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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Jan 28. 2019

아이들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자란다

열린 어린이집, 책 읽어주러 간 아빠의 이야기

거절할 수 없는 부탁


"여보, 혹시 오전에 잠시만 시간 낼 수 있어요?"

"응? 왜요?"

"오늘 '열린 어린이집'의 날이라서 아빠가 책 읽어주는 시간이 있어요. 어제 담임 선생님을 뵈었는데 여보가 와 주었으면 하시더라구요."


나는 사립대학의 교직원이고, 대학 본부의 한 사무실에서 인사 업무를 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다섯 살이 된 아들은 내가 일하는 사무실에서 100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캠퍼스 내의 직장 어린이집에 다닌다. 나는 아들과 출근과 퇴근을 하고, 녀석은 아빠와 등원과 하원을 한다.

직장 어린이집이지만 교직원들의 자녀들만 있는 것은 아니라서 나는 어린이집과 가장 인접한 곳에서 근무하는 아빠인 셈이다. 그러니 담임 선생님의 부탁이 그냥 넘어갈 수 있는 부탁으로 들리지는 않았다.

나 역시도 계속되는 업무가 있어서 그것을 잠시 끊고 나오는 것을 장담할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다른 아빠들도 다 비슷한 상황이라 아마 자원하는 분이 없었으리라. 


"그러면 선생님한테 제가 간다고 말씀드려 주세요. 영원이한테도 오늘 아빠가 어린이집에 간다고 이야기해놓을게요."




차를 타고 함께 등원하는 길, 나는 넌지시 아들에게 이야기를 꺼냈다.


"영원아, 오늘 아빠가 영원이 어린이집에 책 읽어주는 선생님으로 잠깐 가려고 하는데 어때?"


아들은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조금은 흥분된 목소리로 말했다.


"좋아요! 그럼 저랑 같이 가는 거에요?"

"아니. 영원이는 다른 친구들이랑 놀고 있고, 아빠도 일을 하다가 갈거야."

"그럼 아빠 일하고 빨리 와요~!"


아들이 그렇게나 좋아할 줄 몰랐다. 녀석의 등원길은 평소보다 훨씬 흥이 나 있었고, 들어가는 발걸음 역시 평소보다 유쾌했다. 




8시 40분 쯤, 담임 선생님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11시쯤 와주시면 될 것 같다고 하셨다. 



처음에는 그냥 선생님의 부탁을 들어드린다는 개념이었는데, 다시금 생각해보니 나는 아들과 그의 반 친구들 앞에 처음 서는 것이었다. 

아, 이런. 

역사적인 날에 옷차림은 이게 뭔가 싶었다. 머리도 그렇고. 그냥 후줄근한 아저씨가 아닌가. 나도 꾸미면 댄디한 직장 남성처럼 될 수 있는데. 화장실 거울에 비친 나의 모습은 영락 없이 배 나온 30대 중반의 아저씨였다. '아빠! 일하고 빨리 와요~!'하고 해맑게 웃으며 들어갔던 아들의 음성이 귀에 메아리처럼 쟁쟁했다. 괜히 내가 가서 아들에게 창피한 아빠가 되지는 않을지 살짝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면서 내 눈 앞에 오묘하게 오버랩되는 장면이 있었다. 그것은 약 이십여년 전, 스승의 날에 우리 반에 오셨던 어머니의 모습이었다.




'오십대 엄마'의 반 모임


나의 어머니는 나를 마흔 여섯에 낳으셨다. 지지리도 가난하던, 그리고 이미 중고등학생 자녀가 셋이나 있는 가정에서 늦둥이의 소식은 가히 충격적인 소식이었을 것이다. 태어나는데까지도 순탄하지만은 않았지만 키우는 것은 더 막막한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그런 특별한 상황에서 특별한 사랑을 받으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 내 상황이 특별했던만큼 나를 키우는 우리 엄마의 상황도 특별했을 것이다. 그녀는 오십대 후반의 나이에 자신의 딸 뻘이 되는 엄마들과 함께 요즘 말로 '반 모임'을 했다. 

