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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Mar 03. 2024

찰옥수수의 마지막 한 줄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예순세 번째

아침에 일찍 일어나면 좋은 점 중 하나는 시간이 정말 많아진다는 것이다. 평소에 바빠서 못하는 일이나 시간효율상 뒤로 밀어 놓았단 일을 기분 좋게 할 수 있다. 특히나 주말에 일찍 일어나면서 삶의 질이 많이 좋아졌음을 느낀다. 일찍 일어나서 간단히 산책을 하고 아침을 차려먹으면 어렸을 때 꿈꾸던 어른이 된 듯한 느낌이 든다. 어른이란 게 그렇게 간단한 건 아니었지만 나이 들고 보니 단순한 게 정말 어렵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오늘도 아침 산책을 하고 나서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며 냉장고 문을 열었지만 계란 외에는 딱히 먹을 게 없다. 냉동실에 빵이라도 있을 것 같아 냉동실을 뒤지기 시작했다. 평상시 빵을 사면 한 번에 다 못 먹는 경우가 많아 반을 잘라서 냉동실에 넣고 얼리곤 했다. 그래서 어딘가에 빵이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아무리 찾아보아도 없는 것이었다. 냉장고의 가장 아래칸까지 찾아보았지만 빵 반조각도 찾지 못했다. 다만 냉동실 문에 무언가 잔뜩 들어있는 검정 봉지를 발견했다. 나는 투명한 비닐이나 지퍼백을 이용하기 때문에 검정색 비닐봉지가 냉장고에 있는 경우는 드물다.


무엇인가 싶어 테이블 위로 봉지를 가지고 왔다. 봉지를 풀어보려고 했지만 너무나 꽉 묶여있는 데다가 물기가 얼어붙어 있어 풀리지가 않았다. 어차피 제대로 된 게 들어있을 리 없다는 생각이 들어 가위로 봉투 윗부분을 잘라버렸다.


봉투 안에는 옥수수가 들어있었다. 한 개씩 소분되어 있었지만 좀 크다 싶은 것은 반개 혹은 3분 2개 정도씩 소분되어 내가 한 번에 먹을 만큼씩 소분되어 있었다. 갈색알갱이가 드문드문 박혀있는 것으로 보아 찰옥수수 같다.


한때 옥수수에 빠져 있었던 적이 있었다. 아파트 공동구매로 옥수수를 한 박스를 사게 된 옆집에서 너무 많이 삶았다며 나누어 주었다. 퇴근을 했는데 포스트잇에 적힌 글과 문고리에 걸린 비닐봉지를 받아 들고 한 번도 인사한 적이 없는 옆집 사람에게 인사를 할까 한참을 고민했지만 결국 하지 못했다. 안으로 들어와서 따끈따끈한 옥수수를 꺼냈는데 샛노란 알갱이가 너무나도 깔끔하게 붙어있는 것이 만화로 그린 것 같은 모양새였다. 내가 기억하는 옥수수는 갈색알갱이도 있고 알갱이 크기도 고르지 않기 일쑤였는데 이 옥수수는 너무도 깔끔하게 옥수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사료용으로 쓰는 옥수수가 그렇다던데 맛없겠군 하면서 먹기 시작했다. 탱탱한 옥수수 알갱이에서 고급스러운 단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세상에 그렇게 맛있는 옥수수는 처음 먹어보았다. 나중에 엘리베이터의 공구 게시판에서 봐서 알게 되었지만 바로 초당옥수수라는 것이었다.


한동안 초당옥수수 철이면 난 반박스정도를 사다가 삶아 먹었다. 혼자서 너무 많이 사는 바람에 냉동실에 얼려놓고 먹고 싶을 때마다 꺼내 먹었다. 내가 그렇게 오물거리면서 먹으면 그 사람은 마치 다람쥐 같다고 놀리곤 했다. 그리고 자기는 찰옥수수가 더 맛있다고 자기가 정말 맛있는 걸 사다 주겠노라 호언장담했지만 난 점점 옥수수에 관심을 잃어갔다.


그래 기억이 났다. 한동안 연락이 없던 어느 날 그 사람이 이 비닐봉지를 가지고 왔었다. 나는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렸지만 죽을 듯이 차갑게 왜 왔냐고 빈정거렸다. 그 사람은 살짝 찡그려 웃는 듯 우는 듯한 얼굴로 진짜 맛있는 옥수수라고 하며 나중에 먹어보라고 하며 냉동실에 봉지를 집어넣었다. 그러고는 갈께라고 이야기하고 나갔다.


가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제발 내 옆에 있어달라고 빌고 매달리고 싶었다. 하지만 이젠 사랑이 아니라고 나는 믿었다. 그 사람의 호의를 구차하게 내가 의지하는 것뿐이라고. 먼저 떠난 주제에 가끔 다시 찾아오던 그 사람을 그렇게 몇 번을 떠난 보낸 끝에 난 다시 혼자가 되었다.


봉지 안에는 딱딱하게 구겨져 얼은 그 사람의 쪽지가 있었다.


'봉지를 조금 뜯고  전자레인지에 5분'


한 줄로 된 그 사람의 마지막 편지.


소분된 옥수수 하나를 꺼내 봉지에 구멍을 조그맣게 뚫고 전자레인지에 5분을 돌렸다. 엄청나게 뜨거운 김이 전자레인지에 가득했다. 한참을 기다렸다가 집게로 꺼내서 접시 위에 올려놓고 비닐봉지를 벗겨내었다.


뭐가 잘못되었는지 옥수수는 딱딱해져 버렸다. 겨우 뜯어낸 알갱이는 아무 맛도 느껴지지 않았다. 이제는 물어볼 수도 없으니 옥수수가 맛있었는지 아닌지 알 방법이 없다. 지나고 나면 알 방법이 없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그때 왜 물어보지 않았을까. 그게 정말이냐고. 당신 말이 다 맞냐고. 날 사랑하냐고. 그렇게 물어보았으면 뭐가 달라졌을까? 이미 딱딱해진 옥수수는 살아나지 않는다. 달라질 게 없다. 아무것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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