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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22. 2021

'썰매'는 '사랑'을 싣고

알프스도 부럽지 않던 우리 동네 썰매 맛집

여보, 눈 와요!


아이들이 잠든 깊은 밤, 거실 창문 밖으로 눈발이 날리기 시작하는 것 같더니 어느새 눈이 펑펑 내리고 있었다. 눈은 순식간에 바닥을 소복이 채워나가 깊은 밤을 하얗게 밝혔다. 


아내와 창 밖을 바라보며 자연스레 추억들을 떠올렸다. 아이들이 태어나기 전, 둘이 살던 신혼집 밖에 나와서 내리는 눈을 손으로 받아내던 때가 생각났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어느새 3,000일을 같이 살아낸 부부가 되어있었고, 우리의 슬하에는 제법 부모의 마음까지 헤아릴 줄 아는 아이들이 있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는 어느새 3,000일을 같이 살아낸 부부가 되어있었고, 우리의 슬하에는 제법 부모의 마음까지 헤아릴 줄 아는 아이들이 있었다.


사실 눈 예보가 있기 전부터 아내와 나는 이 날을 위한 소소한 준비를 해 왔다. 이번 겨울, 이미 한 차례 폭설로 겨울왕국을 경험했던터라 이런 ‘기회’를 그냥 흘려보내서는 안된다는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대한민국에서 이렇게 하얀 세상을 경험할 수 있는 것은 우리에게는 너무나 귀한 기회였다.


전에 눈이 내리던 날, 나는 종이 박스에 포대를 덧댄 썰매를 떠올려서 당장이라도 아이들을 태워볼 심산이었다. 내가 살던 재개발이 되기 전 서울의 산동네, 눈이 오면 동네 조무래기들은 포대를 깔고 눈썰매를 타곤 했다. 평소에도 숨이 찰 정도로 경사가 급했던 우리 동네는 눈이 오는 추운 날이면 멋진 썰매장으로 변하곤 했었다. 급한 경사만큼이나 썰매장급의 어마무시한 스릴을 느낄 수가 있었는데, 그보다 더한 스릴은 옆집 아줌마의 꾸지람을 피해 도망다니는데 있었다. 다 쓴 연탄을 부수고, 길에 뿌려서 길을 미끄럽지 않게 만들어야 하는데 우리의 썰매 주행 때문에 산동네의 보행로는 맨들맨들해져버리기 십상이었던 것이다. 빗자루를 들고 우리를 꾸짖던 옆집 ‘강진이네 엄마’의 표정과 목소리는 꿈에 나올 정도로 너무나 무서웠다.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배가 불룩 나온,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태교에 전념해야 했을, 귀한 임산부이셨던 것인데 스트레스를 받게 해드려서 참으로 죄송하다.  


아내는 '포대 썰매'보다는 중고거래 사이트를 통해서 진짜 ‘썰매’를 알아보자고 제안했다. 생각해보니 굳이 21세기의 우리 아이들을 ‘80년대 스타일’로 놀게 할 필요는 없지 않은가? 나의 추억은 나의 추억으로 남기기로 했다.


아내는 제안한지 며칠만에 의기양양하게 빨간 눈썰매를 양쪽 팔에 끼고 나타났다. 어떻게 어마어마한 경쟁률을 뚫고 썰매를 구했느냐고 나는 동그란 눈을 하고 물었다. 실제로 우리 지역 OO마켓에 올라오는 썰매라는 썰매는 올라오기가 무섭게 ‘예약 중’으로 변해버렸다. 예년과 다르게 눈이 많이 오면서 우리 같은 부모님들의 구매가 폭증했기 때문이다. 일년에 한 두번 타는 썰매를 새 상품으로 구매하는 것은 가성비가 떨어지므로 중고거래에서 ‘썰매’는 최고의 인기상품이 되어버린 것이다.

  

어떻게 그 경쟁을 뚫고 썰매를 살 수 있었는지에 대한 아내의 답변은 이러했다. 구매대기자들은 보통 ‘키워드 알람’을 해놓는다. 알람이 울리자마자 수많은 대기자들은 구매의사를 표현하게 마련이다. 따라서 우리는 보통 한 발 늦을 수 밖에 없는데, 아내가 연락한 판매자는 상품의 키워드를 ‘썰매’가 아니라 ‘눈썰매’로 올려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다가 '눈썰매'를 찾던 아내의 '눈썰미'에 포착되어 1순위로 채팅을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다 그렇게 방법은 있는 것인가보다. 경쟁이 치열할 때, 살짝만 눈을 돌리면.


