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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Dec 04. 2018

영화 '바울', 우리에게 안부를 묻다


기독교 콘텐츠, 휴매니티와 배타성의 평행선 속에서 


나는 기본적으로 기독교 영화가 나왔다고 해도 크게 달가워하는 편은 아니다. ‘영화’라고 하는 것은 구조적으로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무엇인가를 첨가하지 아니하면 그 태생(胎生) 자체가 불가하기 때문이며, 반대로 사람들이 좋아할만한 무엇인가를 첨가하지 아니한 영화의 경우는 예배당 스크린에만 걸릴만한 작품들이 많아 굳이 세상에 나와 스크린에 걸릴 이유를 찾지 못하고 ‘그들만의 리그’로 표류하게 되기 때문이다.
전자는 인본주의적 가치관이 스며들기에 크리스챤들에게 해롭고, 후자는 교회 바깥의 귀한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에 이 두 극단이 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라도 나는 기독교 영화가 개봉되면 꼭 찾아가 보는 편이다. 마치 임금님이 식사하기 전에 독이 들었는지 먼저 음식을 혀에 찍어 보던 신하의 마음이라고나 할까?(물론 신하는 그러도록 임명받았지만 나는 아무도 임명한 적이 없다.)


바울 개인보다 크리스챤 공동체에 더 집중한 영화


영화 ‘바울’은 로마 네로 황제 치하에서의 크리스챤들의 삶을 조명하고 있다. 주인공은 로마 감옥에 갇힌 바울이지만 그의 자서전이나 위인전 같은 느낌은 결코 아니다. 영화 속에는 바울과 함께 천막을 치며 동역했었고, 영화의 현재 시점에서는 로마에서 크리스챤 공동체를 이끌고 있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 부부가 함께 등장한다. 그리고 눈이 좋지 않았던 바울을 도와 목숨을 걸고 감옥에 입회하여 그의 기록을 대필했던 의사 누가도 등장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네로의 압제를 피해 모여살던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비중 있게 등장한다. 성경인물과 가상인물들이 공존하며, 성경과 전승, 상상력이 모두 집결되었다.  


영화의 두 가지 시점: 바울의 플래시백과 로마의 교회 공동체


영화는 크게 두 가지 시점을 함께 보여준다.
첫 번째는 죽음을 앞둔 바울의 자전적인 고백 속에 나타나는 그의 삶이다. 그가 신봉하던 유대인 율법에 입각하여 주의 형제 자매들을 처단하던 기세등등하고 젊은 사울의 모습, 스데반을 주동해서 처형하는 모습, 다메섹으로 가던 길에서 예수님의 음성을 듣고 회심하던 모습, 아나니아를 만나 눈이 뜨이는 모습 등이 영화의 중간중간에 플래시백으로 등장한다. 누가는 노인 바울의 이야기를 받아적는다. 그 기록이 곧 ‘사도행전’이라고 영화는 서술하고 있다.
두 번째는 영화의 시점에서 ‘현재’ 벌어지고 있는 크리스챤 공동체의 삶이다. 네로 황제는 로마 대화재의 주범을 ‘크리스챤’들로 지목했고, 이러한 연유로 크리스챤들은 로마 콜로세움에서 야수들의 밥이 되거나 거리의 가로등에 매달린채 화형당한다. 브리스길라와 아굴라가 이끄는 크리스챤 공동체는 음지에서 비밀 결사대와 같이 존재하면서도 로마의 고아와 과부를 돌보는 것을 기뻐하는 공동체이다. 또한 이들은 세상(로마)에서 복음적인 삶을 살다가 억울한 핍박을 받고 상처받은 크리스챤들을 영적·육체적으로 돌보는 역할을 감당한다.