엄마는 내 위의 세 명의 자녀를 훌륭하게 키우셨지만 학교에 좇아다닐만큼의 여유는 없었다. 그렇기에 막둥이만큼은 엄마가 있어야 할 자리에 꼭 있어주고 싶어하셨다. 본의 아니게 내가 반장이 되면, 엄마도 엄마들의 세계에서 반장이 되었다. 나는 '노령'의 엄마가 그런 역할까지 해 주시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죄송한 마음이 있었다. 내 친구들의 엄마들은 다름 아닌 우리 '누나' 또래였다. 그런 엄마들과 머리를 맞대는 것이 (어린 내 눈에 보기에도) 쉽지는 않을 것 같았다. 


잊을 수 없는 스승의 날의 추억


그러던 어느 스승의 날, 엄마는 우리 반에 일일 선생님으로 초청되었다. 나는 우리 엄마가 오실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어디 가서 잘 나서지 않는 우리 엄마, 늘 침묵으로 일관하시며 정말 필요하지 않으면 입을 잘 떼지 않는 우리 엄마가 우리 반 교단에 서신다니. 

엄마가 교실 문을 열고 교단 앞에 섰을 때, 아이들 몇몇이 물었다.


"민호야, 할머니시니? 엄마가 오신다고 했잖아."

"엄마 맞아. 우리 엄마."


세간의 우려와 달리 나는 할머니를 방불케 하는 노령의 우리 엄마가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어렵게 낳은 막내 아들을 위해서 딸 같은 엄마들과 함께 학교에 봉사하시는 우리 엄마가 우리 교실에까지 와 주신 것이 너무 감사하고, 자랑스럽기만 했다. 그리고 입술을 잘 떼지 않는 엄마가 입을 열어 아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해주실지 기대도 되었던 것 같다.

그 때의 그 장면을 나는 잊을 수가 없다. 우리 엄마는 그 자리에 서서 '인생의 의미'에 대해서 이야기하셨다. 엄마의 음성은 오월의 봄비처럼 교실의 공기를 촉촉히 적셨다. 사람은 어디로부터 와서 어디로 가는 걸까. 누구에게나 죽음은 가까워지고 있는데. 우리는 어떻게 살아야 할까? 엄마의 강의는 그런 교실에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었을 명강의였다. 나는 그런 강의를 할 수 있는 우리 엄마가 자랑스러웠었다. 그런 엄마가 할머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든, 증조 할머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든 상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였다. 


아마도 나는 그녀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런 엄마가 할머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든, 증조 할머니 같은 모습을 하고 있든 상관 없었다. 그녀는 그저, 자랑스러운 우리 엄마였다.


아들의 친구들 앞에 서다


현실로 돌아온 나는 정신을 가다듬고는 어린이집으로 향했다.

원장님과 담임 선생님이 반갑게 맞아주시며, 혹시 준비하신 책이 있느냐고 물었다.

물론 영원이와 함께 읽으며 정든 책들이 있긴 하다. 녀석은 몇몇 책은 통으로 외워버려서 나와 책의 상황을 재연하며 연극을 하듯이 놀곤 한다. 하지만 그런 책을 골라서 들어가면 아들만 신나서 반응을 하고, 다른 아이들은 조용한 상황이 발생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 때 쯤, 원장 선생님이 책 한 권을 집어드시더니 말씀하신다.


"영원이네 집에는 여동생이 태어났잖아요? 이런 책도 좋을 것 같아요."


영원이만한 남자 아이가 주인공인 책이었다. 엄마, 아빠가 동생이 태어나자 남자 아이의 의자나 물건들을 온통 핑크색으로 칠해버려서 남자 아이가 비뚤어질뻔 한 이야기이다. 그러자 담임 선생님이 말씀하신다.


