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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Feb 25. 2020

당신의 하루가 대국민 '스트리밍'된다면

'코로나 19' 바이러스 확진자들처럼 말입니다

확진자, 당신의 오늘을 밝히시오.


확진자가 발생했다는 뉴스 뒤엔 그가 증상이 나타나고 나서의 행적이 소상히 밝혀지곤 했다. 바이러스를 지닌 그가 어디에 가서 무엇을 사고, 어떤 영화를 보았으며, 누구를 만났는지가 친절하게 표에 정리되어 보여졌다. 비고란에는 그가 들른 장소 중에 어느 곳이 폐쇄되었는지 소독이 완료된 곳은 어디인지 등이 표시되었다. 심지어 네티즌들의 공포와 호기심에 맥을 같이 하는 공무원들에 의해 그들의 신상 정보까지 수차례 유출되기도 했다.

너무나 소상한 정보가 노출되다보니 정작 확진을 받은 사람들은 몸이 아픈 것보다 더 아픈 것이 사회적인 시선이었다.


몸이 아프면 집에나 틀어박혀 있지 그렇게 빨빨거리고 싸돌아다녔나
부인도 있는 사람이 누구랑 성형외과를 다녀온 것이냐
OO동에 있는 사람이 원래 여친이고, 여행을 같이 다녀온 사람은 유부녀래


온갖 의혹과 추측, 악플들로 얼룩져 있는 확진자들의 동선 뉴스.

그러던 중 어제는 오랜만에 선플이 보인다. 왜냐하면 그 확진자의 동선이 너무나 단순했기 때문이다. 그의 동선은 며칠 째, ‘집-직장-헬스장-집’이었다. 그의 우직한 동선은 일단 사람들의 피해를 최소화했기에, 그리고 그의 성실한 생활 태도를 대변한다고 여겨지기에 네티즌들은 그의 삶을 칭찬한다.


사회적 관계의 위태로운 근간


미디어를 통해서 정보가 뿌려지면 네티즌들은 ‘익명’이라는 갑옷을 입고, 내가 알지 못하는 타인의 삶을 마음껏 ‘재단’한다. 

어쩌면 인터넷 공간에 있는 이야기들이 도리어 그들의 ‘진심’일 수 있다. 오프라인에서의 만남들은 ‘정제된 언어’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이성’이 작동하는 ‘가면’들의 대화로 이루어지기 때문에 우리가 오늘 만났던 사람들의 칭찬은 사실 진심이 아닐 가능성이 매우 높은 것이다.

마치 지금의 상황들이 전에 보았던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의 실사판 같다는 생각을 했다. 자신의 핸드폰에 걸려오는 전화와 메시지를 공개하는 그들의 게임은 몇십년 우정을 이어온 그들의 관계가 얼마나 위태한 근간 위에 이루어지고 있는지를 여실히 보여주었다. 최근에 개봉한 ‘정직한 후보’ 역시 사람이 ‘가면’을 쓰지 않고 살아가면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해학과 풍자를 섞어 보여주고 있다.  

마치 지금의 상황들이 전에 보았던 ‘완벽한 타인’이라는 영화의 실사판 같다는 생각을 했다.


확진자를 진짜 '확진'시키는 사회와 미디어


오늘 나의 동선이 사람들에게 알려진다면 사람들은 어떠한 반응을 할까?

내가 사는 지역, 내가 다니는 회사, 내가 어떤 종교를 가지고 있는지, 나는 결혼을 한 사람인지 아닌지, 나의 자녀들은 몇 명이고 몇 살인지, 아들인지 딸인지, 내가 이용했던 마트식당, 그 외에 내가 만났던 지인들의 정보까지 알려진다면?

어떤 사람들은 살고 있는 지역을 가지고 문제를 삼을 수도 있고, 누군가는 나의 직업을, 누군가는 종교를, 누군가는 가족을, 누군가는 내가 만났던 지인들을 문제 삼을 수 있다. 평소에 좋아하지 않던 그룹에 속해있는 것을 확인하는 순간, 그 그룹에 대한 혐오를 바이러스가 가진 부정적인 이미지와 결합시켜 확대 재생산하게 마련이다.

