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바이러스가 전 세계를 덮치면서 공포와 불안감이 확산되는 가운데 모두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다. 하지만 이 와중에 생각지 못한 피해를 입은 이들이 있다.
코로나 맥주, 내가 뭘 어쨌길래?
2월 28일 미국 여론조사기관인 유고브에 따르면 미국 성인 대상 조사에서 코로나 맥주 구매 의향이 최근 급락세를 기록해 2년 만에 최저치를 기록했다고 한다. 특정 브랜드에 대한 이미지나 평판을 나타내는 유고브 버즈 점수에서도 코로나 맥주는 1월 초 75점에서 최근 51점으로 추락했다.
SNS에 올라온 코로나 맥주 패러디물
이런 현상은 왜 생기는 것일까?
우리는 언어를 통해서 사물을 인식하기 때문이다.
만약 언어가 없다면 우리는 생각을 할 수 있을까? 생각을 이어갈 수 있을까?
사물에 이름이 없다면 우리는 어떤 방법을 통해서 사물을 인식할 것인가?
우리는 사물의 본질과 상관없이 그것에 이름을 붙이고 부름으로써 사물과 관계를 맺는다.
이름은 그래서 매우 중요하다. 그 이름이 그 사람이 아닌 것은 알지만 계속 반복적으로 불리워지면서 결국 이름은 그 존재를 인식할 때 가장 많이 사용되는 정보이기도 하다.
코로나 시국을 맞이하여 거국적으로는 모이지 못하고, 삼삼오오 모여 술자리를 하고 있는 모습을 한 번 상상해보자. 맥주 박스를 개봉했는데 노란 코로나 맥주가 우리를 바라보고 있다.
“이거 맥주 누가 사왔어?” “왜? 우리 자주 즐겨 마시던 거잖아~” “에이, 정신이 있는거니? 이거 마시려니 왠지 바이러스가 몸 안에 퍼질 것 같은 기분이야!”
물론 이렇게까지 반응하는 사람들이 많지는 않을 것이다. 이성적으로 판단했을 때 그 누구도 코로나 맥주와 바이러스가 상관이 없다는 것을 인정할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찝찝한 기분이 든다. 맥주를 바라보는데 마스크를 써야할 것 같다. 이런 이상야릇한 감정이 생기는 것까지 막기는 어려울 것이다.
코로나 맥주의 반격
코로나 맥주는 억울했을 것이다. ‘그 코로나’와 ‘이 코로나’는 아무 상관이 없다. 사실 코로나는 라틴어로써 ‘왕관’을 뜻하지 않던가? 개기일식이 일어날 때, 가려진 태양에서 가려지지 않는 신비의 청벽색을 띤 가스층을 코로나라고 부르기도 한다. 아마 코로나 맥주의 마케팅팀과 홍보팀은 고민이 많았을 것이다. 그러던 중 코로나 SNS에 이런 사진이 올라왔다.
그러던 중 코로나 SNS에 이런 사진이 올라왔다.
내가 뭘 어쨌길래?(What have I done?)
다행히 여유가 있어 보인다. 단골 고객들이 바이러스와 이름이 같다고 한 순간에 브랜드에 대한 충성을 멈추지는 않을테니까. 하지만 특정 브랜드에 충성도가 생기지 않은 고객층이 굳이 코로나 맥주를 선택하지 않을 가능성이 더 커진 것은 자명한 사실로 보인다. 이 쯤 되면 이름을 정한 세계보건기구에 소송을 걸어야할지도.
국내판 코로나 피해자들
국내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바로 경북 포항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다. 다름 아니라 아파트의 이름이 ‘우방 신천지 타운’인 것이다. 바이러스의 확산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주목받고 있는 특정 종교 집단과 이름이 같다보니 아파트 이름만으로도 부정적 이미지가 생겨버린 것이다. 이 아파트는 입주자 대표회의를 열어서 주민 80%가 동의하면 새 명칭을 공모해 이름을 바꿀 예정이라고 한다.
국내에도 억울한 사람들이 등장했는데 바로 경북 포항의 한 아파트 주민들이다.
이 외에도 이름 때문에 억울한 사람들은 많다. 대표적인 케이스가 김정은 위원장이 북한 정권을 잡기 전에 데뷔했던 탤런트 김정은 씨가 있다. 김정은 씨가 연예계 데뷔한 때가 1996년이라고 하니 그 때는 김일성 주석이 사망한지 2년이 채 지나지 않아 아들인 김정일 위원장이 정권을 잡고 있던 때였다. 그녀가 데뷔할 때, 자신의 이름을 가진 사람이 북한 정권을 이어받을 것이라고 상상이나 했을까? 이제 각종 포털에서 검색해보아도 나이가 한참 어린 북한 지도자 김정은과 한 지면에 자리한다. 이름을 부르면서 자연스럽게 연상되는 인물이 북한 지도자인 것이 '배우'이자 '여성'인 김정은 씨에게는 그리 유쾌한 일은 아닐 것이다.
이제 각종 포털에서 검색해보아도 나이가 한참 어린 북한 지도자 김정은과 한 지면에 자리한다.
우리의 언어가 우리의 사고를 지배하고 있다는 것은 많이 알려진 사실이다. 인간 관계에서 대부분의 싸움은 본질적인 이유보다 그 본질을 담는 그릇, 즉 언어의 사용 방식이 달라서 발생하는 경우가 많다. 즉 사고(思考)만큼이나 중요한 것이 언어(言語)이며 그것은 단순한 '포장지'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는 것이다.
코로나 맥주의 역설
코로나 맥주, 그들이 잘못한 것은 없다. 다만, 이것 한 가지만 기억하자.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언어가 우리의 마음에 영향을 미친다는 것.
구매 의향 뿐 아니라 존재에 대한 이미지, 선입견, 편견 등에 관한 모든 것이 언어로 이루어진다는 것.
그래서 김춘수 시인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야, 존재에 의미가 부여되고, 관계가 형성되는 것임을 시에서 노래하지 않았던가.
그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에야, 존재에 의미가 부여되고, 관계가 형성되는 것임을 시에서 노래하지 않았던가.
이름이 촌스럽다하여 사람이 촌스러운 것은 아니지만, 촌스러운 언어를 사용하면 촌스러운 사람이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것 같다.
코로나 맥주의 귀여운 반격 포스터를 바라보며 오늘 내가 사용한 언어들을 돌아보게 된다. 내가 타인들을 부를 때, 어떻게 부르고, 어떻게 대했는지. 내 마음은 그게 아니었는데, 혹 거칠게 표현되거나 표현되지 않아서 상처를 준 일은 없었는지. 만약 그랬다면 내 마음이라는 본질이 괜찮다고 해서 용서될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상대방은 오로지 그 언어를 통해서만 나의 본질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코로나 맥주의 교훈
코로나 맥주는 어떻게 하면 '코로나'라는 언어에 박제되어버린 부정적인 이미지를 탈피할 것인지를 고민하면 될 것이다. 아파트 이름은 아마도 투표를 통해 바뀔 것 같다.
그리고 우리는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우리의 사고에 어떠한 영향을 주고 있는지 돌아볼 일이다.
아파트 이름을 바꾸는 것보다 훨씬 어렵고 오랜 시간이 걸리는 작업이 될 지도 모르는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