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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Nov 19. 2023

샤부샤부의 속도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서른세 번째

무슨 용기로 아침에 먹는 약을 끊을 생각을 했을까? 의사 선생님은 천천히 줄여나가는 게 맞다고 했지만 이제는 아침약 정도는 끊어야겠다고 호기롭게 결심했었다. 하지만 자신감과는 달리 가슴 두근거림이 멈추지 않고 가끔 호흡이 곤란해져서 크게 숨을 들이쉬기도 한다. 내 영혼은 펄펄 끓는 탕 속에 빠진 야채처럼 금방 생기를 잃고 쪼그라진다. 약을 끊은 지 벌써 이주가 넘었는데도 전혀 적응이 되지 않고 있다. 천천히 끓어오르는 불안의 탕속에서 생기를 잃어가는 나의 마음들. 이참에 샤부샤부라도 먹으러 가야 할까?


그에게 저녁에 샤부샤부 어떠냐고 메시지를 보냈지만 답장이 없다. 오전부터 바쁜지 얼굴을 보기 힘들다. 혼자라도 가야겠다고 생각해서 1인 샤부샤부집을 찾아보았는데 대부분 마라탕집으로 바뀌고 회사 근처엔 딱 1군데가 남아 있었다. 1인 샤부샤부라니 세상은 좋아지는 것 같기도 하고 슬퍼지는 것 같기도 하고 알 수가 없다.


20세기말, 서울에 올라온 지 얼마 안 되었을 때 아는 선배들이 저녁을 먹자고 하여 같이 대학로에 갔었다. 돈은 없고 시간은 많던 그때는 누군가 사주는 저녁은 언제나 최고였다. 술만 마시지 않는다면 대체로 그랬다. 선배들과 같이 간 곳은 대학로 뒤쪽 골목에 있는 샤부샤부집이었다. 한옥을 식당으로 바꾼 곳으로 겉보기에는 상당히 비싸 보였다. 그전까지 샤부샤부를 먹어본 적 없던 나는 두근거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구석자리에 앉아 있었다. 저녁에 앉기만 하면 술부터 시키는 선배들답지 않게 오늘은 아무도 술을 먹지 않고 음식이 나오길 기다렸다. 조금 기다리자 보리차색깔의 육수가 담긴 커다란 솥이 식탁 중앙 화구에 올려졌다. 그리고 갖가지 야채와 고기들이 접시에 담아서 나왔다. 사장님이 오더니 선배들에게 샤부샤부 먹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이제 다른 것은 잘 기억나지 않는데 한 가지는 여전히 기억난다. 샤부샤부는 전골이나 탕이 아니니 재료를 넣고 끓여 먹으면 안 되고 육수가 끓으면 자기가 먹고 싶은 재료를 살짝 데치듯이 넣었다 꺼내서 먹으라고 했다. 야채부터 해산물, 고기순으로 먹어야 하며 반드시 하나씩 데쳐서 먹으라고 신신당부했을뿐더러 성질 급한 선배가 두세 개를 넣으면 득달같이 달려와서 그렇게 먹으면 안 된다고 일장설을 늘어놓았다.


난 한 번에 하나씩 먹는 샤부샤부의 속도가 너무 좋았다. 내 것만 젓가락으로 잡고 살짝 데친후 꺼내서 먹는다. 야채도 해물도 고기도 다들 하나씩 먹을 수밖에 없고 그 느린 속도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거의 한 시간에 걸쳐 조금씩 졸아들면서 감칠맛이 더해진 육수에 칼국수를 넣고 먹었는데 세상 어떤 칼국수보다 맛이 있었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칼국수를 다 먹으니 밥을 가져다가 죽을 만들어 주었다. 사장님은 국자로 밥알을 하나씩 으깨면서 죽을 만들었다. 밥알이 다 으깨져서 정말 죽처럼 되었을 때야 우리는 사장님의 허락을 받고 죽을 먹을 수 있었다. 그 죽의 풍미가 잊히지 않는다.


그날 이후 난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면 그 가게에 갔다. 갈 때마다 사장님은 훈계에 가까운 먹는 방법을 설명했고 내 동행들은 좋아하기도 하고 불편해하기도 했다. 나는 샤부샤부는 원래 이렇게 먹는 거라고 얘기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지만 그 긴 시간과 지루함에 점점 불편해하는 사람들이 더 늘어났다. 결국 어느 시점인가부터는 사람들과 샤부샤부집에 갈일이 생겼을 때 다른 유명한 체인점들을 가게 되었다. 샤부샤부 체인점들도 똑같이 육수에 야채와 해물, 고기를 넣고 먹지만 얼마든지 같이 넣어먹어도 되고 다 먹고 나면 칼국수와 죽을 만들어 주었다. 죽이라기보다는 국물에 만 밥에 가까웠지만 맛은 비슷했다. 언제부터인지 사람들은 샤부샤부가 나오면 모든 재료를 다 같이 넣고 끓여서 먹기 시작했고 가게들도 기본적인 것들은 아예 탕 속에 넣고 내어주었다. 샤부샤부가 전골이나 나베와 다를 바가 없어졌다. 아쉬웠지만 나와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들은 더 이상 내 주변에 없었고 대학로의 그 가게는 언제 없어졌는지 사라져서 다시는 찾을 수가 없었다.


점심 늦게 바테이블에 홀로 앉아 끓고 있는 샤부샤부를 보고 있으니 모처럼 그 여유로움이 생각났다. 혼자 야채를 하나씩 넣어서 데쳐먹고 해산물, 고기를 넣어서 먹었다. 젊은 사장이 흘깃 쳐다보는 것 같지만 늦은 점심인지라 손님이 많이 없어 눈치가 보이지 않았다. 옆자리에 앉은 커플들은 모든 재료를 넣고 보글보글 끓이고 있었다.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끝없이 웃고 떠들고 서로를 쓰다듬었다. 하지만 나의 세상은 아니다. 야채도 먹는 순서가 있었던 같은데 기억이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게 무슨 상관일까. 모처럼 나의 속도를 찾은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모든 것이 느려지고 가슴의 두근거림도 잦아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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