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면아래 Oct 22. 2023

이상한 해장국집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스물여섯 번째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26일 차

아침에 일어나니 꿈인지 생시인지 구분이 가지 않는다. 지난밤 그 사람의 입에서 여러 가지 말이 나왔는데 첫 말 외에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그 첫마디가 내게 오자마자 공간은 비틀어지며 단절되어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어찌 집으로 돌아왔는지 모르지만 나는 취해 있었다. 일어나자마자 기다리고 있던 간절한 목마름이 생각보다 많은 술을 마셨음을 깨닫게 해 주었다. 벌써 오전 10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주말에도 일찍 일어나려고 했는데 단 하루 만에 몇 달간 노력한 습관이 깨어졌다. 하지만 우울하지 않다. 그거면 된 거 아닌가?


'일어났어요?'


핸드폰으로 문자가 와 있었다. 일어났다고 당신은 잘 잤냐고 문자를 보내고 한참을 들여다보았는데 답장이 없다. 사과를 깎아먹었는데 머리가 아파왔다. 늦은 답장 때문에? 아니면 어제 먹은 술 때문에? 갑자기 해장국이 먹고 싶어졌다

 

술은 거의 못하지만 해장국은 좋아한다. 해장국이라는 게 너무 평범하고 취급하는 식당들이 많다 보니 해장국 먹으러 가자 하면 어떤 종류의 해장국인지, 그중에 어떤 집인지 말해줘야 할 정도로 많은 해장국집들이 주변에 있다. 해장국이라는 게 말 그대로 술 마시고 해장하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음식이라 집에서 술 마시는 사람이 없는 어린 시절을 보낸 나는 사회생활을 하면서 처음 접하게 된 음식이다. 여러 종류의 해장국들이 있겠지만 가장 널리 퍼져 있는 건 선지해장국이 아닐까 싶다. 펄펄 끓는 뚝배기에 선지와 고기 또는 내장 조각들이 들어 있는 선지 해장국을 처음 접한 건 양평 해장국집에서였다. 처음에는 선지의 식감과 소피라는 재료의 낯설음 때문에 먹기가 쉽지 않았다. 내가 찾아서 갈 일 없는 음식이긴 하지만 회사원이 사회생활하면서 해장국집을 얼마나 많이 가겠는가. 정말 많은 해장국집을 가다 보니 점점 익숙해져서 이제는 단골집도 생기고 제법 즐겨 먹는 편이다. 혼자가도 전혀 눈치를 볼일 없다는 게 더 큰 장점이긴 하지만.


동네마다 전부 00 양평해장국집이기 때문에 어디가 원조인지 어디가 맛있는지 알기는 쉽지 않다. 그냥 여러 군데 가보고 경험상 맛있는 곳을 갈 뿐이다. 최근 몇 년 사이에 찾은 해장국집이 하나 있다. 차를 타고 좀 가야 해서 자주 가지는 못하지만 먹을 때마다 양도 적당하고 맛도 괜찮아서 해장국이 생각날 때면 가곤 한다. 20대 정도 주차가 가능한 주차장도 있고 주차장만 관리하는 직원이 있어 차를 세우기도 편하다. 갈 때마다 사람이 많긴 한데 못 앉아서 못 먹은 날이 없다. 자리에 앉아 주문을 하면 주문과 거의 동시에 나오고 해장국 특성상 먹는 사람들이 오래 앉아서 먹지도 않아 자리회전이 정말 빠르다.


