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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y 15. 2019

'기적(Miracle)'은 어디에나 있다

발견하는 사람들이 적을 뿐이다

딸의 실명 위기 앞에 무릎 꿇던 아버지


오랫동안 한국의 대표적인 지성으로 여겨져 온 이어령 박사. 그는 타고난 지성이자 전형적인 무신론자였다. 그리고 딸을 향한 가득한 사랑의 마음은 있었지만 그가 생산해내는 문장 속에 파묻혀 딸의 어린 시절을 그다지 함께 하지 못했던 그 시대의 전형적인 가장이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신앙을 가지게 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딸, 민아 씨에게 임했던 고통과 치유를 통해서였다.

고(故) 이민아 목사와 이어령 박사

사랑하는 딸이 실명 위기에 놓인 것을 알았을 때, 이어령 박사는 그동안 없다고 주장해왔던 초월적 존재를 붙잡고 무릎을 꿇는다. 그가 70대를 살아가던 때의 일이다.


민아가 어제 본 것을 내일 볼 수 있고, 오늘 본 내 얼굴을 내일 또 볼 수만 있게 해주신다면 저의 남은 생을 주님께 바치겠나이다.
이어령, ‘지성에서 영성으로’ 中에서


민아 씨의 눈의 병변을 지켜보아왔던 의사의 표현에 의하면 이것은 치유라기보다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 같다고 했다. 이 기적을 바라본 이어령 박사는 그 초월적 존재와의 약속대로 믿음의 길로 들어서게 되고, 2007년 7월 세례를 받게 된다. 그리고 채 한 달이 지나지 않아 민아씨의 큰 아들 유진 군이 갑작스레 코마(comma) 상태에 빠지고는 19일만에 세상을 뜨게 된다. 그 때, 유진 군의 나이 스물 여섯이었다.


삶은 우리의 의지대로 흘러가는 것 같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건강할 때는 알 수 없지만, 혹 몸이 아파서 병원에라도 가게 되면 본인의 의지와 다르게 힘겨운 투병을 하는 이들을 만날 수 있다. 연세가 많으신 분들이 주를 이루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어떤 아이들은 세상을 보기도 전에 아무런 이유도 없이 나타나는 원인 모를 희귀 질환이나 난치병에 신음하기도 한다. 


일상을 살아갈 때 우리는 이성적으로 판단하고, 그 동안의 사례들을 근거로 합리적인 판단을 하는 것만이 올바른 길이라고 여기며 살아가곤 한다. 하지만 깊이 생각해 보면 꼭 투병 생활 뿐 아니라 우리의 일상조차도 ‘기적’이 없이는 살아갈 수 없다. 이어령 박사 가정 뿐 아니라 기적을 삶에 적용하는 모습을 보여준 또 다른 가족의 이야기가 바로 여기에 있다.



미라클 프롬 헤븐(Miracles from Heaven)의 줄거리


딸만 셋인 미국 텍사스의 평범한 가정의 실화, 

페트리시아 리건 감독의 카메라가 비춘 그들의 이야기를 전하자면 다음과 같다.

딸만 셋인 미국 텍사스의 평범한 가정의 이야기

(이 후부터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가정의 둘째 딸인 애나벨(카일리 로저스 분)에게 예상치 못한 불치병이 닥친다. 이 병원, 저 병원에 가보지만 특별한 원인을 알 수 없다는 피드백 뿐이다. 극심한 고통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방향으로 언 발에 오줌 누는 식의 치료만 할 뿐이다. 지역의 병원에서 이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자라고 알려진 보스턴의 누코벨 박사를 추천 받지만 9개월이나 진료 예약이 밀려있는 탓에 얼굴 한 번 보기도 쉽지 않다.

이 가정의 둘째 딸인 애나벨(카일리 로저스 분)에게 예상치 못한 불치병이 닥친다.


