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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Jan 03. 2024

진지한 설렁탕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마흔여섯 번째

사람들은 나보고 대충대충 하라고 한다. 일도 삶도 너무 신경을 많이 쓴다고 설렁설렁해도 된다고 말하곤 한다. 친한 사람들 뿐만 아니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저리 말하는 걸 보면 내가 항상 애쓰고 있는 게 보이는 것 같다. 여유 있는 척, 아닌 척해봐야 잘 숨겨지지 않는 것이다. 설렁설렁하기 위해 무던히 애를 쓴다는 말이 참 이상하다. 애를 쓸게 아니라 한두 개쯤 멋대로 되라지 하며 내려놓기만 하면 되는데 그걸 못해서 열심히 설렁설렁하려고 노력한다.


예전에 다 같이 밥을 먹을 때 누군가가 이 설렁탕처럼 설렁설렁해라고 말을 했는데 그 당시에는 아무도 웃지도 대꾸하지도 않았는데 내 기억 속에는 몇십 년 동안 잊히지 않고 새겨져 있다. 왜 이런 기억들은 사라지지 않는 것일까.


그래서 난 설렁탕을 먹을 때마다 이상한 기분이 든다. 설렁탕은 대충 만들면 정말 맛없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육수에 고기 몇 점이 들은 게 다이지만 맛이 있으려면 고기가 비린 맛이 없고 파를 넣으면 시원해질 정도로 살짝 진한 국물이어야 한다. 거기에 깍두기와 김치는 시원하게 맛이 있어야 맛있는 설렁탕이 완성된다. 갈비탕집이나 분식집에서 나오는 설렁탕은 설렁탕 맛이 안 난다. 한때 프랜차이즈 설렁탕집들이 우후죽순 생기곤 했는데 유행이 한풀 꺾였는지 요즘은 잘 보이지 않는다.  


오늘은 외부 출장이 있었는데 날도 좋은 데다가 회사에 들리지 않고 바로 출장지로 혼자 가는 출장이라 기분 좋게 아침을 시작할 수 있었다. 출장을 대충 마무리하고 점심을 어디서 먹나 찾고 있었는데 예전에 유행했던 설렁탕 체인점이 근처에 있었다. 멀지 않은 거리라서 다시 차를 타고 체인점으로 향했다 점심시간도 조금 지나 있었고 설렁탕체인점도 오래된 곳이라 사람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가게에 도착하니 주차장이 거의 만석이었다. 사람 많은 식당에 혼자 들어가는 것은 언제나 긴장이 된다. 어떤 가게들은 싫지 않은 척, 아무렇지 않은 척 안내를 하지만 난 그런 것을 놓치지 않고 캐치할 수 있다. 차라리 대 놓고 점심시간에는 1인 손님은 안 받습니다 하는 가게가 마음이 편하다.


다시 나갈까 하는데 이미 늦었다. 나이 드신 아주머니 한분이 오시더니 혼자 오셨냐고 하면서 자리를 안내했다. 2인용 자리에 앉은 나는 혼자 온 걸 보상이라도 하는 듯 제일 비싼 특설렁탕을 주문했다. 이 정도면 자리에 앉아도 되는 거죠?라는 눈빛으로 아주머니를 쳐다보았는데 아주머니는 무슨 상관이냐는 옅은 웃음을 지으며 주문을 받아 적고 갔다. 어차피 다 먹지도 못할텐데하고 후회할틈도 없이 고기가 잔뜩 담긴 설렁탕과 김치와 깍두기 항아리, 대파가 가득 담긴 대접이 테이블 위에 차려졌다. 파를 좋아하는 나는 파를 다 집어놓고 소금으로 간을 한 다음 맛을 보았다. 내가 아는 설렁탕 맛이다. 김치와 깍두기도 제법 시원하니 맛이 있다. 먹으면서 주변을 둘러보니 대부분 중장년층 이상의 사람들이 테이블에 앉아 있다. 설렁탕을 먹으면서, 혹은 다 먹고 나서 웃으며 떠드는 소리가 가게 안을 채운다.


나이 든 사람들이 모여있어도 진심으로 즐거우면 행복한 기운이 깃든다. 나이의 문제가 아니다. 설렁탕 한 그릇 때문인지 자기들 일이 잘되서인지 모르지만 식당 안은 즐겁다. 혼자 밥을 먹는 내게 누구도 신경 쓰지 않고 나도 그럴 필요가 없는 식당이다. 예전에는 이런 식당들이 많이 있었다. 최신 유행을 타지 않으면서 제 할 일을 묵묵히 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식당들 말이다. 다 먹고 계산을 하는데 아주머니가 맛있게 먹었냐고 물어보았다. 자연스럽게 네! 너무 맛있었어요라고 대답하는 나 자신에 깜짝 놀랐다.    


나오면서 가게를 돌아보니 다 낡은 프랜차이즈 간판에 본점이라고 크게 적혀 있었다. 누군가 새로 써서 붙인 자국이 역력하다. 그래 본점이던 지점이든 무슨 상관일까. 맛이 좋고 친절해서 사람들이 좋아하면 그만이지. 나는 내가 줄곧 이상하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냥 맞지 않는 시간에, 맞지 않는 장소에 자주 있게 되는 것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냥 천천히 나이를 먹어가며 늙어가고 있을 뿐이라고. 그 나이듦을 잘 인정하지 못해 자주 세상에서 떨어져 나오지만 그게 자연스러운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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