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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Feb 28. 2024

천둥벌거숭이 꼬막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예순두 번째

며칠 만에 연락이 온 그 사람과 해산물 식당에 갔다. 할 말이 있다고 했다. 커피숍 같은 곳도 괜찮을 텐데 굳이 해산물 식당이라니 이상한 기대가 조금은 들었다.  


해산물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지만 많이 먹지는 못하는 나는 누군가와 오는 경우가 아니면 이런 식당에 잘 오지 않는다.


하얀색 간판에 파랗게 식당이름이 적혀있는 입구를 지나 들어가자 깔끔하게 만들어진 인테리어가 일반 횟집과는 조금 달라 보였다. 전체적인 느낌은 횟집이나 해산물식당임을 알려 주지만 일반적인 그런 식당과는 괘를 달리 한다고나 할까? 그래서 그런지 손님들도 대부분 젊은 사람들이었고 빈자리 없이 손님이 가득했다.


내가 아는 횟집이라면 테이블 위에 하얀색 종이가 깔려 있고 그 위에 수저통, 초장, 간장 용기가 놓여 있는 그런 곳이라 점심부터 횟집에 가자고 했을 때 의아해 했던 내가 그냥 늙은이임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 사람은 능숙하게 메뉴판을 받아 살펴보기 시작했다. 자기가 맛있는 것을 알아서 시키겠다고 하여 그러라고 했다. 어차피 나는 처음 오는 식당인데 내가 골라봐야 좋지는 않을 것이다. 그 사람은 항상 맛있는 걸 먹고 오면 나를 데리고 다시 그곳에 가곤 했었다. 언제나처럼 기대에 벅찬 그의 얼굴을 보며 첫술을 뜨지만 대부분 나의 입맛에는 잘 맞지 않았다. 표정을 감추려고 부단히 노렸했음에도 요즘은 감추어지지 않는지 그의 기대에 찬 얼굴을 본게 언제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메뉴를 시킨 후 한동안 핸드폰을 하던 그 사람은 주문한 음식이 나오자 방긋 웃으며 음식이 놓일 수 있게 컵이나 핸드폰을 정리했다. 그 방긋 웃는 웃음이 최근들어 나를 향했던 적이 없었음이 기억나서 잠시 가슴이 칼로 베인 듯 아파왔다.


내 앞에는 꼬막무침이 얇게, 하지만 조금 많은 양으로 펼쳐져 있는 접시가 큰 밥사발 위에 올려져 내어 졌다. 그리고 그 사람과 나 사이에는 물회가 가득 담긴 항아리가 놓였다. 내가 회를 잘 먹지 못함을 알고 있지만 그 사람은 회를 좋아한다. 많이 먹지 못하는 나의 취향은 크게 상관이 없다.


그 사람은 접시에 있는 꼬막무침을 사발에 쏟아내서 숟가락으로 비비기 시작했다. 나도 따라서 접시에 있는 꼬막을 밥사발에 얻어서 비비기 시작했다. 참기름 냄새, 간장냄새, 약간의 비린내가 흘러 들어왔다. 어렸을 때 꼬막을 많이 먹기는 했지만 비빔밥으로 먹은 적은 없었는데.


어머니가 시장에서 한소쿠리 사가지고 온 꼬막을 둘이서 숟가락으로 하루종일 껍질을 따서 손진하던 생각이 났다. 꼬막을 해감하고 깨끗이 씻고 살짝 데쳐서 소쿠리 가득 들고 나오시면 둘이서 숟가락을 들고 꼬막의 뒷부분을 벌려서 껍데기 하나를 떼어냈다. 그리고 남은 껍데기에는 꼬막살이 올려있고 그걸 쟁반에 차곡차곡 쌓았다. 처음에는 쉽게 딸 수 있지만 많아질수록 손가락이 아파 깔 수가 없다. 하루종일 꼬막을 까는 날이면 어김없이 꼬막에 양념장이 얹어진 꼬막무침이 나왔다. 아버지는 그걸 참 좋아했다. 몇십 개나 계속 드셨다. 손가락으로 꼬막껍데기를 들고 입으로 후루룩 마시듯이. 그 시절에는 일반 식당에서도 반찬으로 꼬막무침이 자주 나왔다. 신선하면 맛있지만 어쩔 때는 먹고 탈이날때도 있었다. 너무 흔해 일상인 음식이었다. 한쪽이 남아있는 껍데기 위에 올려 있는 꼬막무침. 그러다 언제부터인가 꼬막무침을 볼 수 없게 되었는데 이렇게 다시 이상한 모습으로 만났다.


손질된 알맹이가 수십 개가 들어있는 꼬막무침을 밥과 비비 먹고 있으니 왠지 꼬막이 아닌 것 같았다. 다 비빈 후에 한 입 먹어보니 꼬막무침과 밥을 같이 먹는 맛이 났다. 그때는 껍데기를 들고 한 개씩 호로록 먹었는데 몇 십개의 꼬막을 밥이랑 같이 먹으니 노력 없이 사치를 한 것 같아 왠지 행복한 죄책감이 들었다. 한두수저 먹으면서 주변을 보니 대부분 우리와 같은 메뉴를 시킨 것 같다. 음식이 나오면 다들 사진을 찍고 좋아하고 행복해했다.


음식을 맛있게 먹고 있는 그 사람을 보니 내가 벌겨 벗겨져서 그 자리에 앉아 있는 느낌이 들었다. 잘 먹으라는 이야기도, 웃으며 찍는 사진도, 날 보는 웃음도 없이 난 그 자리에 앉아 있다. 갑자기 날 보며 싱긋 웃었지만 곧이어 항아리에서 물회를 떠서 자기 앞접시에 놓았다. 내가 했어야 하는 건가 하는 생각도 잠시, 안절부절못하다가 아무것도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았다.


"벌써 다 먹었어요? 더 먹어요 "


아니요. 이제 배불러요. 말하고 싶었지만 그냥 빙그레 웃고 말았다. 누군가를 좋아하고 필요로 하면 항상 난 을이된다. 반쪽이라도 있었던 껍데기가 없어진 꼬막처럼 난 벌겨벗겨져서 심판을 기다리는 처지가 된다. 마음의 단단한 껍데기가 필요하다. 무슨 얘기를 할지 이미 알고 있다. 혹시나 하는 마음은 점점 사라져 간다. 하지만 괜찮다. 괜찮아. 난 언제나처럼 내일 아침에 다시 눈을 뜨고 일어날 것이니까. 오늘은 이 정도라도 괜찮다. 이 정도에서만 끝나도 더할 나위 없이 좋은 하루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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