그렇게 아내가 크리스마스 같은 빨간 썰매를 들여온지 이틀도 안되어서, 한 밤 중에, 우리는 다시 폭설을 맞이하게 된 것이었다. 아침에 눈을 뜨고 나면 아이들이 얼마나 좋아할지 상상하며 우리는 기분 좋게 잠이 들었다.


다음 날 아침, 우리 네 식구는 단단히 무장을 했다. 그리고 비료 포대가 아닌 진짜 썰매를 양쪽 어깨에 걸쳐매고 집을 나섰다. 그 옛날 바이킹들의 후예 같기도 하고, 어벤져스 같기도 한 우리의 모습에 아내와 나는 서로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그 옛날 바이킹들의 후예 같기도 하고, 어벤져스 같기도 한 우리의 모습에 아내와 나는 서로를 보면서 피식 웃었다.


아파트 현관을 나서면서부터 이미 발목을 덮는 눈이 쌓여있었다. 그나저나 썰매를 타려면 옛날 내가 살던 동네 같은 비탈이 있어야 하는데 우리 동네에는 그런 코스를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그러면 어떠랴. 이미 동네는 알라스카 안 부러운 설원이 되었는데. 평지에서도 쭉쭉 미끄러지는 썰매가 있지 않은가. 아내가 구해온 눈썰매는 멋진 운송수단이 되어 아이들을 멋진 산타클로스로, 나를 힘좋은 루돌프로 만들어주었다.

아내가 구해온 눈썰매는 멋진 운송수단이 되어 아이들을 멋진 산타클로스로, 나를 힘좋은 루돌프로 만들어주었다.

썰매를 끌고 설원을 다니다보니 이미 아파트의 썰매 동지들이 몇몇 보였다. 평소에 다니지 않던 아파트의 울타리 경계 부분의 경사로는 짧지만 훌륭한 썰매장이 되어 주었다. 리프트도 계단도 없지만 아이들은 스스로 그 언덕을 올라 스스로 미끄러져 내려왔다. 내려오는 아이들을 밑에서 바라보니 어느새 너무 많이 커버린 녀석들의 모습 때문에 알 수 없는 복받치는 감정이 올라왔다. 한 손에 꼬물꼬물 놓여지던 아이들이 언제 이렇게나 많이 컸을까. 아빠, 엄마의 도움을 통하기보다 스스로 해보고자 하는 녀석들의 몸짓 하나하나가 감사하면서도 아쉽다.

내려오는 아이들을 밑에서 바라보니 어느새 너무 많이 커버린 녀석들의 모습 때문에 알 수 없는 복받치는 감정이 올라왔다.


돌아오는 길, 아들은 엄마와 여동생이 탄 썰매를 자기가 끌어주고 싶다고 했다. 그리고는 힘껏 달리기 시작했다. 긴 머리를 휘날리며 달리는 아들의 모습이 얼마나 멋있게 보이던지. 그리고 그보다 더 무거운 아빠까지 힘차게 끌어주었다. 아들이 끌어주는 썰매를 막상 타보니 생각보다 훨씬 빠르고 재미있었다. 그렇게 우리가 무심코 지나던 일상의 장소는 알프스 부럽지 않은 추억의 명소가 되어가고 있었다.


오늘 집을 나오니 이번에는 보슬보슬 비가 내리고 있었다. 영상의 온도는 비에 가득 담겨 굳어있던 눈덩이들을 조금씩 녹여내고 있었다. 어느새 우리의 썰매장은 평소의 잔디로 돌아왔고, 눈사람들은 형체를 알 수 없는 눈덩이로 변해버렸다. 며칠동안 경험했던 얼음왕국이 사르르 녹아내리는 것을 보면서 우리의 인생도 이와 같지 않을까 생각해보았다.


영원할 것 같던 것들도 결국 변하고, 사라진다는 것. 하지만 그 속에서 우리가 서로 사랑하던 기억은 마음에 남았다. 창 밖의 하얀 세상은 이제 없지만 그 세상 속에서의 추억은 이제 이 글 속에 저장되고 있다.


세상은 눈이 녹듯 변하지만, 사랑은 영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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