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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May 06. 2024

믹스커피 라이프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여든한 번째

회사에 처음 들어가서 가장 먼저 배운 건 당연히 커피 타기였다. 누구 대리님은 커피 둘, 설탕 둘, 프림 둘, 누구 과장님은 설탕 셋, 커피 하나, 프림 셋.


사람 이름도 외우기 어려웠던 초보 신입사원은 이름과 얼굴과 커피 취향을 매치시키는 데 몇 개월이 걸렸던 것 같다. 그런데 신기한 건 그렇게 계속 커피를 타다 보니 한 가지 요령이 생겼다는 것이다. 나중엔 모두 다 똑같이 커피를 타다 주었다. 모두 진하게.  이구동성으로 내가 타는 커피가 제일 맛있다고 자기에게 딱 맞춰서 준다고 다들 좋아했다. 그래서 그때 나는 조금이나마 깨달았다. 세상은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고, 세상은 들리는 게 다가 아니라고, 세상은 정직한 게 다가 아니라고.


요즘은 커피를 탄다고 하면 믹스커피를 뜨거운 물에 부어 내주거나 커피 머신에 캡슐커피를 넣고 누르기만 하면 된다. 그것도 신입사원이나 후배 사원이 하는 일은 거의 없다. 자기가 먹을 커피는 자기가 탄다. 이 얼마나 평등한 세상인가.


오늘도 탕비실에서 믹스커피 한잔을 타고 있는데 직원들이 계속 들어와서 커피를 타 가지고 나갔다. 대부분은 커피 머신에서 아메리카노나 에스프레소를 내려서 자기 자리로 가지고 간다. 아침이면 분주하게 움직이는 사람들로 탕비실에 가득하다


그런데 왜 나는 가끔 탕비실에 나 혼자 있었던 그때가 그리워질까. 지나간 모든 것은 아무리 나쁜 것이라도 그리워진다더니 홀로 있던 탕비실이 그리워질 줄 몰랐다. 아무도 없이 조용한 단절된 공간. 밖에서는 시끌벅적 이야기 소리는 탕비실 벽에 의해 삼켜지고 웅성웅성하는 소리로 백색소음으로 변해 차분히 가라앉으면 나는 조용히 커피를 탔었다


그리고 쟁반에 적을 땐 몇 개, 많으면 몇 십 개의 커피를 타서 나갈 때 왠지 직장인이 된 그런 기분이 들어왔다. 지금 생각해 보니 정말 어처구니없는 시절이었지만 그 조용한 탕비실이 아직도 기억이 난다. 지금은 회사 어느 곳에도 조용히 있을 만한 공간이 없다 사실 그런 공간이 있다는 것도 이상하긴 하다 다들 모여서 같이 있으라고 사무실에 있는 건데 나 혼자 있을 공간을 찾는다는 것도 참 이상한 일이긴 하네.


하지만 나는 언제나 혼자 있을 공간이 필요했고 그래서 아무도 없던 탕비실. 비상계단, 꽉 막힌 옥상의 한켠 같은  그런 곳들을 찾아다녔다


최근 찾은 공간은 본부스이다. 전화를 받기 위해 사무실 안에 방음이 되는 작은 부스들을 설치하는 회사들이 늘어났다. 개인의 프라이버시도 중요하게 되었고 전화를 받을 때 사무실에서 시끄럽게 하는 것이 예절이 아니 시대가 된 것이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전화가 오면 밖에서 받는 것이 맞는 시대가 되었지만 무언가를 적거나 노트북으로 일을 하면서 전화를 받을 수 없어서 결국 폰 부스라는 것이 생겼다. 전화 부스 보다 조금 더 큰 사이즈로 보통 유리문이 달려 있지만 방음이 아주 잘 되는 공간이다. 그래서 전화가 오면 특히 업무상 전화가 오면 노트북고 전화기를 들고 본 부스 안으로 들어간다. 그러면 남에게 피해 없이 목소리를 줄이지 않고 전화를 받을 수 있다


난 그렇게 전화가 자주 오는 편은 아니다. 하지만 가끔 알람을 맞춰 놓고 혼자 전화받는 척하며 노트북 들고 폰부스로 들어간다. 그리고 노트북 놓고 나와 믹스커피를 타서 다시 그 안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10분 20분 앉아서 전화를 받는 척하며 커피를 마시고 지낸다.


얼마나 민폐인가. 회사입장에서 보면 거머리 같은 인간이 아닐까? 하지만 그렇게라도 혼자 있을 시간이 있어야 일에 집중이 된다. 밖에 나가 커피를 마시면 수다를 떨 지도 않고 담배도 피우지 않고 인터넷 쇼핑도 하지 않고 몰래 나가서 사우나도 가지 않는다: 그렇다면 폰 부스에서 10분 정도 믹스커피 마시는 시간 괜찮지 않을까?


오늘 정말 모처럼 나에게 업무적인 전화가 왔다. 외근 나간 영업직 사원이 나에게 10년 정도 전에 일을 물어보려고 전화한 것이다. 이 정도 일의 전화를 받는 게 요즘은 나의 전부가 되었다. 난 전화기를 들고 폰부스로 들어갔다ㅋ 그리고 내가 아는 이야기를 조곤조곤해 주었다. 전화가 끝난 뒤 나는 마치 전화가 다 끝나지 않은 것처럼 전화기를 본부에 놓고 밖으로 나와 믹스커피 한잔을 타서 다시 안으로 들어갔다.


물아래 가라앉아 있는 그 고요함


그 느낌이 좋아 5분 정도 계속 자리에 앉아 있었다. 이제는 믹스커피를 먹는 사람도 나밖에 없는 듯하다. 종이컵에 믹스커피를 타러 탕비실에 가는 사람. 회사에서는 마치 종이나 불펜을 주듯이 믹스커피를 주문하는데 언제나 한가득 남아 있다. 찾는 사람도 별로 없어 항상 한가득 남아있다. 예쁘게 생긴 캡슐커피는 알록달록하게 더 예쁜 유리보울에 쌓여있지만 퇴근시간이 되면 확연히 줄어있다. 그래도 나 말고 누군가는 믹스커피를 찾긴 할 것이다. 이 달고 끈적함에 중독된 사람들이.


종이컵에 담긴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여전히 그 맛이다.


달달하다. 아니 달달했다. 내 인생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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