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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Oct 01. 2023

스파게티는 2인분부터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스물두 번째

기대는 생활의 많은 부분을 바꾼다. 기대가 있는 삶은 실패했을 때 상처가 크다. 그래서 아무 기대 없이 살려고 노력하지만 마음은 여전히 불확실한 기대를 받아들인다. 요즘 누군가 조금씩 내 틈을 비집고 들어오는 느낌을 받고 있어 억지로 닫으려 하고 있다. 하지만 돌아서면 살포시 열려 두근거리고 있는 내 심장을 발견한다.


하루종일 집에 있자니 기대와 포기가 심장박동에 맞추어 커졌다 작아졌다 하고 있다.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 여지없이 부정의 마음이 차곡차곡 쌓여간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 뭔가 요리할 게 없나 찬장을 계속 찾아봤는데 유통기간이 1년이 지난 스파게티 면이 있었다. 뜯어진 포장비닐에 반쯤 남아 서랍은 한쪽 모퉁이에 딱 붙어 있었다. 스파게티 면은 건조하게 보관하면 몇 년을 보관해도 괜찮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난 무언가 오래 보관된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머릿속에 착! 하고 달라붙는 것 같다. 스파게티 면을 꺼내어 이곳저곳 살펴보았는데 곰팡이도 없고 멀끔하다. 소스가 같이 있을까 해서 찾아보았는데 아무리 찾아도 소스는 나오지 않았다. 대체 이 면은 언제 해 먹고 여기에 들어있었던 걸까. 더 이상 다른 생각이 머릿속에 스며들게 하기 싫었던 나는 간단하게 옷을 입고 모자를 푹 눌러쓰고 집 근처 편의점으로 갔다.


스파게티를 처음 먹어본 건 20대 중반이었던 것 같다. 미국의 유명 피자 체인이 유행하기 시작했을 때 피자가게에서 미트 토마토 스파게티를 팔았다. 치즈를 얻은 스파게티를 은박용지에 담아 오븐에 구워내어 주었다. 위에는 쫄깃한 치즈가 살짝 탄 듯이 올려져 있고 아래에는 미트볼 소스와 스파게티 면이 있었다. 포크로 치즈를 푹 찍으면 치즈와 토마토소스가 잔뜩 묻은 면이 딸려 올라왔다.


"숟가락 위에 올려서 돌돌 말아서 한 입에 먹어봐"


그날 피자가게 방문을 주도했던 친구는 뭔가 대단한 걸 아는냥 내게 이야기했다. 피자도 스파게티도 낯설어서 응응하면서 시키는 대로 해서 먹어보았다. 치즈의 고소함과 토마토의 맛이 입안에 확 퍼졌다. 살면서 그동안 먹었던 라면이나 중국면요리와도 너무나 다른 맛이어서 맛이 있다 없다 얘기하기도 어려웠다. 그런데 그 맛이 좋았는지 한동안 피자를 먹을 때면 토마토 스파게티를 꼭 같이 주문해서 먹곤 했다.


지금은 수많은 진짜 스파게티들이 주변에 있다. 스파게티가 요리 이름이 아니라 면의 종류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사실은 파스타가 요리 전체의 이름이고 그 아래로 수많은 다른 다양한 요리들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알리올리오, 봉골래, 까르보 나라 등등 수없이 많은 파스타들이 나타났다. 어느 순간 토마토소스 스파게티는 아무도 주문하지 않았고 누구도 그걸 파스타라 생각하지 않게 된 듯 메뉴에서 점점 사라져 갔다.


다양한 파스타를 먹어보았지만 난 토마토소스를 기반으로 하는 미트볼 스파게티를 아직도 좋아한다. 불에 익힌 토마토소스는 속이 편하고 미트볼은 면만 먹었을 때 부족한 포만감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점점 식당 메뉴에서 사라져 가고 있다. 난 정말 단순한 미트볼 스파게티를 원하는 것뿐인데 어느덧 그걸 하는 파스타집이 남아 있지 않게 되었다. 미국 출장 갈 때마다 미트볼스파게티를 시켜 먹곤 했지만 산더미 같은 양에 비해 소스는 부족하고 면이 너무 많아 먹기가 힘들었다. 내가 좋아하는 미트볼 스파게티는 한국식 스파게티였던 것 같다.


편의점에 갔는데 다행히 유리병에 든 스파게티 소스를 찾을 수 있었다. 4인용이라 좀 남겠는데 하며 생각했지만 남은 건 밥에 비벼 먹어도 되지 하며 고민을 밀어버렸다. 그리고 레토르트식품코너를 지나가는데 3분 미트볼을 발견했다. 순간 이거다 싶었다. 이게 있으면 미트볼 스파게티를 만들 수 있다. 토마토소스 한 병과 3분 미트볼 하나씩 양손에 쥐고 편의점을 나왔다. 오랜만에 신바람이 낫다.


집으로 돌아와 얼른 물을 가스레인지에 올려놓았다. 굵은소금 한 수저 정도를 넣고 끓기를 기다렸다가 물이 끓기 시작했을 때 스파게티면을 넣고 8분을 더 끓였다. 다 익었을 때 면수를 조금 덜어내고 면을 꺼내어 소쿠리에 담아 물을 뺐다. 프라이팬을 데운 후 올리브유를 조금 뿌리고 토마토소스를 반정도 부어 볶아주기 시작했다. 미트볼과 스파게티를 넣고 한참을 더 볶은 후 면수를 조금 넣어 자작하게 졸였다.


접시에 예쁘게 담아 테이블로 가져갔다. 피클을 사 오는 걸 깜빡했다. 급하면 디테일이 약해진다. 포크로 면을 떠서 숟가락 위에 돌돌 말았다. 한입 먹자 내가 아는 바로 그 미트볼 소스 스파게티였다. 이걸 먹고 싶어서 그 많은 식당을 찾아다녔는데 이렇게 집에서 쉽게 만들 수 있다니. 왜 식당에서 안 파는지 알 것 같았다. 굳이 식당에서 만원 이상 주고 사 먹는 요리가 아닌 것이다. 혼자 오물오물 천천히 배부를 때까지 스파게티를 먹었다. 미트볼도 토마토소스가 잘 배어들어 퍽퍽하지 않고 맛있었다.


프라이팬에 스파게티가 지금까지 먹은 양만큼이나 남아 있었다. 남는 게 아까워서 조금 더 떠다 먹었는데도 좀처럼 줄지 않았다. 습관처럼 2인분을 해버렸다. 누군가와 있었던 시간보다 혼자 있던 시간이 훨씬 더 많아졌는데도 왜 아직도 2인분일까. 습관이라기보다는 기대일 테지만 말이다. 어쨌든 오늘도 양 조절에 실패했다. 스파게티 냄새를 빼려고 창을 열었는데 밤공기가 차가워 금방 닫아야 했다.


'아직은 춥구나'


열린 창문으로 들어온 찬 공기는 금세 사라지고 혼자 먹은 스파게티의 무거운 냄새가 부엌에 가득했다. 남은 스파게티를 버리고 설거지를 끝내고 나니 심장박동은 천천히 제자리로 돌아왔다. 불도 켜지 않은 어두운 식탁에 앉아 창밖을 바라보니 어두워진 집들에 하나둘씩 불이 들어오고 있었다.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릴 정도로 불빛은 가까워 보이지만 어느 것도 내게 다가오지 않는다. 나는 혼자다. 그걸 잊으면 스파게티는 계속 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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