결국 둘째 딸을 데리고, 3시간이 넘는 거리인 보스턴으로 무작정 떠나는 엄마 크리스티(제니퍼 가너 분). 하지만 전 세계의 온갖 희귀 질환을 가진 어린이들이 몰리는 그 병원에서 애나의 상황은 그리 특별하지 않다. 병원의 방침 상 예약을 하지 않은 손님은 사정이야 어찌됐든 발걸음을 돌려야 한다. 

그렇게 처량하게 기회를 얻지 못한 모녀는 보스턴의 한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게 되는데, 그 때 종업원으로 일하던 엔젤라(퀸 타리파 분)이 나타난다. 그녀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모녀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 본인의 시간적, 경제적 사정도 여의치 않지만 모녀의 보스턴 여행 가이드를 자처하게 된다.

그녀는 초면임에도 불구하고, 모녀에게 마음을 열고 다가온다.


그러던 중, 누코벨 박사에게 진료할 수 있는 시간이 생겼다는 연락을 받은 모녀는 그 때부터 보스턴 어린이 병원에서의 생활을 시작한다. 하지만 전 세계적인 명의 누코벨 박사조차 아이의 완치는 불가능하다는 소견을 보이고, '그저 그녀의 고통을 줄이고, 삶의 질을 높이는 선택을 할 수 밖에 없다'고 말한다.

그렇게 모녀의 외로운 투병생활이 시작되고, 애나는 룸메이트, ‘헤일리’라는 여자 아이를 만나게 된다. 

소망(所望), 

죽음의 문턱에 있는 두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단어이지만 애나는 죽음 앞에서도 '신(神)이 자신과 함께 하신다'는 믿음이 있다는 것을 담담하게 그녀의 룸메이트에게 이야기한다. 헤일리는 그녀의 말에 조금씩 마음을 열기 시작하고, 헤일리의 아버지는 헛된 희망을 심어주지 말라며 애나의 엄마에게 경고하기도 한다.

결국 병의 완치를 하지 못하고, 고향에 돌아온 애나는 우울한 하루하루를 이어가다가 언니의 제안으로 예전에 자주 오르던 집 앞의 큰 나무에 올라가게 된다. 상쾌한 나무 위의 공기를 마시던 것도 잠시, 애나는 사고로 건물 3층 높이 나무의 텅텅 비어있는 안 쪽으로 추락하게 된다. 

상쾌한 나무 위의 공기를 마시던 것도 잠시, 애나는 사고로 건물 3층 높이 나무의 텅텅 비어있는 안 쪽으로 추락하게 된다.


극적으로 구조가 되어 의식을 회복하게 된 애나. 그런데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녀의 불룩했던 배가 서서히 들어가기 시작하고, 그녀는 활력을 되찾기 시작한다. 모두가 비관적이었던 그녀의 난치병은 마치 그 증상이 없었던 것처럼 완쾌된다. 누코벨 박사조차도 설명하지 못하는 그녀의 상황이지만 애나는 자신에게 일어난 변화에 대해서 누구보다도 자신있게 설명할 수 있다. 그것은 누구에게나 통용될 수 없는 초월적 영역의 이야기이다. 

'애나벨'의 다섯 식구들의 실제 모습



이천년 전, 이스라엘의 한 젊은이도 '기적'을 행했었다


이천년전, 이제 겨우 서른을 넘긴 한 젊은이가 물로 포도주를 만들고, 떡 다섯 개와 생선 두 마리를 가지고 오천명을 먹였다는 소식이 파다하게 퍼졌다. 게다가 날 때부터 보이지 않던 사람이 보게 되는 일도 있었고, 심지어 죽어서 냄새가 나는 사람을 다시 살리기도 했다. 하루는 한센병 환자들 열 명을 한 번에 고친 일도 있었다. 그 젊은이는 스스로 이 세상을 지으신 창조자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기적을 경험했다고 해서 모두 그 젊은이를 따르거나 신뢰했던 것은 아니었다. 병이 나았던 열 명 중 그 젊은 이에게 감사를 표현했던 사람은 단 한 사람 뿐이었다. 벳세다의 바닷가에서 젊은이의 이야기를 듣고, 삶이 변화된 사람들도 있었지만 빵과 물고기로 배를 채우고 돌아간 사람들이 훨씬 더 많았다. 

