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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Oct 06. 2023

모두의 쌈밥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스물네 번째

남들과 같이 하는 시간이 많아질수록  혼자가 되는 일에 대한 두려움이 커진다. 두려움 때문에 즐거울 법한 일을 시작도 안 하는 인생이 무슨 재미일까 싶지만 깨질 바엔 움직이지 않는 나이가 되었다. 그러나 누군가 밖에서 끊임없이 두들기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하고 있다. 다시는 사람들에게 마음을 열지 말자고 결심한 지 10년이 넘었는데 지속적이고 부드러운 그 두들김으로 내 껍질에 균열이 가고 있다.


요즘 나는 사람들과 수다를 떨 때도 있고 심지어 웃기까지 한다. 내 웃음소리에 놀라 주변을 둘러보면 항상 그 동료와 눈이 마주친다. 그 사람은 날 바라보고 있다. 다시 웃음기 없는 얼굴로 돌아가 내 자리로 와서 몰래 약을 먹는다. 감정의 빠른 기복은 우울증을 더 악화시키는 경우가 많았다. 난 빨리 진정해야 했다. 두근거림을 멈추게 하고 난 평범한 일상을 생각한다. 오늘 점심은 뭘 먹을까?


내가 일하는 곳은 그래도 서울에서 TOP 3안에 들어가는 핫 플레이스이다. 트렌디한 가게들도 많고 새로 시작하는 스타트업들도 좋아하는 장소이다 보니 항상 사람이 많다. 코로나가 끝나고 외부활동에 제약이 없어지면서 동네를 찾은 젊은 사람들이 많이 늘어났는데 더구나 재택근무까지 점점 없어지면서 회사원들까지 많아지고 있다. 점심시간에 나가보면 놀러 온 사람들이 줄 서는 식당과 직장인들이 밥 먹는 식당이 조금 다른 편인데 사람이 많다 보니 점심시간 안에 밥을 먹기 힘들어지고 있다. 짧은 시간 안에 밥을 먹어야 하는 직장인들이 한없이 줄 서서 기다릴 수는 없으니 조금 한가한 식당들을 찾아 외곽으로 나가고 있다.


오늘은 역 앞에 아무도 찾지 않는 건물 뒤편의 쌈밥집에 가게 되었다. 그 사람이 가고 싶은 다른 가게들이 있었는데 사람들 줄이 길다 보니 바로 먹을 수 있는 곳을 찾아 결국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오래된 건물의 주차장부지안에 있는 쌈밥집이었다. 점심 특선 우렁 쌈밥. 원래는 전집인 것 같은데 점심에만 쌈밥을 하는 것 같았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10개는 되어 보이는 테이블에 딱 한 테이블 손님이 앉아 있었다. 자리도 많은데 구석자리로 안내해 준다. 보통 이렇게 손님이 없으면 편한 자리에 앉으라고 할 만도 한데 구석부터 채우겠다는 생각인지 제일 구석자리에 안내받았다. 앉아서 메뉴판을 보려고 하는데 아주머니가 쌈밥 네 개죠? 하면서 주문을 마무리했다. 여럿이서 먹는 쌈밥처럼 싫은 게 없다. 특히나 회사 동료처럼 친근하지 않은 사람들과면 더 그렇다. 네 명이 쌈밥을 시키면 이 인분씩 합쳐져서 나온다. 된장찌개 두 개, 제육 큰 접시로 두 개, 쌈채소 두 개 등등. 1인분씩 소반에 나오는 쌈밥 정식이라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하고 있는데 역시나 기대를 저버리지 않고 쌈은 큰 대접에 한 사발, 1인분쯤으로 보이는 된장찌개와 제육볶음 두 개, 그리고 2인분 정도로 보이는 우렁 쌈장과 밑반찬들이 나왔다. 그나마 신기한 것은 철제솥에 각각 밥을 한 솥밥이었다. 다들 각자 솥에 있는 밥을 덜어 공기에 담고 솥에 미지근한 물을 부어 누룽지가 되기를 기다리면서 쌈을 싸기 시작한다. 제육으로 나온 고기를 보니 고기라기보다는 고기가루와 같았다. 한점 집으니 우수수 부서져 내린다. 그리고 우렁 쌈밥인데 쌈에 우렁이 하나도 없다. 정말 근본이 없는 식당이다. 네 명이서 한두 개 집어 먹으니 고기가 하나도 남지 않았다. 역시 나머지는 양념과 고기가루이다.


여길 오자고 했던 그 사람이 미안한 표정을 지으며 여기 너무 별로인데요 하면서 겸연쩍어한다. 나머지 동료와 나도 같이 불만을 토로한다.


"고기가 너무 없어요"

"된장찌개가 맹탕이네요"

"네 명인데 반찬은 이인분만 줬나"

"그나마 누룽지는 먹을만하군요"


얼마 만에 다른 사람들과 같은 마음으로 이야기하는지 모르겠다. 같은 시간, 같은 자리에서 앉아있어도 나는 혼자 부유하며 다른 세계에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한 테이블에 앉아 있는 네 명이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고 그 안에 나도 있다. 불친절하고 허름하며 테이블은 끈적거리고 음식의 맛이 없고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마침내 오늘은 다 같은 자리, 다 같은 시간 안에 나도 있다. 동시에 웃고 이야기하고 그 자리가 떠들썩하다. 맛없는 쌈밥이지만 모두의 쌈밥.


하지만 그 세계에서 부유하지 않은 건 내 의지가 아니었다. 어디에선가 뻗어 나온 얇은 끈이 나를 잡고 있음을 깨달았다. 그 사람의 입가에, 눈가에, 손짓에 묶인 끈들이 나를 그 세계에 내려 앉히고 있었다. 이내 그 세계는 조용해지고 그 사람의 웃음소리만 들려온다. 두근 거림이 다시 시작되었다. 가슴이 터질 듯이 고동치지만 아프지 않았다. 머릿속으로 어딘가로부터 그만 멈추라는 말이 계속 들려오지만 내 마음은 전혀 그럴 생각이 없는 듯했다. 곧이어 그 사람 웃음소리도 멈추고 모든 소리가 조용해지면서 나의 심장소리만 들려온다. 난 그 소리가 밖으로 들릴까 봐 가슴을 움켜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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