"영원이는 동생에 대한 질투심이 전혀 없는 걸로 알고 있어서... "


그렇다. 사실 영원이에게 맞춤형인 책은 아니다. 영원이는 왜 저 남자아이가 저렇게 반항적으로 행동하는지 이해를 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 이제 8개월 남짓된 여동생에게라면 자신의 간이며 쓸개까지도 빼 줄 것 같은 오빠이니 말이다. 게다가 녀석은 가장 좋아하는 색이 핑크색이다. 아빠가 파란색 의자를 핑크색으로 칠하는 것에 남자 아이가 왜 저렇게 민감하게 구는지 공감할 턱이 없다.

하지만 나는 책 선정을 놓고 오래 고민하지 않기로 했다. 그 자리에 있는 열 명이 넘는 아이들에게는 각자의 사연이 있을 터이고, 나는 새로운 책을 읽어주면 아이들은 자신의 상황에 맞게 소화하면 될 터이니 말이다.




반 교실문을 열고 들어가자 이제 갓 다섯 살이 된 아이들이 넓은 공간을 남겨두고 매트가 깔린 한 공간에 콩나물처럼 촘촘히 앉아있었다. 연예인을 만난 것처럼 한 명 한 명이 반갑다. '네가 OO이구나! 너는 OO이, 너는 OO!'

아들과의 대화 속에서 등장하던 아이들이 생생한 실물로 내 앞에 앉아있다.

내가 인사를 건네자 아이들의 인사는 그의 다섯 배의 성량이 되어 내게 돌아왔다. 


나는 그 방에서 그동안 경험해보지 못한 순수하고 초롱초롱한 눈망울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았다. 때 묻지 않은 아이들의 시선은 한 여름의 태양이 내리쬐는 것처럼 내 몸 구석구석을 향하고 있었다. 어른들은 대화를 잘 경청하는 것 같지만 사실은 필요한 정보만을 남겨두고, 나머지는 속으로 삭제할 줄 안다. 하지만 아이들은 그렇지 않다. 내가 책을 읽어주고 대화를 나누는 짧은 시간동안 아이들은 어쩌면 그 모든 것을 흡수할지도 모르는 일이다. 나는 그 생각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나는 중간 중간에 설명을 곁들여가며 책을 한 권 읽어주었다. 이것저것 걱정하는 아기 물고기를 향해 엄마 물고기가 안심을 시켜주는 이야기였고, 아이들은 초집중하는 모습이었다. 원래 읽기로 한, 책 한 권 리딩이 끝났지만 아이들은 미동도 하지 않고, 또 읽어달라고 했다. 

나는 중간 중간에 설명을 곁들여가며 책을 한 권 읽었다.


두 번째 책은 아까 원장님이 추천해주신 여동생이 생긴 남자아이의 이야기였다. 역시 초집중. 몇몇 아이들은 중간에 이야기에 참여하기도 했는데 동생이 태어나서 속상하다는 아이도 있었고, 우리 아들처럼 동생이 태어나서 너무 좋다는 아이도 있었다. 이번에도 앵콜. 슬슬 선생님께서 내 눈치를 보기 시작한다. 

두 번째 책은 아까 원장님이 추천해주신 여동생이 생긴 남자아이의 이야기였다. 역시 초집중.


세 번째 책까지 읽었지만 아이들은 역시나 미동도 없다. 나는 다섯 살 아이들의 집중력에 놀라기 시작했고, 담임 선생님은 '계약'된 시간을 이미 넘겨버린 나의 눈치를 보더니 시간을 마무리하려고 했다.


"선생님, 아이들이 원하니 마지막으로 책 한 권만 더 읽어주고 갈게요." 


나는 이왕 읽어주기 시작한 거, 넉넉히 읽어주기로 마음 먹었다.  


"혹시 여러분 중에 읽었으면 하는 책이 있는 친구 있나요?"


그 말에 아들 녀석이 주저 없이 일어나서 반에 있는 책 한 권을 더 가져왔다. 나는 그 책을 정성 들여 읽은 후, 아이들에게 인사를 했다. 아이들도 나에게 인사를 했고, 그 중 여자아이 한 명이 살며시 나오더니 나의 손을 꼭 잡아주었다. 나는 그것을 '삼촌! 수고하셨어요!'라는 뜻으로 마음대로 해석을 했다.

