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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Dec 31. 2023

썩지 않는 호두과자

100가지 요리, 100가지 마음. 마흔다섯 번째

아침에 약을 찾고 있는데 색이 바랜 약봉지들만 남아 있었다. 약국에서 사는 약들은 유통기간이 보이지만 조제약들은 컽봉투가 없으면 언제 만들어진건지

대부분 알 수가 없다. 더 찾기가 귀찮아진 나는 노람 약봉지를 뜯어 물과 함께 넘겼다.


아침에 먹는 약을 안 먹는 것이 거의 습관으로 자리 잡는 듯하다. 매일 아침에 먹어야 하는데 기분이 살아나지 않는 날에만 먹는 정도로 바꾸는데도 꽤 시간과 노력이 들어갔다. 생각보다 견딜만하다. 잠드는 시간은 일정하지 않지만 일어나는 시간을 일정하게 정한 것도 한몫을 했는지 몸이 피곤해도 죄책감이 커지지 않는다.


물을 다시 냉장고에 넣으려고 보니 냉장고에 작은 락앤락통이 가득하다. 무언가를 먹고 남으면 락앤락통에 넣고 잠가 버린다. 그래서 한동안 정리를 안하면 냉장고 안이 락앤락통으로 가득하다.


작은 밀폐용기로 가득 찬 냉장고를 보고 있자니 난 어떻게 보면 참 일관성 있는 사람인 것 같기도 하다. 남은 음식을 보관하는 것도 내 마음을 보관하는 것도 어쩜 그리 비슷할 까. 마음을 풀어 없애버리는 일이 좀처럼 없다. 작은 밀폐용기에 담아 차곡차곡 마음속에 쌓아 놓는다. 속이 좁은데도 마음속 창고는 끝이 없어서 밀폐용기가 마음속에 끝없이 쌓여 간다


냉장고라도 정리해야겠다


냉장고 앞에서 주섬주섬 밀폐용기들을 꺼내 바닥에 내려놓는다. 한참을 꺼내도 안쪽에서 용기들이 계속 나온다. 40개는 족히 나온 것 같다. 모두 챙겨서 싱크대위에 올려놓는다. 하나씩 열어서 음식물을 싱크대 안에 쏟아 버린다


김치, 또 김치, 피자 한 조각, 치킨, 또 치킨, 또 치킨, 짜장소스, 단무지, 또 단무지.


용기수는 많은데 가짓수는 그렇게 많지 않다. 대부분 색이 변하고 이상한 물이 생겼다. 하나씩 꺼내서 열 때마다 눈살이 찌푸려진다. 욕지기가 나는 것도 겨우 참으며 전부 싱크대에 쏟아 버린다


호두과자 8알?


종이에 쌓인 호두과자 8알이 있다. 의외의 것이 있어 이게 뭔가 하고 한참을 생각했다. 종이까지 음식물 쓰레기로 버릴 수 없으니 종이를 살짝 까본다. 멀쩡한 호두과자가 나온다. 언제 적 호두과자인지 바로 기억이 나지 않는다. 김치나 반찬들이야 그러다 쳐도 호두과자를 왜 넣어놓고 잊어버렸을까.한참을 호두과자를 만지작 거렸다. 드디어 기억이 났다.


1년 전쯤 출장을 갔을 때였다. 회사 동료와 청주 쪽으로 출장을 갈 일이 있어서 차를 타고 가고 있었다. 차를 모는 것을 좋아하지 않기에 대부분의 출장은 회사동료의 차를 타는 편이다. 예전에는 조수석에 앉아 지도도 보고 길도 찾고 해야 했지만 지금은 조수석이라는 말자체가 무의미해졌다. 그래서 그날도 아무 생각 없이 조수석에 앉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천안이라는 안내판이 나오는 것이었다. 청주를 가는 데 천안을 거쳐서 가야 하나? 생각하고 있었는데 차는 천안 IC를 빠져나가고 있었다.


“지금 우리 어디 가는 거예요? 이리로 가면 돌아가는 거 아네요?”


그는 호두과자를 사러 간다고 했다.


