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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Jan 07. 2024

잔잔한 바다의 칼국수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마흔일곱 번째

서해안을 따라 차를 몰고 가다보면 칼국수 가게를 많이 볼 수 있다. 소나무 숲이나 길가에 있는 자그마한 칼국수집부터 넓은 주차장을 가진 몇 층 짜리 가게까지 다양한 칼국수가게들이 있다. 나는 칼국수를 좋아하지만 이렇게 바닷가에 있는 칼국수집에는 잘 가지 않는다. 이런 곳은 싱싱한 해물이 주가 되고 칼국수는 사리 같은 개념인 곳이 많다. 감자같은 것이 들어가는 예전 칼국수를 좋아하는 나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예전 회사에서는 워크숍(이라고 부르는 술파티)을 서해 쪽에 있는 리조트나 펜션등에서 한 적이 많았다. 대표이사가 몇 마디 하고 나면 밤새 술을 먹는 그런 종류의 워크숍이었다. 다음날 아침이면 다들 썩은 얼굴로 일어나서 주섬주섬 짐을 챙긴 다음 칼국수집에 가곤 했다. 그런데 워크숍 다음날 가는 칼국수집들은 해산물도 많았지만 칼국수 자체도 꽤 괜찮은 곳들이 많았다. 지나고 보니 이유는 간단했다. 난 항상 사람이 많지 않아 바로 먹을 수 있는 가게들을 찾았고 회사워크숍에서는 책임자들이 그 동네에 유명한 식당을 찾아서 예약하고 간 것이다.


깨달음 이후에도 몇 시간씩 줄 서는 그런 식당들을 찾아가진 않았지만 그런 식당 근처에 있는 적당히 사람 있는 식당들을 찾기 시작했고 실패하지 않았다. 바다가 보이는 한적한 식당에 앉아 칼국수를 먹는 건 생각보다 기분이 좋아진다. 서해는 뻘밭이 대부분이고 바다색도 황토빛이지만 안전한 식당 자리에 앉아 넓게 뻗은 수평선을 보면 오밀조밀 모여있던 근심들이 조금씩 멀어져 간다. 단점은 대부분 이인분 이상 팔기 때문에 누군가와 같이 가야 한다는 것이다.


다행히 지금 내가 좋아하는 그사람은 해산물을 정말 사랑한다는 것이다. 안 좋은 점은 꼭 지역에서 제일 유명한 집에 가서 먹어야 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요즘 트랜디한 유명 맛집들은 대부분 핸드폰으로 예약을 걸 수 있어서 시간이 남으면 다른 곳들도 둘러보러 가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데 해변가 칼국수집들 대부분은 그런 거 없이 노트에 이름을 적어 놓고 불러주길 하염없이 기다려야 한다.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데다가 혹시나 불렀을 때 내가 못 들으면 어쩌지 하는 걱정까지 더해져 기다리는 시간이면 신경이 날카로워진다. 같이 간 그 사람은 이런 일에는 천하태평이다. 못 들으면 다시 가서 얘기하면 들여보내 준다며 핸드폰 게임을 하면서 내가 부르는 소리도 못 들을 정도로 집중한다. 역시나 기다림은 내 몫이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기다리는 스트레스가 맛있는 기쁨을 넘어섰고 점점 그런 칼국수집에 가는 일이 드물어졌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요즘 제철이라고 가리비 한 무더기를 사 가지고 왔다. 족히 20~30개는 되어 보였다. 한 번에 쪄서 먹기에도 좀 많은 양이라 먹고 남은 가리비는 냉동실로 들어가 한편을 차지했다. 그리고 그 가리비는 잊혔었다. 어느 일요일 오전, 그 사람이 갑자기 칼국수가 먹고 싶다고 밖으로 나가자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싫었다. 주말 점심시간에 그런 곳에 가는 것은 내 성격에 전혀 맞지 않는다. 한참을 생각하다 내가 해주겠노라고 말했다.


집에는 언제 산지 모르는 냉동된 멸치 칼국수밀키트가 있었고 꽁꽁 얼은 가리비도 있었다.  커다란 그릇에 물을 끓이고 냉동멸치육수를 넣었다. 그리고 냉동된 가리비를 전부 집어넣었다. 가리비 껍데기가 막 벌어지기 시작할 때 마늘, 호박이랑 감자, 그리고 칼국수를 넣었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팔팔 끓고 나서 먹어보니 다행히 간이 맞는다. 가리비를 일일이 껍질을 벗겨내고 알맹이만 남겨 칼국수와 같이 그릇에 담는다. 집에는 그 사람의 어머니가 한 맛있는 섞박지가 있다. 시원한 섞박지를 꺼내어 놓은 테이블에 칼국수 두 그릇을 올려놓는다.


"오, 그럴듯한데?" 하면서 먹기 시작한다.


나도 그제야 한 젓가락 먹어보니 그럴듯하게 양념이 배어있고 국물에서는 해물향이 진하게 나고 있다.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사람을 보니 피식 웃음이 났다. 거실 창밖을 보니 쨍쨍한 햇빛이 내리쬐고 있는 아파트 단지들이 보였다. 바다는 없지만 사랑하는 사람과 같이 먹는 칼국수는 맛이 좋다. 특히나 내가 한 음식을 맛있게 먹어준다면 더할 나위 없다. 그때 그 사람이 한마디 한다.


"역시 나가서 먹을 걸 그랬네 가리비가 냉동이라 싱싱한 느낌이 없어."


그럴 걸 그랬나 하는 생각이 든다. 나도 바다가 보고 싶었는데. 저 멀리 끝이 보이지 않는 바다라면 내 생각의 배들이 이곳저곳 부딪치지 않고 평화롭게 떠 다닐 수 있을 텐데. 집안에 있는 나의 바다에서는 너무 쉽게 배들끼리 부딪쳐서 파열음이 난다. 작은 바람만 불어도 주체할 수가 없다


"맛있기만 한데 뭘"


자신감 없는 한소리를 하고 치울 준비를 한다. 그 사람은 다 먹은 그릇을 싱크대에 넣고 소파로 가서 티비를 켠다. 나는 나머지 그릇들을 싱크대로 가지고 와서 설거지를 시작한다. 나갈걸 그랬나 하는 생각에 그 사람 얼굴을 다시 한번 쳐다본다. 티비를 보며 웃는 그 사람의 표정에서 나의 근심을 읽을 수가 없다. 내 머릿속의 바다가 휘몰아치며 나를 이리저리 끌고 다닌다. 바닷가에 부딪친 나는 산산이 부서져서 좋아하고, 무관심하고, 원망하고, 신경질 내는 수없이 많은 나로 분열한다. 흐르는 물을 보며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해 깊은숨을 내쉰다.


빨리 잔잔해져라, 나의 바다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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