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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Dec 24. 2023

크리스마스의 딸기케이크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마흔세 번째

특별히 화가 나거나 슬픈 것은 아니다. 더 이루고 싶은 것이나 원하는 것이 없어 허전할 뿐이다. 오늘 하루가 그렇게 힘든 것은 아니지만 미래는 까마득하게 멀어 영원히 다가오지 않을 것 같다. 그렇기에 하루에도 수십수백 번을 지나온 내 인생에 대해 후회하며 시간을 보낸다. 그러다 서서히 물속으로 가라앉는다. 무엇이 의미가 있을까. 아무것도 의미를 가지지 못한다. 슬프지도 기쁘지도 않으며 그저 조용히 가라앉고 싶다. 다시는 수면으로 떠오르지 않아 모두에게서 깨끗이 잊혀지고 싶다. 슬픈 기억도 기쁜 추억도 아무 의미 없이 가볍게 물방울처럼 사라져 버린다. 이제 흔적 없이 사라질 수 있을 거란 생각이 든다. 그 생각은 결코 슬픔이나 좌절은 아니고 평온함에 다가가는 일이라는 생각이 든다


이것은 우울증이다. 수면 아래로 계속해서 빠져들 때 그 고요한 기분을 너무도 사랑했다. 그래서 하루종일 그 속에서 나오지 않았다. 이런 것이 결국 병이었음을 알게 되었고 병원에 가고 상담을 받고 약을 먹었다. 일부 약을 끊어버린 나는 오늘도 수면 아래로 편안히 잠들어가는 나 자신을 알아 차리고는 내 인생에서 가장 큰 힘을 모아서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아무것도 하지 말고 다시 누워있으라는 하늘과 바다와 온 세상의 의견을 떨쳐내고 백억 톤 갑옷같은 내 옷을 입고 신발을 신고 밖으로 뛰쳐 나왔다.


서늘한 공기마저 나를 옥죄어 발걸음을 막았지만 분연히 한 걸음씩 겨우 발을 떼서 현관문 밖으로 나와 길을 따라 걸었다. 그리곤 가장 가까이 있는 빵집에 들어갔다. 눈이 부시도록 하얀 조명이 들어있는 진열장안에 케이크가 가득 전시되어 있었다. 비틀거리며 진열대 앞으로 가서 한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찾으시는 거 있느냐는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다른 세상에서 들려오는 소리같이 아주 멀리서 전달되었다.


"딸기 케이크 사려고요"


검은색 원형 케이크 위에 딸기가 빼곡히 올려져 있었고 케이크의 빵과 빵사이에도 딸기가 가득 박혀 있었다. 아르바이트생은 요즘 인기가 정말 많은 딸기 케이크라고 하며 케이크를 꺼내면서 초를 몇 개나 필요 하냐고 물었다. 산발한 머리, 초겨울에 맨발에 슬리퍼, 잠옷 위에 걸쳐 입은 한벌의 겉 옷. 조금씩 나는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의식적으로 나를 바라보지 않으려 애쓰면서 아르바이트생은 친절한 목소리로 내게 다시 물었다. 이제는 바로 옆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들려왔다.


"한 개.. 큰 걸로 한 개 주세요"


능숙하게 포장을 하고 초와 작은 폭죽 한 개를 포장에 부착하더니 내게 전달해 주었다. 순간 아무것도 가지고 나오지 않았음을 알았다. 현금도 지갑도 핸드폰도. 계산대 앞에서 한참을 주섬주섬하다가 결국 돈을 안 가지고 왔음을, 당신의 친절한 노력이 나의 실수로 무의미하게 되었음을 알려야 했다. 잘 열리지 않는 입을 열어 설명을 하고 다시 꼭 가지러 오겠다고 말하고 있는데 뒤에서 주인아주머니가 나오셨다. 나를 알아보시고 내게 가볍게 인사를 하고 아르바이트생에게 설명을 듣더니 괜찮다고 가져가시고 다음에 오실 때 가져 다 달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그러겠다고 약속을 하고 몇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과하고나서 한 손에 케이크상자를 들고 가게 밖으로 나왔다.


집에 와서 하늘이 꺼지고 온 세상이 검게 물들 때까지 테이블 위에 케이크상자를 올려놓고 앉아 있었다. 내 마음은 영원히 먼지처럼 사라지고 싶은 마음으로, 캄캄한 물밑에서 가만히 누워 있고 싶은 마음으로, 모두에게서 잊히고 싶은 마음으로 점점 내려앉았지만 아주 작은 불편함이 나를 다시 깨워서 현실로 돌려보냈다.


캄캄한 거실에서 상자를 열고 케이크를 꺼냈다. 초를 한 개 꽂아 불을 붙였다. 수면아래에서 수면 위를 보면 가끔 해가 보일 때가 있다. 뒤로 돌아서면 편안해지는 세상일 텐데 기어코 다시 빛을 쫓아 올라 오곤 했다. 초가 환하게 불타오른다. 검게 물든 물속 세상에서 단 하나의 빛이 환하게 타오른다. 영원히 가라앉고 싶었지만 아주머니에게 돈을 주러 가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도 알지 못하게 세상에서 사라질 수 없게 되었다. 친하지도 않고 가족도 아니며 좋아하지도 않는 그 누군가와 다시 돌아가겠다고 난 약속을 했다. 그 사소한 약속이 한밤중에 물속으로 푹 가라앉고 있는 내 머리채를 붙잡아 수면 위로 끌어 올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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