“왠 호두과자를 지금 사요? 올라올 때 사도 되는데”


오리지널리티란 무엇일까. 카피품에 대한 경험이 많아질수록 오리지널에 대한 궁금증은 커지기 마련이다. 그래서 반드시 찾아서 궁금증을 해결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귀찮음이 궁금증을 이겨 그냥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 나는 카피가 마음에 들면 일부러 오리지널을 찾지 않는 사람이다. 카피품에 대한 만족도가 높을수록 오리지널이 대한 기대가 커져 실망감도 커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굳이 찾아볼 생각도 안 하게 되었다. 하지만 내 주변에는 오리지널을 꼭 찾아보는 사람들이 있다. 생각보다 많고 그들의 행동력은 정말 빠르다. 가는 회사에 선물로 주고 싶다는 것이었고 자기가 오리지널 호두과자가게를 찾았기에 거기서 사서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오리지널 호두과자의 맛이 참 궁금해졌다. 한두 시간을 더 가서 미팅 장소에 도착한 우리는 호두과자를 들고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서글서글한 동료는 호두과자를 건네주며 연신 너스레를 떨 어땠다.


“아 여기 아시는군요. 여기가 진짜 원조죠”


거래처 사람의 말을 들어보니 제대로 된 곳에서 산 모양이다. 하지만 이 사람들은 가까우니까 자주 사 먹어 보지 않았을까? 우리는 다시 그곳에 갈 일이 없을지도 모르는데, 그래서 우리가 먹었어야 했는데.

선물은 확실히 효과가 있어 이야기가 자연스럽게 잘 풀렸다. 호두과자는 먹지 못했지만 속이 아플 정도로 긴장하면서 온 출장이라 다행이다 싶었다. 이야기가 잘되어 갈수록 소파옆에 나란히 놓인 호두과자에 눈이 더 갔다. 하나쯤 포장을 풀어 권하지 않을까 해서 흘깃흘깃 보며 계속 기다렸지만 웃으며 악수를 하고 회사를 나올 때까지 호두과자는 제자리에만 있었다.


역시나 난 다시는 그 호두가게에 가지 못했다. 지나가다가 천안을 많이 지나쳤지만 호두과자 하나 먹으려고 고속도로를 빠져나가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일이 있은 후 가끔 호두과자가 먹고 싶어졌다. 한때 유행했던 프랜차이즈 호두과자가게들을 찾아냈고 맛이 나쁘지 않았다. 최소한 고속도로 휴게소 호두과자보다는 훨씬 나았다. 그러다 시름시름 관심에서 멀어진 호두과자를 냉장고 깊숙히 넣어버리고 잊어버렸다.


왜 내가 이걸 냉동시키지 않고 냉장보관을 했을까?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 기억도 또 깔끔히 없어졌나 보다. 거의 1년 전에 산거임에도 어제 산 것처럼 멀쩡 했다. 먹을 수가 없었다. 속이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어서 반을 잘라보았는데 전혀 이상이 없어 보였다 그래서 더 먹을 수가 없었다. 냉장실에서 1년이나 멀쩡한 음식이 음식일까 싶었다.


뭔가 의심이 가기 시작한다. 오리지널이라면 벌써 썩어버리지 않았을까? 썩지 않는 게 좋은 걸까 나쁜 걸까. 시간이 지나면 변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변하지 않는 게 더 이상하고 문제가 있는 것이다. 매번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이라도 내게 변화가 다가오면 깜짝 놀라곤 한다. 내가 모든 일에 기준이 되는 삶이면 그렇게 민감하지 않을 텐데 나의 상태를 온갖 외부적인 상황에 비추어 바라보다 보니 내가 어디쯤 있는지 확신이 없고 잘 모르기 때문에 더 무서워진다. 오리지널 호두과자. 나도 나 한 명으로 오리지널인데 남들이 인정해주지 않으면 오리지널인지도 모른다. 남들은 내가 오리지널이던 아니던 신경 쓰지도 않는데 오히려 내가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나 자신을 찾으려 한다. 항상 인정해 주길 바라고 기대가 무너져 자신을 잃어버린다. 그때 그 호두과자, 한 개라도 달라고 해서 먹어볼걸 그랬다. 난 그 정도 너스레도 없는 사람이다. 그깟 호두과자 하나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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