눈에 보이는 기적은 일어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기적, 그 젊은이가 기대했던 내면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채, 열 두 바구니에 그득하게 남은 음식들이 있을 뿐이었다. 

눈에 보이는 기적은 일어났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본질적인 기적, 그 젊은이가 기대했던 내면의 변화는 일어나지 않은 채, 열 두 바구니에 그득하게 남은 음식들이 있을 뿐이었다.



영화가 해석한 '기적'의 의미


미라클 프롬 헤븐이 좋았던 이유는 이 영화가 ‘기적’의 의미를 다르게 해석했다는 점이었다. 신자들이라 할지라도 많은 경우에 기적의 의미를 자신의 욕망에 투명시키기 쉽다. 내가 바라는 일들을 신의 능력을 통해서 성취하는 식의 간증들이 넘쳐나는 시대이다. 이러한 류의 이야기들은 신앙 공동체의 진입장벽을 더욱 더 높게 만든다. 공동체 밖 사람들의 눈에 그들의 성공 스토리는 ‘그들만의 리그’에서나 통용되는 이야기로 여겨지기 쉽다.

영화는 애나의 병이 나았기 때문에 하나님이 계시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풀어가지 않는다. 오히려 영화 말미에 등장하는 헤일리(애나의 룸메이트)의 영적 회심과 죽음의 문제를 꺼내며 사실 '병이 낫고, 안 낫고의 문제'가 본질이 아님을 보여준다. 

병을 대하는 애나의 '신을 향한 믿음의 태도'가 '병이 낫는 결과'보다 훨씬 값진 '기적'임을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자신의 고통을 감내하는 것조차 힘든 상황에서도 자신의 옆 친구의 죽음에 대한 두려움의 시간을 함께 했던 것. 무엇보다 자신이 속한 가정 안에서 뜨겁게 사랑하기를 멈추지 않았던 것은 병이 낫는 것보다도 훨씬 더 값진 열매 아니었을까.

영화 말미, 애나의 엄마 크리스티의 이야기를 통해 애나의 병을 둘러싼 이웃들의 사랑 역시 '기적'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9개월이나 예약이 밀려있는 상황에서 하루 만에 보스턴 어린이 병원에서 연락이 왔던 것도 자신의 고용 안정을 뒤로 하고, 병원에 담대하게 모녀의 상황을 알렸던 직원의 배려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사람이 붐비는 대도시 레스토랑의 종업원이 자신들에게 하루를 온전히 내어주었던 것도, 신용카드가 모두 연체되어 보스턴으로 날아올 수 없었던 아빠와 두 딸이 누군가의 도움으로 비행기를 탈 수 있었던 것도, 그렇게 보스턴에서 다섯 식구가 재회할 수 있었던 것도, 모두 기적의 연속이었음을 깨닫게 된다. 아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배려하고 소망의 끈을 놓지 않도록 끝까지 노력한 누코벨 박사의 사랑도 기적이었다. 

아이의 마음을 섬세하게 배려하는 박사의 사랑이 애나가 소망의 끈을 놓지 않을 수 있도록 했던 것도 기적이었다.


'Miracle' is everywhere


크리스티(제니퍼 가너 분)는 이 모든 것들을 사람들 앞에 꺼내놓으며, 결국 우리가 서로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 바로 ‘기적’임을 이야기한다. 그녀의 이야기는 그렇게 신유(神癒)의 주제를 뛰어넘는다. 우리가 사랑의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일상의 모든 순간들이 사실 기적이었음을 우리 모두에게 알리는 것이다.   


사실 기적은 언제, 어디에나 있다. 

다만, 그 기적을 발견하는 사람들이 적을 뿐이다.


기적을 보여주는 것보다

기적의 의미를 다시금 생각하게 하는 영화,

'미라클 프롬 헤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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