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음 Apr 29. 2020

인생 리셋(RESET)이 주는 福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 리뷰

영화 프로듀서인 찬실(강말금 분)은 평생 영화만 만들며 살 줄 알았던 사람이다. 지 감독(서상원 분)과 함께 오랜 시간 영화 작업을 해 오던 그녀는 술자리에서 갑작스런 감독의 죽음을 맞이하고는, 삶이 완전히 리셋되는 경험을 하고 만다.     


※ 이후 작품에 대한 스포일러가 있을 수 있으니 영화를 보실 분들은 유의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멈춤의 미학(美學)


찬실은 어쩌면 지 감독보다 더 큰 열정을 불태우며 살았지만 PD의 자리는 감독의 자리에 비하면 대체 가능한 자리이다. “그런 영화는 어느 프로듀서를 붙여도 상관 없다”는 대표(최화정 분)의 말을 뒤로 하고, 그녀는 길이 너무 좁아 차로 오를 수 없는 길을 올라 산 동네로 이사를 한다. 감독의 죽음 뒤의 그녀는 당장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처지이다.


이제는 직업도, 집도, 돈도 없는 찬실. 더욱 슬픈 것은 사십이 다 되도록 연애 한 번 해 본적 없다는 것이다. 친한 배우이자 동생인 소피(윤승아 분)의 집에서 가사도우미를 하며 지내기로 한 그녀는 처음으로 ‘영화’라는 인생의 목표를 내려놓은 채, 자신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일 수 있는 기회를 가지게 된다.


멈춤의 미학(美學). 영화는 사십이 다 되어서야 자신에 대해 고민하기 시작한 순수한 영혼을 비추며, 우리에게 질문과 위로를 던진다. 아직 삶을 멈추어본 적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질문을, 이미 좌절과 멈춤을 경험하고 있는 사람들에게 위로를. 찬실을 보며 나만 그런게 아니었구나 생각한 건, 그 역시 나만 그런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돈도 직업도 잃은 찬실이의 역설적인 복(福)


이 영화를 만든 김초희 감독님은 ‘찬실이는 복도 많다’고 했는데 무엇이 그녀의 복일까 생각해보았다. 나는 찬실의 가장 큰 복 ‘자신이 전부라고 생각했던 그것이 멈추어진 것’이라고 감히 생각해본다. 만약 그것이 멈추어지지 않았다면 그녀는 여전히 의심없이 영화가 곧 그녀이고, 그녀가 곧 영화라고만 생각하고 살았을테니까.    

  

현대인들은  없이 내달리기만 하기 쉽다. ‘내가 하는 일’이 곧 ‘나’라고 생각하거나, ‘내가 만나는 사람들’이 ‘나’라고 생각하면서. 외부의 공기를 타고 들어오는 신호들에는 감각을 곤두세우지만 정작 자신의 내면에서 오는 신호에는 둔감하기 쉽다. 본디 내면 깊은 곳에서 오는 신호는 묵직하긴 하지만 스스로 민감하게 주파수를 맞추어야만 들을 수 있다. 앞으로 내달리는 사람에게 그러한 신호는 쉽게 잡히지도 않을뿐더러 조금씩 잡히더라도 묵살되기 쉽다.      


찬실은 자신의 삶이라고 믿었던 ‘영화’에 관한 이야기를 과거형으로 말하는 자신을 발견하며, 그녀의 삶을 다시 조망하게 된다. 그녀의 삶에서 ‘영화가 빠진 자리’에는 사실 아무 것도 없었다. 이러한 일은 우리에게도 충분히 일어날 수 있다. 전부인 줄 알고 전력투구하던 그것이 한낱 신기루처럼 멀어져갈 때, 우리는 어떻게 해야할까? 당장의 생계의 위협과 꿈을 상실한 안타까움이 우리를 엄습해올 때, 우리는 그 불안의 파도를 어떻게 맞이해야 할까? 영화는 무겁지 않은 톤으로 위기에 처한 우리의 모습을 따뜻하고 애정 어린 시선으로 비춘다. 복이 많은 찬실이처럼, 우리에게도 복이 쏟아지고 있는게 아닐까 하며.     


