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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Apr 10. 2024

기적 같은 도시락의 날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일흔네번 째

봄이 오면 난 건물 옥상에 가서 자주 앉아 있곤 한다. 대부분 건물 옥상이 흡연실이지만 내가 일하는 곳의 건물 옥상은 반은 흡연실이고 반은 비흡연자들이 앉아 있을 수 있게 테이블과 의자들이 놓여 있다. 그렇게 나누어 놓아도 흡연자들로 가득하기 마련이지만 특이하게도 이곳은 비흡연자의 공간에 아무도 오지 않는다. 그래서 답답할 때마다 올라와서 멍하니 앉아 있곤 한다.


오늘따라 날씨가 너무 좋아 무엇인가를 사다가 옥상에서 먹기로 결심했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암막사이로 여명이 비칠 때부터, 버스를 기다면서 벚꽃이 떨어질 때부터, 회사까지 걸어오면서 짙은 흙냄새를 맡을 때부터 설레였던 나는 그런 이상한 결심을 하였다.


무엇을 먹을지 고민하느라 아침 시간을 다 보냈다. 햄버거도 괜찮을 것 같고 샌드위치나 주먹밥, 김밥 종류도 나쁘지 않다. 도시락이나 컵라면 같은 것은 너무 청승맞지 않을까? 흡연실 옆의 벤치에서 도시락을 먹는 건 이상하다. 누가 봐도 단정한 회사원처럼 샌드위치나 브리또, 혹은 작은 햄버거와 커피를 먹는 그림이 나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 마음 가짐과는 달리 11시가 되자 난 도시락을 사러 편의점에 내려갔다. 아침에 출근하면서 가끔 빵을 사러 갈 때마다 편의점 도시락이 눈에 띄어서 항상 마음속에 담겨있었던 것 같다. 내 마음속의 장바구니에 도시락이 남아 있었다. 장바구니를 비우러 편의점에 기분 좋게 도착했지만 도시락은 한 개도 남아 있지 않았다. 혹시 내가 못 찾는 게 아닌가 해서 직원에게 도시락이 어디 있냐고 물었더니 다 판매되어 없다고 했다. 조금쯤 조급해졌지만 회사 근처에 편의점은 넘쳤다. 그렇게 생각하고 가까운 곳부터 하나씩 들어갔다. 하지만 내 예상과는 달리 제대로 된 도시락이 남아있는 곳이 없었다. 밥과 반찬이 있는 내가 아는 도시락은 이미 다 팔렸고 매운 김밥 정도만 조금 남아 있었다.

 

이쯤 되면 샌드위치나 햄버거로 노선을 변경해도 될 법 한데 난 도시락에 꽂혀 버렸다. 주변의 도시락집은 죄다 고급 브랜드 체인 또는 일본식 도시락을 파는 집들 뿐이었다. 내가 원하는 건 밥과 반찬이 있는 평범한 도시락일 뿐인데. 편의점을 찾다 보니 어느덧 시간이 12시에 가까워졌다. 완전히 조급해진 나는 도시락 전문점에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그곳에 가면 반드시 내가 원하는 도시락이 있을 거이니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최근에 생긴 비싼 도시락집들 말고 항상 똑같은 메뉴를 팔고 있는 그곳이어야만 했다.


무려 1.5km 떨어진 곳에 그 도시락집이 있었다. 영업을 하는지 물어보고 가고 싶었지만 그런 성격은 아닌지라 영업 중이길 하늘에 맡기고 불안한 마음만을 가지고 그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오전에 살짝 쌀쌀했던 날씨는 어느덧 초여름 같은 온도를 뽐내고 있었다. 10여분을 걸었을 때 나는 온몸에서 땀이 나고 있음을 알았다. 옷을 벗어 손에 들었을 때는 이미 늦었다. 축축해진 부분이 남의 눈에 띌까 봐 조심하느라 더 땀이 났다. 20분 이상 걸었을 때 나는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왜 이런 길을 가고 있는지 기억이 사라졌다.


