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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15. 2020

'너한테 어울리는 일을 해~'

영화 '시동'을 '노동'의 관점으로 해석하다

먹고 살기 위해서


누구나 먹고 살기 위해서는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일을 해야한다. 지금 이 시간에도 인력이 필요한 사람들과 먹고 살아야 하는 사람들의 만남이 수많은 구인 사이트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꿈이 있는 사람이라도 당장의 추위를 피하기 위해서는 옷이 필요하다. 그리고 하루에 적어도 한 번 이상은 먹어야 우리의 신체를 유지할 수 있으며, 자신의 몸을 누일만한 조그마한 공간이라도 있어야 비로소 자신이 원하는 바를 추구할 여력이 생기는 것이다.  


삶이 무거운 청춘들의 영화, 시동


2019년 12월 개봉한 영화, ‘시동’은 이렇듯 고단한 삶의 무게를 지고 살아가는 청춘들을 비춘다


택일(박정민 분)과 상필(정해인 분)은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삶의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한 친구이다. 

택일(박정민 분)과 상필(정해인 분)은 어린 시절부터 같은 동네에서 자라며 삶의 거의 모든 것을 공유한 친구이다.


택일(박정민 분)은 오로지 자신만을 걱정하는 엄마와 살지만 잘 소통이 되지 않는다. 사랑은 받지만 존중은 받지 못한 채, 매일 전직 배구 선수인 엄마의 불꽃 싸대기만 받아내던 택일은 어느 날 아무런 준비 없이 고속터미널 매표소로 가서 말한다.  


만원으로 갈 수 있는데 하나요


아무 대책도 없지만 ‘가다보면 어떻게든 되겠지’라고 생각하는 그의 패기 하나는 일품이다. 그렇게 그가 탄 버스는 처음 가 보는 도시, 군산에 그를 내려준다. 그는 정처없이 발길 닿는대로 걷다가 배고픔이 안내하는대로 ‘장풍반점’에 들어가서 식사를 하게 된다. 그 곳에서 숙식을 제공하는 아르바이트 자리가 있다는 것을 알게된 택일은 심상치 않은 포스를 풍기는 거석(마동석 분)과 구만(김경덕 분), 공사장(김종수 분)과 뜻밖의 진정한 ‘사회생활’을 시작한다. 며칠 못 버틸 것 같았던 그는 동료들의 삶의 태도를 서서히 배워가며 결국 첫 ‘월급’을 손에 넣게 된다.

며칠 못 버틸 것 같았던 그는 동료들의 삶의 태도를 서서히 배워가며 결국 첫 ‘월급’을 손에 넣게 된다.


상필(정해인 분)은 자신도 못 알아본 채로 매일 밤을 까고 있는 할머니가 못마땅하다. 구질구질한 것 싫고, 쉽고 멋있게 돈을 벌고 싶었던 그는 평소 알고 지내던 동화(윤경호 분)를 따라 사채업에 뛰어들게 된다. 생각보다 어려움 없이 적응해나가던 그는 시간이 갈수록 자신이 하는 일들이 어려운 사람들을 더욱 괴롭히는 일이라는 것을 알게 되지만, 그것 역시 사회생활의 일부라고 여기며 적응하기 위해 애를 쓴다.

상필은 평소 알고 지내던 동화(윤경호 분)를 따라 사채업에 뛰어들게 된다.


또 한 명의 주요 인물은 바로 거석(마동석 분)이다. 식당의 핵심역량은 맛, 맛을 책임지는 것은 주방, 그 주방에서 웍을 잡는 그는 누가 뭐래도 장풍반점의 핵심멤버이다. 그렇지만 뭔가 이상하다. 단발머리와 트와이스의 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 번 펀치를 날리면 기본 6시간은 기절시키는 그의 핵주먹은 보통 사람의 것은 아니다. 영화 말미에 장풍반점에 들어온 택일을 괴롭히는 포주들을 한 방에 때려눕힌 일로 경찰서에 가게 되는데 경찰이 전설의 조폭인 그를 알아보면서 그의 정체가 드러나게 된다. 이 소문을 듣고 찾아온 조폭 후배 태성(박해준 분)은 ‘거석의 자리’는 ‘주방’이 아니라며 지금 당장 조직에 해결해야 할 현안이 있으니 복귀를 해야 한다고 거석을 설득한다.

단발머리와 트와이스의 춤은 그렇다 치더라도 한 번 펀치를 날리면 기본 6시간은 기절시키는 그의 핵주먹은 보통 사람의 것은 아니다.