나는 아이들과 선생님과 함께 단체 사진을 함께 찍고, 영원이를 한 번 꼭 안아주고는 서둘러 사무실로 돌아왔다. 


그 날의 하원길


퇴근하기 전에 아내로부터 연락이 왔다.

내용인즉슨 아내가 혹시 내가 늦을 수도 있어서 먼저 영원이 하원을 시키러 갔는데,

영원이는 조금 더 기다려서 아빠랑 같이 가고 싶다고 이야기를 했다는 것이다.

영원이가 오늘 아빠의 방문을 무척이나 좋아했다는 것을 현장에서도 느낄 수 있었지만,

아내의 전화를 통해서 영원이가 오늘의 추억을 아빠와 함께 나누고 싶어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퇴근 후, 어린이집을 다시 찾았다.

어린이집 출구에 앉아 아이를 기다리노라면 녀석이 태어나던 순간이 떠오른다.

울음소리가 들리더니 곧 간호사님이 아이를 안고 나와 나에게 안겨주던 그 순간부터

나는 녀석과의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하고 있다.

아들은 역시나 쿵쿵쿵쿵 소리를 내며 달려나왔다. 


"아빠, 친구들도 엄청 재미있었대요. 내일도 책 읽어주는 선생님으로 오시면 안되요? 11시에?"


아들에게 나는 역시나 엄청나게 자랑스러운 아빠가 되어 있었다.

친구들과 함께 있을 때는 티 내지 않았지만 아들에게는 아빠가 와서 친구들 앞에서 책을 읽어주는 경험이

마치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행복이었나보다.


"영원아. 아빠가 마음대로 가서 책을 읽어준 건 아니야. 오늘은 특별히 '열린 어린이집' 시간이 있어서 아빠가 하고 싶다고 한거야. 다음에 또 그런 기회가 있다면 아빠가 갈 수 있도록 노력해볼게! 하지만 다른 아빠가 오고 싶어하면 양보하게 될 수도 있단다."




부모의 '뒷모습'


나는 이십여년 전, 내가 매일 공부하던 교실에 오셨던 우리 어머니와 늘 한결 같은 삶을 살아오신 아버지를 생각했다.

작달막한 키에 또래들에게는 할머니 같은 외양이었지만 그와 상관 없이 자랑스럽기만 하던 우리 엄마.

그리고 늘 말씀하시는대로 행하며 살아오셨기에 팔십 노인이 된 뒷모습을 보아도 여전히 존경심이 사라지지 않는 우리 아빠.


나도 아빠로서의 자신감이 조금 생겼다. 

나의 아들이 나에게 있어서 최고의 아들이듯, 아들에게 있어 나는 아직 최고의 아빠구나. 

더 분발해야지. 녀석에게 부끄럽지 않은 아빠가 되려면 말이다. 

물론 외모도 가꾸면 좋겠지만, 녀석이 지켜보는 나의 '뒷모습'이 변함 없어야 할 것이다. 

'뒷모습'은 부모의 실체이며 내면이다. 아무리 분칠하고, 꾸며도 꾸며지지 않는 것이 바로 '뒷모습'이다.

아이들은 부모의 앞모습보다 뒷모습을 보며 성장한다. 

앞에서 부모가 아무리 바른 생활을 강조한들, 

뒤에서 다른 삶을 살면 아이들은 앞에서 강조한 바른 생활보다 뒤에서 강조되어버린 '다른 삶'을 자신의 삶으로 채택하기 쉬운 것이다.

'뒷모습'은 부모의 실체이며 내면이다. 아무리 분칠하고, 꾸며도 꾸며지지 않는 것이 바로 '뒷모습'이다.


아들이 지금처럼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는 마음을 언제까지 가질 수 있을까?

나의 뒷모습을 잘 가꾸어야겠다. 

아빠의 내면과 실체를 다 알아버린 후에도 아빠를 자랑스러워 하는 아들을 감히 상상하며

나는 오늘도 내 마음을 거울에 비춰본다.


부끄럽지 않은 뒷모습을 가지고, 다시 아들의 친구들 앞에 설 날을 생각하며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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