영화 속에서 만나는 세상과 교회의 접점


영화 ‘바울’은 답보다 질문을 던진다. 로마의 핍박을 당하던 크리스챤들의 고뇌는 비단 그 시절만의 고민은 아니기 때문이다.
로마는 역대 가장 강력했던 ‘세상’이다. 하나님은 그런 세상을 사랑해서 독생자를 주셨다. 그렇기에 로마의 크리스챤 공동체는 그들에게 처참하게 처형을 당하면서도 로마를 사랑했고, 사랑해야만 했다. 영화 속 스데반은 저들의 죄를 저들에게 돌리지 말라며 돌에 맞아 숨졌다. 영화 속 브리스길라는 하나 둘씩 로마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상황 속에서도 떠나지 않고 로마를 지키고자 한다. 왜냐하면 그녀는 로마를 사랑하라는 사명을 받았고, 동료를 잃는 슬픔 속에도 여전히 그것을 ‘즐거워했기’ 때문이다.
물론 모두 같은 마음으로 그려지는 것은 아니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로마교회의 청년, 카시우스는 로마의 압제에 보복하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고 몇몇 청년들과 실행에 옮긴다. 그가 처음으로 시도한 것은 감옥에 갇힌 사도 바울과 누가를 꺼내는 것이었다. 하지만 바울과 누가는 간수들을 칼로 베고 찾아온 카시우스를 안돈시키며 말한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미 모든 적을 물리치고 승리하셨다” 바울의 선한 싸움은 칼로 이루어내는 성질의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로 이미 승리한 싸움이었다.


교회가 세상을 대하는 태도에 관하여 던지는 질문들


영화 속에 네로는 한 번도 등장하지 않는다. 로마를 대표해서 나오는 이는 로마의 장군이며 바울이 갇혀 있는 감옥의 기관장이기도 한 ‘모리셔스 갈라스’라는 인물이다.(성경에 등장하는 인물은 아니다.) 영화 속에서 사도 바울과 누가가 가장 많이 만나는 ‘교회 밖의 사람’이며 ‘세상’이며 ‘권력’이기도 한 그이지만 그에게는 정체모를 병으로 죽어가는 딸이 있다.
로마를 대하는 브리스길라의 태도와 함께 모리셔스를 대하는 바울의 태도가 나는 이 영화의 백미라고 생각한다. 원조 ‘전도왕’, 교회 개척의 선구자 바울이라면 과연 예수 안에 있지 않은 사람을 어떻게 대했을까.
모리셔스의 딸이 정체불명의 병으로 죽어간다고 했을 때, 사도 바울은 기적적인 방법을 통해 그의 마음을 살 수도 있었겠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사람의 목숨은 하나님께 달린 일이며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사람을 영원히 살리는 복음을 이야기하는 것 밖에는 없다고 한다. 하지만 자신의 동역자, 누가가 실력있는 의사라며 그를 추천한다. 누가가 브리스길라의 지원을 받아 모리셔스의 딸을 치료했을 때, 사도 바울은 누가에게 말한다. 그가 누가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느꼈을 것이라고. 그것이 바로 복음 아니겠냐고.
영화 속 사도 바울은 감옥의 최고 권력자의 딸을 살린 은인이었지만 그에 상응하는 거래를 하지 않는다. 딸은 살았고, 바울은 죽는다. 그는 죽음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선한 싸움을 잘 싸웠으며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다. 그는 죽음도 유익하다고 여겼다.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바울, 우리에게 안부를 묻다


그 때의 교회 공동체는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다 상한 몸과 마음으로 찾아오는 ‘야전병원’과도 같았고, 핍박하는 존재조차 사랑하고자 노력했던 공동체였다. 지금의 우리는 어떠한가? 세상에서 선한 싸움을 싸우는 것이 아니라 혹 우리끼리 싸우고 있지는 않은가? 무신론자는 커녕 신앙에 관심이 있는 사람조차도 진입장벽이 높은 집단이 되어 있지는 않은가?
크리스챤들은 죄인 되었을 때, 아무 개연성 없이 위로부터 사랑을 받은 사람들이다. 진정 그리스도를 닮아가고자 한다면 세상과의 접점에서 진정 고민해보아야 할 것이다. 영화 속 브리스길라가 어떻게 로마를 사랑했는지, 바울이 어떻게 선한 싸움을 마쳤는지를 보면 그 고민의 실마리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영화 ‘바울’이 철저한 고증을 거쳤다고 하나 성경을 복사본처럼 그대로 옮겨놓은 작품은 아니다. 가상의 인물과 상상력이 덧입혀진 스토리들이 등장하는 것도 다른 영화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 다만 중요한 것은 그 영화의 중심부에 복음의 핵심이 주인공들의 삶을 타고 흐른다는 것이다. 세상을 사랑하여 아들을 주신 그 분의 마음을 닮고자 몸부림쳤던 당시 크리스챤들의 삶을 되돌아보며 지금 나의 신앙과 공동체는 어떠한지 안부를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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