점심시간이 지났는데도 문자가 오지 않았다. 기분은 계속 가라앉고 있었고 하늘을 보니 비가 올 것 같기에 더더욱 해장국이 먹고 싶어졌다. 그래서 차를 타고 해장국집으로 갔다.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지만 주차장은 거의 다 차 있었다. 안내를 받아 한쪽에 차를 주차하고 들어갔다. 항상 먹던 데로 해내탕을 시켰다. 해내탕은 내장고기들이 많은 해장국의 일종이다. 잠시 후 서빙하는 직원분이 펄펄 끓는 뚝배기를 가지고 왔다. 내가 세팅한 숟가락을 해내탕에 꽂아 넘치지 않게 조치해 주고 간다. 끓어서 넘치는 해장국에 숟가락을 꽂아서 건더기들을 살짝 들으면 넘치는 게 멈추는 것 같은데 이 집 만의 특징이기도 했다. 끓기가 멈추고 먹을 만 해지자 나는 숟가락을 빼서 국물을 먼저 맛보았다. 내가 아는 익숙한 그 맛이었다. 건더기를 먹으려고 저어보니 선지가 없을뿐더러 내장고기가 너무 큰 것이었다. 보통 내장고기는 젓가락보다 조금 두꺼운 정도로 썰어져 있는데 오늘따라 엄청난 두께의 숟가락 만한 내장 고기들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이다. 의아해서 직원을 불러 물어보았다. 오늘 해내탕 내장이 좀 크고 두껍네요. 다른 게 잘 못 나온 게 아닐까요?  나이 지긋한 아주머니는 그게 맞다고 한다. 해내탕은 원래 그렇게 나온다고. 해장국이 내가 말한 대로 선지에 내장이 섞여 나온다는 것이다. 예전에는 이렇지 않았다고 했지만 아주머니는 단호했다. 어쩔 수 없이 먹으면서도 뭔가 이상하다 싶어 예전 사진들을 찾아보았다. 처음 간 음식점에서는 음식 사진을 찍어서 가게의 위치 정보를 포함한 기록을 남기기 때문에 사진이 있을 것이다.


한참을 핸드폰을 뒤적거려 사진을 찾아보니 내가 찍은 사진에는 선지와 내장이 들어 있는 내가 아는 해내탕이 찍혀 있었다. 겨우 2년 전에 찍은 사진이었다. 이거 봐라 내가 맞지 않나 생각하고 의기양양하게 사진을 더 찾으려고 뒤로 가보니 주문표도 같이 찍혀 있었다. 충격적이게도 주문서에는 해장국에 표시되어 있었다. 기억이 전혀 나지 않았다. 해장국이라니.  난 근 몇 년간 여기서 해내탕을 먹었는데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이가 먹어 기억이 희미해지는 것은 이해가 가지만 기억이 다른 것으로 완전히 대체된 것은 처음이었다. 아무리 사진을 뒤져봐도 그 두장 외에 다른 정보는 없었다. 내 기억이 바뀐 게 맞는 것이다. 울 것 같은 마음이 되어 해내탕을 먹고 있는데 두 테이블 건너 앉은 노년의 아저씨들 중 한 명이 큰소리로 얘기하는 것이 들렸다. 아니 내가 시킨 건 해내탕이라니까 이게 뭐야? 직원은 이게 해내탕이 맞다고 했다. 서빙하는 아주머니는 무뚝뚝하게 똑같은 톤으로 말했다. 손님이 말한 것은 해장국이라고 해내탕은 이게 맞다고. 아저씨는 그럴 리가 없는데라고 계속 중얼거리면서 같이 온 사람들의 얼굴을 바라보는데 아무도 동조해 주지 않는 얼굴이었다. 빨리 밥이나 먹고 나가자는 얼굴들. 잠시 후 그 아저씨도 조용히 해내탕을 먹기 시작했다.


나는 조금 안심이 되었다. 나이를 먹으면 그럴 수도 있다는 것에, 그리고 내가 완전히 이상한 게 아니라 식당이 이상할지도 모른다는 그 아주 조그만 가능성에 안도했다. 매사 마음먹기 달린 것이다. 내가 옳은 세상에 살면 그만이다. 난 다시는 이 해장국집에 오지 않을 것이다. 그래야 내 세상이 유지될 수 있으니까. 맛있는 해장국집은 아깝지만 내 마음이 더 중요하다. 이상한 해장국집이네.


그때 딩동하고 핸드폰에 문자가 왔다. 허겁지겁 핸드폰을 보았다. 그 사람의 문자였다. 그래 잘못된 기억이 아니었다. 분명 실제 하는 기억이었다. 눈물이 났지만 흐르지는 않았다. 기쁨보다는 안도의 눈물이었다.


작가의 이전글 초콜릿의 분수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