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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Mar 10. 2024

필요 없는 필요한 귤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예순 다섯번째

퇴근하고 집에 돌아왔는데 문고리에 검은색 비닐 봉지가 걸려 있었다. 한 번도 그런 적이 없길래 이게 무엇인가 한참을 고민하다 봉지를 열어 봤더니 귤이 10개 정도 들어 있었다 그리고 손으로 적은 것이 분명한 편지 한 장이 들어 있었다.


’ 시끄럽게 해 드려서 죄송합니다 앞으로 주의하도록 하겠습니다 ‘


아마도 시끄럽다고 관리실이나 어떤 곳에서 연락을 받은 위층에서 미안한 마음에 아래층인 나에게 귤을 준 것 같다. 그런데 나는 위층에 클레임을 한 적이 없다. 관리실에 연락한 적은 물론이고 쪽지를 보낸 적도 없고. 아마도 아래층 다른 어딘가에서 시끄럽다고 뭐라고 한 것 같은 데 바로 아래층인 나로 착각을 한 것 같다. 소음은 아래로만 가는 게 아닌데 말이다.


나는 소음에 굉장히 민감한 편이다. 그래서 위층에서 조금이라도 소리가 나거나 쿵쿵거리면 온 신경이 그쪽으로 집중이 돼서 다른 일을 못 한다. 그래서 평상시 집에 있을 때면 다른 것에 집중하기 위해 별로 좋아하지 않는 음악을 틀어놓거나 의미 없는 TV 예능을 켜놓고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귀마개를 하고 있곤한다. 특히나 잘 때는 귀마개를 하고 그 위로 노이즈캔슬링 헤드폰을 쓰고 자기도 한다.그렇게하면 물속처럼 고요해진다.


귤이 담긴 비닐봉지를 테이블 위에 올려놓고 씻고 나왔다. 귤을 하나 꺼내서 만져 보니 말랑말랑하니 촉감이 참 좋다. 혼자 살면 나를 위해 꼭 필요한 게 아니면 사지 않는다. 예를 들어 사과 같은 경우는 꼭 필요해서 사지만 귤 같은 경우는 없어도 그만이기 때문에 산 적이 없는 것이다.


정말 오랜만에 먹어보는 귤이다. 껍질을 까고 하얀색 귤락을 하나하나 걷어내고 먹어 보니 시큼 달콤 하니 이런 맛이었구나 하고 새삼 기억이 난다.


두 개째 까서 먹고 있으니 옛날 생각이 났다. 예전에 겨울이면 귤을 한 박스씩 사서 집에서 먹곤 했다. 유일하게 불을뗀 안방 온돌 아래에 깔려있는 이불속에 쏙 들어가서 머리와 팔만 내놓고 TV를 보면서 귤을 까먹곤 했다. 어머니는 누워서 먹지 말라고 항상 그랬지만 우리들은 누워서 TV를 보고, 만화책을 보고, 소설책을 읽으면서 귤을 까먹었다. 그러다 더 심심하면 귤껍질을 접어 꾹 짜서 상대편 얼굴에 터트리곤 했다. 눈에 들어가면 따갑고 벽에 묻으면 얼룩이 진다. 그런 장난을 쳐 본 지 얼마나 오래된 걸까? 지금 귤껍질도 터지긴 하는 걸까? 생각난 김에 귤껍질을 꾹 짜서 터트려 보았다. 수많은 알갱이들이 터지면서 테이블 위에 점점이 쌓였다.


한 번 터트리고 또 한번 더트리고. 테이블 위가 살짝 젖을 정도로 계속 터트리고 있으니 이처럼 서글픈 일이 있나 싶다. 이제는 이런 것조차 같이 터트릴 사람이 없구나. 이런 것을 기억하는 사람이나 있을까. 귤은 여전히 시큼 달콤한데, 이렇게 귤껍질을 터트리고 있으면 난 아직도 아이 같은 데 어느덧 세상애서 벗어나 컴컴한 거실에서 옛날 일이나 기억하며 조물거리며 살고 있다.


그런데 내가 뭐라고 한 게 아니라고 위층에 얘기를 해야 되는 걸까. 오해를 받는 것은 싫은데 찾아 올라가자니 용기가 없고 쪽지를 쓰자니 왠지 변명 같다. 그리고 사실 위층이 조용하진 않다. 지금도 쿵쿵거리는 소리가 들리긴 한다. 하지만 귤 때문인지 그렇게 크게 들리지는 않는다. 사람의 마음은 참 간사하기도 하지. 아무런 연결 점이 없을 때는 죽일 듯이 밉다가도 정말 사소한 연결 하나라도 생기면 남같이 느껴지지 않는다. 아니 용서가 된다고 해야 할까. 아무튼 별일 아니게 된다. 천둥 우레와 같던 소리가 귤하나로 어린아이 발바닥 소리 같은 소리가 되어 버린다. 이 마음이 언제까지 갈지는 모르겠지만.


귤을 세 개째 까먹었더니 귤 만으로도 배가 불렀다. 온 집안에 귤 향이 가득하다. 마치 누군가와 같이 살고 있는 것 같다. 고독은 향마저 무색무취하게 만든다. 아니 그 순서가 반대인가?


나를 위해서 과일과 꽃을 사야겠다고 생각했다. 귤이나 바나나나 망고와 같이 없어도 되는 과일과 장미와 수국과 안개꽃같이 필요 없는 꽃들을 사야겠다. 필요한 걸로만 내 세상을 채우겠다고 생각한 건 정말 바보짓이었다. 살아 보면 세상엔 필요한 것보다 필요 없는 게 더 많다. 필요한 거라고 해 봐야 뭐가 있을까. 비바람을 막아 줄 집과 옷과 음식 외에 더 필요한 게 있을까. 그 외는 사실 다 필요 없는 것이다. 심지어 사람조차. 즐거움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들, 내 삶에는 그런 것들이 더 필요하다. 필요 없는 것을 사야 그리고 곁에 두어야 더 행복해질 것이다. 그래, 그래야 조금이라도 더 행복해질 것 같다. 행복해지자. 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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