그곳에 도착했을 때 다행히 내가 그곳에 간 이유가 생각이 났다. 가게 안에는 테이블 없이 대기용 의자만 창가와 벽 쪽에 놓여있었고 몇 대의 키오스크 앞으로 여러 명의 사람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내 차례가 왔을 때 내가 십몇년을 먹었던 그 메뉴가 아직도 똑같이 남아 있음에 너무 감사했다. 의외로 수월한 주문과 십여분의 기다림을 마치고 도시락을 받아 들었다. 기분 탓인지 회사로 올 때는 바람이 좀 불어 시원하게 걸어올 수 있었다. 발바닥이 뜨겁고 발목이 시큰해졌다. 옷을 든 팔의 근육이 저리고 도시락을 든 손가락의 마디는 끊어질 것 같았다. 하지만 난 익숙한 도시락을 얻었다.


마침내 회사에 다시 도착하여 옥상에 올라갔을 때는 한시가 훌쩍 넘어 있었다. 어차피 찾는 사람도 없을 터인데 무슨 상관인가 싶었다. 비닐봉지를 열고 도시락 뚜껑을 도시락 밑에 받쳤다. 담배를 피우러 가는 사람들이 흘깃흘깃 보기는 했지만 무슨 상관일까. 난 지옥 같은 길을 걸어온 승리자인데.


젓가락봉지를 뜯고 젓가락을 똑같은 크기로 떼어내기 위해 두 손으로 젓가락을 벌리고 있을 때 갑자기 바람이 불었다. 돌풍 같은 바람이 바닥의 나뭇잎을 끌어올리는 것을 신기하게 보고 있었는데 순간 나의 도시락도 같이 올라갔다가 바닥에 패대기 처져 버렸다. 반찬은 그대로 옥상바닥에 쏟아지고 도시락 껍데기는 바람에 계속 흔들리며 굴러 다녔다. 김치와 고기와 햄, 그리고 하얀 밥이 바닥에 맛있게 펼쳐져 있었다. 어디선가 작은 웃음소리가 들린 것 같았지만 돌아보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내 테이블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도 옥상의 비상문도 사라지고 쏟아진 도시락의 내용물만 선명하게 보였다


난 앉아서 젓가락을 마저 떼어냈다. 젓가락이 기적처럼 똑같은 모양으로 떨어져서 완벽한 11자가 되었다. 나무젓가락이 똑같이 떼어내 지면 기분이 너무 좋다. 한쪽에 치우치지 않고 바르고 똑바른 젓가락 한쌍.   


조용히 일어나서 바람에 구석까지 날아간 도시락통을 주어왔다. 반찬과 밥을 젓가락으로 도시락통에 담았다. 밥이 자꾸 부서져서 힘들었지만 마지막 한 톨까지 도시락통에 모두 담았다. 그리고 도시락집에서 가져왔던 휴지로 바닥에 뭍은 음식들을 닦아냈다. 휴지가 모자라서 사무실에서 물티슈를 가져다가 또 닦아냈다. 삼십여분을 노력한 끝에 내가 오기 전의 모습으로 돌려놓을 수 있었다.

 

도시락이었던 어떤 것을 담은 봉지와 물티슈을 들고 사무실로 다시 돌아왔다. 음식물 쓰레기를 음식물 쓰레기통에 담고 도시락통은 씻어서 분리수거함에 넣었다. 두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아무도 내가 무엇을 하는지 묻지 않는 것이 다행이기도 하고 쓸쓸하기도 했다.


오늘은 어떤 날인가.


아침에 암막을 뚫고 들어온 여명과 같이 일어났다. 버스 정류장 앞에는 꽃이 피어 있었다. 길에서는 흙냄새가 봄이 오고 있음을 알렸다. 햇빛은 포근했다. 모든 것이 이제 힘들었던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고 날 옥상으로 불렀었다. 무엇보다도 오늘은 나무젓가락이 기적같이 똑같이 떨어진 날이다. 그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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