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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면아래 Apr 07. 2024

지옥으로 간 추어탕

100가지 요리, 100개의 마음. 일흔세 번째

오전에 일을 하고 있는데 모르는 핸드번호로 연락이 왔다. 몇 년 전에 전화번호를 바꾸면서 연락처를 재등록하지 않아서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오면 받지 않는다. 번호를 바꾼 지 몇 년이 지났기 때문에 이제 알 사람들은 다 알았기도 하고 꼭 연락할 일이 있는 사람은 문자로 다시 내용을 남기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당연히 무시하고 안 받았다. 두 번 연락이 오고 잠시 조용해졌다. 그러다 세 번째로 전화가 왔을 때 난 전화를 받았다. 그 정도면 잘못 온 전화라도 받고 내용을 확인해서 정리가 필요한 상황이라고 생각했다


뜻밖에도 십여 년 전에 일했던 회사의 사수로부터 전화가 온 것이었다. 잘 지내냐는 물음에 빈소리도 못하고 우물쭈물하고 있으니 넌 여전하구나 하는 한숨인 듯, 반가움인 듯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제는 내가 하는 말에 의미를 파악하는 사람이 주변에 아무도 없다. 그저 말이 표현하는 내용 그대로 받아들여지고 맥락이나 나의 감정을 고려하는 어떤 시도도 느껴지지 않는다. 즉 아무도 나에게 관심이 없다. 눈꼽만큼도. 그래서인지 옛 사수의 한숨 어린 목소리에 찔끔 눈물이 났다. 어쩐 일이냐고 물으니 그냥 한번 연락해 봤다고 했다. 나는 속으로 사수가 분명 보험이나 영업의 세계로 갔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으면 몇 년 만에 연락을 하며 받을 때까지 전화하지 않는다. 내일은 토요일이었다. 점심을 같이 먹자고 했다. 내가 술을 먹지 않는 것을 아는 사수는 점심을 먹자고 배려했지만 내일이 주말임을 고려하지는 않는 상황인 듯했다. 하지만 특별한 일이 없는 나는 그러자고 했다.


새로운 사람과의 약속은 점점 힘들어진다. 그렇다고 과거 속의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냐고 하면 그건 또 아니다. 그다지 친하지 않은 사람과의 만남은 30분 정도 지나면 할 말이 없어진다. 아무리 긴 직장에서의 추억도 돌아보면 30분 이상으로 남아있지 않는다. 그나마 상대방이 말이 많은 편이면 조용히 듣기만 해도 돼서 편하기는 하다. 하지만 사수는 말이 없는 사람이었다. 도무지 감이 오지 않았다


토요일 점심, 어떤 산 아래의 추어탕 집에서 만나기로 했다. 거의 7년도 넘게 연락도 안 했는데 뜬금없이 연락 와서 추어탕이라니 어떤 맥락에서 그런 약속이 가능한지 궁금하기까지 했다.


넓은 주차장을 갖춘 3층짜리 최신식 건물이 그곳에 있었다. 초가집이나 1층짜리 옛날 기와집을 생각하고 간 나는 추어탕이 최근 이렇게까지 인기가 있나 하고 나의 트렌디감을 많이 의심하게 되었다. 약속시간보다 15분이나 빨리 도착했는데 사수는 먼저 와있었다. 2층의 자리로 안내받아 갔다. 그 사람이 어디 있는지 한참을 찾아보다 한쪽 구석에서 앉아있는 그 사람을 찾았다.


그 자리 앞으로 갔을 때 난 그 사람의 눈빛이 흔들리는 것을 놓치지 않았다. 곧이어 반갑게 웃으며 나에게 앉으라고 했지만 그 흔들림은 좋은 의미는 아니었다. 그리고 사수는 많이 늙어 있었다. 어떤 사람을 모처럼 만났을 때 그 사람이 생각보다 많이 늙어 있다면 그 사람이 보기에 나도 깜짝 놀랄 정도로 많이 늙었다고 생각하면 된다. 나도 이렇게까지 늙었겠구나 하는 생각을 하면서 겨우 웃음을 지을 수 있었다.


추어탕을 시키고 몇 가지 튀김을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이 나오는 동안 나는 지금 있는 회사 얘기를 했고 사수는 사업을 한다고 했지만 더 이상 이야기 하지는 않았다. 그리고 우리는 예전 이야기로 돌아갔다. 누군가 좋았던 일, 누군가 싫었던 일, 죽도록 힘들었던 일, 젊음으로 가득 찼던 일, 우리의 모든 젊음에 대해 이야기했다.


식사를 마치고 나온 그 사람은 다시 연락하고 종종 보자고 말을 하고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가벼운 악수 후에 우리는 각자 차를 타고 집으로 왔다.


어렸을 때 집에서는 추어탕을 자주 끓였다. 아버지가 좋아하셨다. 끓이기전 커다란 통에는 커다란 늙은 호박과 미꾸라지들이 가득 들어있었다. 몇 시간이고 펄펄 끓인 통을 열어보면 호박만 덩그란히 남아 있었다. 어머니는 그걸 으깨고 채에 걸러내서 탕을 만들었다. 미꾸라지들은 어디 갔냐고 물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미꾸라지들은 물이 뜨거워지면 버틸 수가 없어 호박 속으로 파고들어 간다고 했다. 살려고 발버둥치며 모두 호박속으로 들어간다고. 하지만 그곳도 불지옥이 되고 모든 미꾸라지들은 호박 속에서 죽고 만다고 했다. 호박으로 미친 듯이 파고들어 가는 미꾸라지의 이미지가 며칠밤이나 머릿속에서 사라지지 않았다.


그렇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너무나 치열하게 뜨겁게 살지 말았어야 했다. 끝을 맞이할 때는 품위가 있었어야 했다. 우리 모두 펄펄 끓는 물속에서 살아남기 위해 고통스럽게 몸부림쳤지만 결국 다 죽어야 함을 알았어야 했다. 그게 삶이 아니라 죽음이었음을 이제야 깨달았다. 그리고 죽어서야 통밖으로 나올 수 있었다.


한때 같은 통 안에서 지냈던 그 사수도 죽어서야 통밖으로 나왔을 것이다. 그리곤 어찌 되었든 그 뜨거웠던 날이 생각나서 날 만났을 것이고, 혹은 몸부림치던 그때의 내가 필요했을지도 모르지만, 만나고 나서야 그 세계는 이미 죽었음을, 이제 우리는 모두 늙었음을 날 통해 알았을 것이다. 이미 많은 날들이 지났다. 몸부림치던 나의 동료, 나의 친구, 나의 사랑들은 모두 그 지옥에서 갈아 없어졌다. 죽어서야 통밖으로 나온 우리는 여전히 세계가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알지만 예전과는 전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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