하고 있을 때 갑자기 핸드폰으로 문자가 왔다.


"오늘 저녁에 시간 어떻세요?"


저장해놓고 한 번도 연락해 본 적 없는 그 번호로 내용을 알 수 없는 문자가 왔다. 나는 고개를 들어 그 동료가 있는 쪽을 바라보았다. 그 동료는 일을 하는지 칸막이 아래로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문자를 한참을 들여다보고 나서야 그게 나 개인에게 온 것임을 알았다. 회사 단톡방이나 팀방이 아닌 나 개인에게 말이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부들 거리는 손가락으로 겨우 타자를 쳤다. 특별한 일은 없어요. 무슨 일 있나요? 회사일로 묻는 것은 아닐 테지만 최대한 냉정하고 침착하게 보냈다고 생각했다


"오늘 시간 괜찮으시면 저랑 같이 저녁 같이 해요. 드릴 말씀도 있고요. 그럼 7시에 1층에서 봬요"


네 알겠습니다. 이 딱딱하기만 한 문장을 수십 번을 다시 쓰고 지웠다. 가슴이 쿵쾅거려서 지금 몇 시인지 시간이 보이지 않았다. 약을 찾아 가방을 열어보았지만 아침에 먹는 약 외에는 가져오지 않았다. 남은 초콜릿 한 개를 더 먹었는데 심장은 더 빠르게 뛰고 있다. 빨리 정신을 차려야 할 텐데. 지금 몇 시인지 알아야 할 텐데. 늦지 말아야 할 텐데. 화장실에 가서 거울을 봐야 할 텐데. 내 불안의 배들은 갑자기 출렁이는 파도에 산산이 부서져서 머릿속을 잔해로 가득 채우고 있었다.

The end of Part 1. 그대가 다가오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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