영화 '시동', 삶을 노동으로 물들이는 사람들


영화는 이렇게 쉽지 않은 삶을 ‘노동’으로 물들이고 있는 여러 사람들을 보여준다. 장풍반점의 주방·서빙·배달, 사채업자들의 이자와 원금의 회수, 그 과정 속에서의 협박과 폭행, 택일 엄마(염정아 분)의 토스트 집 등 그 종류도 다양하다. 

영화는 그 흔한 ‘백수’ 한 명을 등장시키지 않는다. 하다못해 경주(최성은 분)의 룸메이트인 단역들마저도 룸싸롱에서 일을 한다. 어쩌면 이러한 설정마저도 현실과는 동떨어진 것일 수 있다. 2020년의 대한민국에는 생업전선에 뛰어든 10대보다 윗세대에게 의존하는 청춘들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영화 ‘시동’은 이렇듯 ‘노동’과 ‘비노동’, ‘노동자’와 ‘백수’를 대조하지 않는다. 오히려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하게 되는 ‘노동’과 또 다른 ‘노동’을 대조한다. 그리고 우리가 ‘먹고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며 강요해온 그 ‘노동’에도 ‘어울리는 일’, ‘자기 자리’가 있다는 것을 반복해서 암시한다.

오히려 삶을 영위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선택하게 되는 ‘노동’과 또 다른 ‘노동’을 대조한다.


'어울리는 일'


이러한 주제의식은 기성세대가 아니라 오히려 택일(박정민 분)의 말에서 나오고 있다는 것에 주목해 볼 필요가 있다. 택일(박정민 분)은 자신과 비슷한 삶을 살다가 이제 인생의 갈림길에 서 버린 친구 상필(정해인 분)에게 지속적으로 ‘어울리는 일을 하라’고 조언한다. 이 ‘어울리는 일을 하라’는 메시지는 상필(정해인 분) 뿐 아니라 결국 거석(마동석 분)에게까지 그 파급이 미치게 된다. 


집을 나와버린 가출 소년일지 모르지만 ‘노동’은 기본적으로 ‘다른 사람에게 피해는 끼치지 말아야한다’고 믿는 그의 가치관은 어쩌면 윤리적 회의감을 부둥켜 안고 고소득을 올리고 있는 수많은 정규직들을 부끄럽게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의 지속적인 조언 덕분인지 상필(정해인 분)은 결국 사채업을 용기를 내어 그만두고 할머니와 함께 살던 집에 돌아가게 된다. 거석 역시 조직에 복귀해 현안은 해결하지만 태성(박해준 분)을 따로 불러내 자신이 직접 만든 짜장면을 대접하며 이렇게 작별을 고한다. 


나 이제 이런 거 만드는 사람이야


그리고 택일(박정민 분) 자신도 아들의 뒷바라지만 하다가 결국 자기 앞가림을 못하고 있는 엄마에게 돌아가게 된다.


영화 속 인물들이 찾아간 '제자리'


이렇게 영화 속 주인공들은 모두 자신에게 ‘어울리는 일’을 찾아갔다. 결국 그 ‘어울리는 일’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는 것’이었다. 가족이 한 명이라도 있는 택일(박정민 분)과 상필(정해인 분)은 다시 가족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가족이 없이 혼자 남겨진 공사장(김종수 분)과 거석(마동석 분), 구만(김경덕 분)과 경주(최성은 분)는 다시금 공동체를 이루어 가족처럼 산다. 그것이 영화가 말하는, 그리고 영화 속 주인공 택일(박정민 분)이 말하는 그들에게 ‘어울리는 일’이다.  

그들이 돌아간 '가족'과 '장풍반점'이라는 공동체


고단한 삶 속에서 우리가 돌아갈 곳은 어디인가


우리는 ‘어울리는 일’을 하고 있는가? 우리 오늘의 ‘노동’은 어떠했나. 

나의 노동은 혹 타인을 괴롭게 하지는 않았는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위해서 했던 노동이 오히려 사랑하는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있지는 않은지.


삶은 본디 외롭고 고단하다. 


그렇기 때문에 ‘어울리는 일’, ‘어울리는 자리’를 찾는 일은 매우 중요한 것이다. 

고단한 삶에 빛을 비춰주는 것은 빌딩 숲의 화려한 네온사인 불빛이라기보다는 서로의 마음을 채울 수 있는 사랑의 온기일 것이기 때문이다.

마블리의 누나 같은 애교가 매력적이었지만 나에게는 ‘노동’의 의미를 생각하게 했던, 나에게 ‘어울리는 일’이 무엇일지를 곰곰이 생각해보게 했던 영화, ‘시동’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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