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면아래 Aug 04. 2023

부서지는 현재와 또렷해지는 과거

100개의 마음 조각

수면아래에 나의 몸이 가라앉아 있고 겨우 코만 물 위로 내밀고 숨을 쉬고 있는 날들이 지속되고 있어요. 약을 먹긴 하지만 불면증이 심한 날은 수면제를 먹고도 잠시 잠들었다가 금방 깨어나서 밤을 지새우곤 해요. 밤에 못 자니 낮에 컨디션이 엉망이 되고 우울해지죠. 죽고 싶었지만 죽고 싶지 않아 엉엉 운 적도 있고 괜찮다가도 갑자기 창문을 열고 뛰어내리고 싶어 진 적도 있어요.


이렇게 오랜 시간을 지나고 보니 나름대로의 요령이 생겼어요. 약도 안 듣는 불면증은 컨트롤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느껴졌어요. 대신 낮에 우울감을 최소화시키는데 더 노력을 기울이기로 했어요. 음식을 먹는 것은 인간의 가장 기초적인 행위라서 그 순간은 삶에 대해 긍정적인 마음이 생기기 쉽다는 것을 알게 되었죠. 하루에 다섯 끼 여섯 끼를 먹는 건 아니에요. 그냥 삼시 세끼를 먹을 때 좀 신경을 쓰는 것뿐이고 거창한 요리 같은 걸 찾는 건 아니에요. 때가 되면 무의식이 시키는 데로 별 고민 없이 직감으로 식당을 찾거나 요리를 해서 먹어요. 기대감은 모든 나쁜 생각의 토대가 되니 아무 생각 없이 음식을 선택하거나 남이 선택한 음식을 먹고 있어요.


모든 음식은 장점과 단점이 있죠. 100퍼센트 쓰레기는 찾아보기 힘들어요. 주문한 요리를 받아서 먹거나 스스로 요리한 음식을 차려놓고 먹으면서 칭찬할 부분을 찾고 머릿속으로 아 이 부분이 좋구나 하고 소리치면 돼요. 말로는 그렇지만 소리친 적은 없어요. 그래도 생각보다 긍정적인 느낌이 나요. 배달 음식도 나쁘지 않아요. 머릿속을 음식과 먹는 행위로 꽉 채워야 해요. 오물오물 식감과 맛을 느끼고 향기를 맡다 보면 머릿속은 요리로 꽉 차게 되죠. 다들 알다시피 우울은 빈 공간을 귀신같이 찾아 들어와요. 음식을 먹을 때만이라도 다른 생각을 안 하기로 마음먹으면 하루에 두세 번은 행복해져요. 아니 최소한 우울해지진 않아요. 정말 맛없는 음식이면 어떻게 하냐고? 실컷 욕하면 돼요. 물론 그런 적도 없어요. 욕하면 스트레스가 풀리긴 하겠죠. 뭔 짓을 하던 내 탓만 안 하면 된다고 생각해요.


그렇게 하루를 보내고 집에 와서 기억을 더듬어 글을 써요. 한 자 한 자 글자에 집중하면 밤은 금방 지나가요. 글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 중에 하나예요. 어렸을 때 나는 활자로 된 것들을 좋아했어요. 시집, 위인전, 과학전집, 추리 소설, 잡지 등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글자들을 읽었죠. 그 어느 곳보다 책방에 있을 때 기분이 가장 좋았어요. 좋아하는 책을 동네 책방에서 예약하고 매일 기다리며 책방을 들락날락거리던 그 시절. 책방과 책과 나의 어린 시절은 노란색으로 기억이 돼요. 엄밀히 말하자면 햇빛색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좋아한 글자들은, 이제 아무것도 공감이 가지 않는 나이가 되었음에도 여전히 내 옆에서 햇빛색으로 비치고 있어요.


오랜 시간을 좋아했음에도 한 번도 글쓰기를 하겠다고 마음먹지 않은 것이 이상해요. 영화를 좋아할 때는 시나리오 쓴다고 얼마나 많은 밤을 새웠나 몰라요. 영화일 하겠다고 무일푼으로 올라온 서울이었죠. 그리고 실패했음에도 아쉽지가 않았어요. 그런데 글쓰기는 왜 시작조차 하지 않았던 걸까요. 글이라는 것은 아마도 혼자 하는 첫사랑이었던 것 같아요. 너무 사랑해서 내가 상처받을까 봐 다가가지 못했던, 피해 가기만 했던 어떤 것. 들여다보면 나 자신을 볼까 봐 무서워서 보기를 피했던 것. 글쓰기는 나의 바보 같고 이상한 면들을 그대로 보여줄 것 같았어요. 이것마저 진지하게 들어갔다가 상처받으면 아무것도 안 남을 것 같았어요. 그런데  이제 와서 글쓰기를 하기로 한 것은 뭔가 거창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에요. 자꾸 현재는 희미해지고 과거는 또렸해지고 있어요. 내가 사랑했던 것 중에 이제 내 옆에 남아있은 것이 글뿐이고 글을 쓰면 마음이 차분해지기 때문이에요. 점점 뚜렷해지는 과거를 기록하면 희미해지는 현재가 거기에 닿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100일 동안 모으면 끝내 잠들 수 있을 거라고. 하지만 흐릿한 현재를 헤치고 누군가 다가왔어요. 그러자 삶에 시간이 돌아왔어요. 그리고 살고 싶어 졌어요. 분명 태어난 날보다 죽을 날이 가까워요. 그런데 이제야 살기로 결심했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