자연스레 확진자와 그들의 고통을 조금은 이해하게 되었다. 증상이 심한 분들은 그 병마를 이겨내느라고 힘든 시간을 보내고 계시겠지만, 증상이 경미하더라도 이러한 사회적인 시선이 더 힘들겠구나 싶었다. 원래의 ‘나 자신’과 인터넷에서 확대 재생산되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한 없이 다를 때 느끼는 자괴감과 무기력은 엄청나게 심할 것이다. 유명인이라면 기자회견을 열어 해명할 기회라도 얻겠지만 지금은 다르다. 하루가 다르게 급증하는 확진자 뉴스에 그들의 억울한 목소리를 대변해 줄 언론은 거의 없을 것이다. 그렇게 그들은 미디어에 의해 일시적으로 소비되었다.

이러한 사회적인 시선이 더 힘들겠구나 싶었다.


비밀은 없다


얼마 전, 아이가 쓰던 카시트를 분리배출했다.

주민들의 위해 공지된 안내 표에 카시트라는 품목은 없었다. 그래서 카시트의 헝겊들은 따로 배출하고, 나머지 부분은 모두 플라스틱으로 이루어져 있기에 플라스틱 분리수거에 내놓았다. 며칠 후, 핸드폰으로 전화가 왔는데 아파트 관리사무실이었다.


“혹시 OO동 OO호에 사시나요?”

“네, 그런데요?”

“카시트는 원래 분리배출이 안돼서요. 관리사무실에 4,000원을 납부해주셔야 합니다.”

“네, 저는 플라스틱이라 되는 줄 알았어요. 죄송합니다.”


쓰레기 배출 요금을 납부하러 가는데 간담이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일단은 룰에 대한 무지함이 위반을 낳았으니 부끄러운 일이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관리사무소에서도 공지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은 부분에 대해 미안해했다.) 그런데 그보다 먼저 한 가지 스치는 생각은, ‘이 아파트 단지에 아이 키우는 집이 얼마나 많은데 우리 집에서 내놓은지를 관리사무실에서 어떻게 알았지?’였다. 


본디 우리의 삶은 비밀이 없다. 카시트를 잘못 내놓은 것 말고도 어쩌면 나의 삶은 여러 방법을 통해 생중계되고 있는지 모른다. 확진자들도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그들은 늘상 걸리던 감기와 같은 증상이었기에 일상 생활을 며칠동안 이어갔고, 자신의 블로그에도 올리지 않던 상세한 그들의 삶의 단면이 미디어를 통해 전국으로 퍼져나갔던 것이다.  


당신의 하루하루가 쌓여 당신이 됩니다


이렇게 안타까운 부분도 있지만 우리로 하여금 생각하게 하는 부분도 분명 있다. 사람의 하루하루의 동선을 보면 그가 어떤 가치를 추구하면서 사는지가 고스란히 드러난다. 누군가에게는 건강의 증진이, 누군가에게는 학업과 일이, 누군가에게는 사랑하는 사람이 그 동선에 겹칠 것이다.

만약 나의 삶이 사람들에게 낱낱이 드러난다면 어떨까?

아마 내가 무엇을 좇으며 사는지가 만천하에 드러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당신의 단 하루, '전체 공개'된다면 어떻겠습니까?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이 없기를 바랐던 윤동주 시인이 생각났다. 누군가 지켜보지 않더라도 하늘이 지켜보고 있다는 삶에 대한 인식은 그의 삶을 더욱 빛나게 해주었을 것이다. 신앙인으로서 이 세상을 만드신 그 분이 애정을 가지고 내 삶을 지켜보고 있다는 믿음은 내 삶을 지금까지 지켜주었다.


하지만 내 삶을 지켜보고 있는 것은 조물주 뿐만이 아니다. 애정의 많고 적음에만 차이가 있을 뿐, 우리의 삶은 ‘트루먼 쇼’처럼 이미 전시되어 있다. 확진자들의 동선은 그러한 우리 ‘미디어 사회’의 단면이었을 뿐이다.

우리의 삶은 ‘트루먼 쇼’처럼 이미 전시되어 있다. 확진자들의 동선은 그러한 우리 ‘미디어 사회’의 단면이었을 뿐이다.


타인의 단편적인 삶의 단면만을 가지고 마음대로 판단하지 않았으면 한다.

그리고 우리의 오늘 하루의 동선을 한 번 되짚어보았으면 한다.

내가 오늘 밟은 곳, 만난 사람들. 나는 무엇을 좇으며 살고 있을까?

그것이 만천하에 공개된다면 나는 떳떳할 수 있을까?


유난히 오늘 하늘이 파랗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늘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 본다.


유난히 오늘 하늘이 파랗다. 고개를 들어 나를 바라보고 있는 하늘에게 손을 들어 인사를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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