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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Feb 25. 2024

돌아오지 않는 간장계란밥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예순한 번째

이제는 약에 취해 아침에 일어나는 일들이 많이 줄어들었다. 약에 취한 것과 잠에 취한 것은 겉모습이 비슷하지만 전자는 내 의지로 극복이 안되고 약효가 떨어질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 잠이 오지 않으면 복용량보다 많이 먹는 날도 있었는데 그런 날 아침이면 몸이 허공을 떠다니는 듯했다. 약을 먹으나, 먹지 않으나 잠이 오지 않으니 먹지 말아야겠다고 생각한 지도 십여 일이 지났다.


새벽같이 일어나서 회사에 가야 하는 평일 아침엔 여전히 머리가 멍하지만 조금 여유가 있는 주말 아침에는 이것저것 챙겨 먹을 정도로 아침이 맑아졌다.


평일에는 커피만 안 마시는 정도에서 아침을 마무리하지만 주말이나 쉬는 날에는 아침을 챙겨 먹으려고 하고 있다. 빵이나 과자 등이 대부분이지만 어쩐지 오늘따라 간장 계란밥이 먹고 싶었다.


다들 알다시피 간장계란밥은 하얀 쌀밥에 노른자가 익히지 않게 후라이된 계란을 올린 후 간장을 조금 부어 비벼 먹는 것이다. 간장은 주로 맛간장을 이용하지만 없으면 양조간장을 넣어도 상관없다. 요즘은 간장계란밥용 간장이 따로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먹어본 적이 없어 어떤 차이인지는 모르겠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계란은 많은데 간장은 양조간장밖에 없었다. 한참을 고민하다 그냥 사과로만 아침을 먹었다. 역시 간장계란밥은 맛간장이 있어야 할 것 같았다. 아침과 점심을 대충 먹고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일을 하고 있는데 밖에 비가 갑자기 쏟아졌다. 우레와 같은 소리와 함께 빗줄기가 쏟아져 내려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았다. 조그맣게 열린 창문틈으로 비가 쏟아져 들어와 난 급히 창문을 닫았다.


그리고 역시 맛간장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우산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비에 젖을까 봐 반바지에 슬리퍼를 신고 나왔지만 심한 바람으로 우산이 소용없었다. 5분 거리의 작은 마트에 도착했을 때는 머리부터 발끝까지 안 젖은 곳이 없었다. 마트를 돌아봤지만 맛간장은 없고 오히려 간장계란밥용 간장이 있었다. 박카스만 한 조그만 용기에 담긴 계란밥용 간장은 무려 만원이 넘었다.


밖에는 아직도 비바람이 휘몰아치고 있었고 비에 젖은 게 아까운 나는 빈손으로 돌아갈 수 없었다. 비싼 계란밥용 간장을 사서 집으로 돌아왔다. 집문을 열고 들어오자마자 비가 멈추고 하늘이 개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에 간장을 올려놓고 난 옷을 갈아입고 나와 다시 일을 시작했다.


밤 9시가 넘자 조금 배가 고파지기 시작했다. 냉동실에 얼려두었던 밥 한 개를 꺼내서 전자레인지에 해동하고 계란 한 개를 꺼내 후라이를 만들었다. 하얀 도자기 밥그릇에 밥을 넣고 그 위에 후라이를 올린 후 간장을 그 주변으로 뿌려 주었다. 참기름도 조금 넣었더니 그 향기가 온 집안에 펴져나갔다.


기대에 찬 나는 쓱쓱 밥을 비벼서 한입 떠먹었다. 입안에 간장과 참기름의 향이 한가득 퍼져나갔다. 하지만 아무 맛도 나지 않았다. 뭔가 잘못된가 싶어 간장을 조금 더 넣어 비벼먹었지만 내가 아는 맛으로 돌아오지 않았다.


"간장을 그렇게 많이 넣으니까 짜지"


뒤에서 아는 목소리가 들려와서 돌아보았지만 누가 있을 리가 없다.


같이 있는 아침마다 식사 당번을 번갈아 하던 우리는 한 달 만에 모든 아침이 지겨워져 버렸다. 하지만 간장계란밥은 생각보다 질리지 않아 그 사람이 당번이던 날은 아침에 간장계란밥을 먹곤 했다. 버터를 넣기도 하고 참기름, 들기름을 넣기도 했다. 온 집안에 계란후라이를 만드는 고소한 기름 냄새가 피어오르면 오늘도 간장계란밥을 먹겠구나 생각하며 이불을 개었다. 그때 먹었던 간장계란밥의 맛이 어땠었지는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하지만 지금 먹고 있는 이 맛은 분명 아니었다.


비가 폭포처럼 오는 날,  나에게 지겹다고 조용히 말하고 떠난 그 사람은 다시는 돌아오지 않았다. 며칠 전이었나 몇 주 전이었나 하고 생각하고 있는 동안 계란밥은 차갑게 식어 이상한 비린내를 풍기고 있었다.


돌아오지 않아도 돼, 잊으면 되니까. 그렇게 생각하고 계란밥을 싱크대에 부어버렸다. 냄새가 사라지지 않고

계속 내 주변을 맴돌았다. 빨리 사라져 주었으면 하고 창문을 열러 가는데 발 없는 귀신같이 비치는 내 모습에 소스라치게 놀라 주저앉아버렸다.


머지않아 너의 눈물이 이 집을 가득 채우게 될 거라고 누군가 내 귀에 속삭였다. 소름 끼치는 목소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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