찬실에게 많이 감정이입을 하며 보았다. 나 역시 내가 전부인 줄 알았던 것들을 조금씩 떠나보내야 했던 적이 있었다. 하지만 떠나보내고 나면 그것은 사실 아무 것도 아닌 적이 더 많았다. 너무 과도하게 몰입했던 것이다. 내 삶을 정의하지 못하는 그것들에 너무 몰입한 나머지 그것이 ‘나’라고 믿어버렸던 것이다.  

    

마음대로 안된다고 복이 없나


김영(배유람 분)은 찬실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찬실이 가사도우미로 일하던 소피의 집에서 만나게 된 불어 과외 선생 김영(배유람 분)은 단편영화감독이지만 영화가 인생의 전부는 아니라고 말한다. 그는 찬실에게 ’사랑받고, 사랑하는 일이 그보다 더 중요하다‘는 것을 알려준다. 찬실이 세들어 사는 집의 주인 할머니(윤여정 분)는 ‘늙으면 하고 싶은 게 없어져서 좋다’고 말한다. 할머니의 말씀은 욕심을 다 걷어낸 초연한 모습이라기보다는 수많은 인생 풍파 속에서 원하는 것을 얻어도 곧 잃게 되는 것을 알게된 지혜로운 모습에 가까워보인다. 찬실에게 한글을 배워가며 한 자 한 자 써내려 간 할머니의 시는 찬실의 눈시울을 빨갛게 물들인다.     


사랑도 꽃처럼 다시 돌아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찬실이 세들어 사는 집의 주인 할머니(윤여정 분)는 ‘늙으면 하고 싶은 게 없어져서 좋다’고 말한다.


무엇 하나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는 우리네 삶. 무언가를 부여잡고자 애쓰지만 우리가 좇던 그 무언가들은 우리네 삶을 조롱이라도 하듯 휙 날아가곤 한다. 그 사이에 우리에게 녹아있던 복은 주인에게 발견되지도 못한 채, 서서히 빛을 잃어간다.      


'외로움'이 '사랑'이 아니듯


믿으려고 할수록 깨달아지지 않는 신앙처럼, 가지려고 할수록 멀어지는 그 사람의 마음처럼, 그 사람과 ‘잘 되지는’ 않더라도 ‘잘 지낼’ 수는 있는 것처럼, ‘아무거나’ 쓸 수는 있지만 ‘아무렇게나’ 쓰면 안되는 시처럼, ‘목말라서 꾸는 꿈’은 행복하지 않은 것처럼. 영화 속 찬실은 그동안 무엇인가를 얻기 위해 손을 뻗던 것을 멈추고, 그 손을 자신의 마음으로 가져가 쓰다듬기 시작한다. 마흔 인생동안 처음으로 타올랐던 사랑의 감정조차 사실은 외로움과 필요에 의한 감정이었음을 깨닫는다. ‘필요’와 ‘목마름’이 지배해오던 찬실의 삶은 점점 촉촉한 빗방울들이 들판을 적시듯이 윤기있게 물들어간다.       

‘필요’와 ‘목마름’이 지배해오던 찬실의 삶은 점점 촉촉한 빗방울들이 들판을 적시듯이 윤기있게 물들어간다.


잔잔하지만 힘이 있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20)


영화는 잔잔하지만 영화를 지나오고 나면 삶에 대한 새로운 관점을 얻을 수 있다. 삶의 원동력이었던 그것들이 어쩌면 ‘욕심’과 ‘필요’로만 가득 차 있지는 않았는지. 그러한 것들이 모두 사라져버렸을 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 인생은 빛이 날 수 있을는지.      


지금도 쉴 새 없이 삶의 여정을 내달리고 있는 많은 분들에게 이 영화를 추천한다. 더구나 외부적 상황들에 의해, 또는 스스로 내면적인 이유로 인해 달려오던 삶을 멈추게 된 분들은 이 영화를 꼭 보셨으면 좋겠다. 찬실(강말금 분)의 가감없는 부산 사투리와 순수하고 간결한 대사들에서 분명 위로와 생각지도 못했던 자신의 복을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잔잔하지만 힘이 있는 영화, '찬실이는 복도 많지'(김초희, 2020)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