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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07. 2021

'정인이 사건'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

SNS에 드러난 나 자신을 믿지 마세요

 '정인이 사건'이 더욱 가슴 아픈 이유


‘그것이 알고 싶다’에 나오기 전, 한 뉴스를 통해서 ‘정인이 사건’을 처음 접하게 되었다. 놀라웠던 것은 그렇게 학대를 일삼던 부모가 한 방송사의 입양 가족 소개 프로그램에 출연했다는 것이었다.      


그 입양 가족 소개 프로그램은 우리 나라에서 아직은 생소한 ‘입양’이라는 문화를 긍정적으로 소개하기 위한 프로그램이었고, 그 속에서 발견되는 이 가족은 특별한 행복을 누리며 입양을 ‘권장’하고 있었다. 

     

이들 부부의 겉과 속이 다른 이중생활은 가져오게 된 결과가 너무 참혹했다. 아무 죄도 없는 순수한 영혼의 죽음은 수많은 이들의 분노와 안타까움을 사기에 충분했다. 게다가 이들의 범죄를 막아낼 수 있었던 많은 기회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안전망이 민감하게 작동하지 못했고, 사실상 작동할 수 없었다는 것에 안타까움은 더욱 더 증폭되고 있다.      


며칠 동안 이 사건 때문에 마음이 아려왔다. 수많은 분들이 같은 마음이었을 것이다. 다만, 개인적으로 마음이 더 아팠던 이유는 이들의 범죄의 결과 때문만은 아니었다. 조심스럽지만 이들이 자란 기독교적 배경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고, 신앙인으로서 더욱 마음이 아팠던 것이 사실이다. 


양부와 양모, 그들은 안타깝지만 모두 목회자 가정의 자녀들이었다.


'사회적 시선'이라는 감옥이 만들어내는 비극


처음 기사를 접했을 때, 마음 속에 든 질문 한 가지, 


그들은 학대를 일삼으면서 어떻게 방송에 나올 생각을 했을까.      


흔히 목회자 가정에서 자라는 아이들에게서 보이는 딜레마가 있다. 바로 주변 사람들의 시선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목회자의 설교나 리더십만큼이나 교인들의 시선은 그들의 자녀들에게 집중되게 마련이다. 어쩌면 자연스러운 현상일 것이다. 자녀의 행보는 부모된 사람의 백마디 말보다 어쩌면 부모의 내면세계가 더 확실히 투영된 거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 시선은 그 어떤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얼음보다 차가울 수 있다. 특히나 내면의 영적인 변화가 일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단지 목회자의 자녀라는 것만으로 사회적 시선의 감옥에 갇히게 되면 그들에게는 선택의 폭이 크지 않다. 아예 비뚤어진 일탈의 길을 걷거나 아니면 자신의 겉모습을 사회적 시선에 맞추거나.      

아이들의 입장에서 이 시선은 그 어떤 칼날보다도 날카롭고, 얼음보다 차가울 수 있다.


필자는 전자의 선택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정서적으로는 적어도 건강한 반응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내면에 솔직하게 응답한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신의 내면에는 여전히 죄악이 득시글거리고 있는데 사회적으로 ‘연기할’ 것을 요구받고 있다면 이들에게는 용기있게 거절할 권리가 필요하다. 그 권리가 보장이 되면 일탈까지 가지 않을 수도 있다. 어찌되었든 전자의 경우라면 겉으로 문제가 터져나왔기 때문에 주변에서 상황을 알고 처방을 내릴 수 있을 것이다. 목회자의 평판은 조금 흠결이 생길 수 있겠지만 말이다.      


하지만 후자의 경우, 오히려 문제가 심각하다. 내면적인 변화 없이 속한 사회에서 요구되는 표면적인 덕목을 하나 둘 씩 연습해나가기 시작하면 주변에서 이들의 내면의 부패를 알 길이 없다. 뇌에서 터진 피가 외상으로 인해 밖으로 터져나오면 병원에 이송할 수 있지만, 안에서 터지면 주변 사람들이 인지하지 못해 골든 타임을 놓치곤 한다. 마찬가지이다. 이들의 연기는 반복될 수록 수준급에 이르며, 많은 사람들을 속일 수 있다. 꼭 교회에서가 아니더라도 이렇게 자란 사람들이 사회적으로 어떤 리더의 자리에 올라가 있는지 우리는 알 길이 없다. 영적인 근본이 없이 도덕적인 행동 양식으로 칭찬과 인정이 반복된 참혹한 결과가 어쩌면 이제야 드러난 것일지 모른다.      


SNS에 드러난 나 자신을 믿지 마세요


한 가지 자명한 사실은 '조건 없이 충분히 사랑받은 아이가 착한 아이가 된다'는 것이다. 착한 행동의 근본은 마음 속 깊은 곳에 있을 것이다. 그 깊은 곳은 오로지 사랑만이 터치할 수 있는 곳이라고 생각한다.     


착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마음을 만지지 않고, 착한 행동을 했을 때마다 칭찬하는 방식은 자칫 ‘착한 척 하는’ 아이를 만들 위험을 초래한다. 이번 사건의 가해자들은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입양을 주변에 알렸고, SNS와 방송을 통해 자신들이 얼마나 ‘착한 사람’인지를 과시했다. 쇼 윈도우를 통해 보는 그들의 삶은 행복해보였고, 범죄자들을 다루는 사회적 안전망이 작동되기에는 그 겉모습이 너무나 사회적으로 '전형적'이며 ‘착했던’ 것이다. 어쩌면 범죄를 저지른 본인들조차도 스스로를 굉장히 오랫동안 속여왔기에 악행이 만천하에 드러난 지금의 상황이 납득되지 않을 수도 있다.

착한 아이를 만들기 위해서 마음을 만지지 않고, 착한 행동을 했을 때마다 칭찬하는 방식은 자칫 ‘착한 척 하는’ 아이를 만들 위험을 초래한다.

           

범죄를 저지른 그들 부부의 동기가 어떤 것이었는지 우리로서는 정확히 알 길은 없다. 그리고 필자가 제시한 성장 배경이라는 전제 자체가 맞지 않을 수도 있다. 가해자들의 개인 서사 때문에 그들을 애써 이해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다만, 그들이 자란 사회적 배경에 대해 깊이 고민해본 사람으로서 적어도 돌아볼 기회가 있을 때 반성하는 것이 맞겠다 싶어 마음 서랍 속 고민을 꺼내 본다.       


이번 사건을 계기로 나 자신과 주변을 돌아보는 것은 어떨까. 

혹시 마음의 깜냥도 안 된 채로 착한 연기를 하느라 애쓰고 있는 존재들이 있는지. 

혹은 나 자신조차 마음의 변화 없이 사회라는 쇼 윈도우에 나를 진열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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