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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음 Mar 08. 2019

아들 가진 아빠의 로망 실천기(實踐記)

'동성'인 친구가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행위는 무엇일까

어렴풋한 목욕탕의 기억


어렴풋한 기억이지만 나는 아버지와 목욕탕에 가는 것이 그리 달갑지 않았었다. 목욕탕 문을 열자마자 뜨거운 공기가 나를 사로잡았고, 숨이 막힐 것 같은 느낌이 엄습했다. 게다가 마음은 항상 자상하셨지만 우리 아버지는 아이를 어느 강도로 다루어야하는지 네 명을 키우시면서도 잘 모르시지 않았나 싶다. 때를 미는데 얼마나 아프게 벅벅 미는지, 아직도 아버지가 내 때를 밀때의 강도와 통증은 내 뇌리 어딘가에 박혀있다.

목욕탕의 맛을 알게된 것은 성인이 되어서였다. 피로감을 싹 잊게 만드는 섭씨 43도의 물(30도 대의 물은 이젠 별로 감흥을 주지 못한다). 어렸을 때, 그렇게 뜨겁기만 했던 그 액체는 이제는 나에게 피로회복제이다. 특히 하늘이 바라다보이는 노천탕이 있는 호텔에 묵는다면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더라도 새벽에 나와 탕 속에 몸을 담그는 나는 소극적인 사우나 매니아라고 할 수 있겠다.

아무리 바쁜 일정이 있더라도 새벽에 나와 탕 속에 몸을 담그는 나는 소극적인 사우나 매니아라고 할 수 있겠다.

 

아들을 가지게 된 아빠의 로망


첫째가 아들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던 날,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의 여러가지 그림들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흔히 이러한 작업을 사람들은 '로망'이라고 부르더라. 그 중 단연코 떠올랐던 장면은 아들의 손을 잡고 목욕탕에 가보는 것이었다. 너무 전형적인 것 아니냐고 혹자들은 묻겠지만 아빠가 되어보니 왜 우리 아버지가 기를 쓰고 나를 데리고 목욕탕에 갔었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첫째가 아들이라는 것을 듣게 되었던 날, 나는 이 아이가 태어나고 나서의 여러가지 그림들을 그려보기 시작했다.


목욕탕을 가는 행위는 '동성'인 친구가 할 수 있는 가장 친밀한 행위였던 것이다. 사회에서 사람들은 옷을 입고 만나지만 목욕탕에서는 그 모든 것을 제거한 채, 자연스러운 모습을 서로에게 비춘다. 그렇기에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최민식이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느그 서장이랑 사우나도 하고, 마 다 했어!'라고 떠벌리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게다가 피를 나눈 식구라고 할지라도 '동성'이 아니면 함께 입구를 통과할 수 없는 곳이 바로 목욕탕이다. 옛날에야 초등학생이 된 아들이 엄마 손에 이끌려 여탕에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지만 지금은 추억이 된 이야기이지 않은가.

그렇기에 영화 '범죄와의 전쟁'에서도 최민식이 '느그 서장 남천동 살제? 내가 느그 서장이랑 사우나도 하고, 마 다 했어!'라고 떠벌리는데에는 다 이유가 있는 것이다.


아들과의 목욕탕, 첫 경험


아들을 데리고 처음으로 목욕탕을 가게 되던 날, 나는 설레임 반 걱정 반이었다. 때는 녀석이 네 살 때였다.

'내가 아버지와 함께 목욕탕에 가는 것을 싫어했던 것처럼 아들 역시 그러면 어쩌지' 하는 마음이 그 걱정 반의 내용이었다.

아니나다를까 위기가 찾아왔다. 탕에 있다가 내가 잠시 아들과 거리를 둔 사이에 아들이 탕 속에 빠지고 만 것이다. 다행히 바로 옆에 있던 문신이 꽤나 있는 분께서 감사하게도 바로 건져주셨다. 하지만 녀석은 많이 놀란 눈치였다.


녀석의 첫 목욕탕 후기는 이러했다. 아빠와 함께 목욕탕을 가는 것은 너무나 즐거웠으나 그 때 빠진 기억 때문에 목욕탕은 다시 가지는 않겠다는 것이었다.

마음이 아팠다. 영원이가 우리의 품에 처음 왔을 때부터 꿈꾸던 날이었는데.. 바보 같이 물에 빠뜨려서 트라우마를 만들다니! 누구를 탓할 수도 없는 아빠의 책임이었다.


2019년 3월 1일


그랬던 녀석이 올해 다섯살이 되었다. 그 첫 경험 이후로 녀석은 다섯 번 정도의 목욕탕 경력이 쌓였다.


첫 경험 후 한동안은 목욕탕에 가자는 소리를 안 하더니 1개월 정도 지난 후에는 목욕탕이 있는 구역을 지날 때마다 목욕탕을 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다행이었다. 그 후로 나는 아들과 아무런 일정이 없는 토요일 오전이면 목욕탕을 찾곤 했다.


그리고 2019년 3월 1일,

오랫만의 휴일을 맞아 우리는 목욕탕에 가기로 했다.

특별히 오늘은 잡화점에 들러 목욕 바구니를 사기로 했다. 매번 우리의 칫솔들과 내 면도기를 목욕탕에 가져갔는데 그 때마다 지퍼백에 담아가니 물이 고이고 여간 불편한게 아니었다. '다음에 목욕탕에 갈 때는 꼭 목욕 바구니를 사자'는 마음을 먹고 아들과 다짐했었는데 오늘이 그 날이었다.


목욕 바구니 쇼핑


우리가 들른 잡화점은 그 동네에서 꽤나 큰 잡화점이었다. 한 건물 전체가 잡화점이다. 3층까지 있는.

그러다 보니 목욕 바구니의 색상과 종류도 다양했다. '흰 색' 바구니가 제일 깔끔해보여서 아들에게 '이거 어때?'하고 물었다. 아들은 탐탁치 않아 하더니 유심히 다른 바구니들을 살피기 시작했다. '이건 어때요?'하고 아들이 물어서 보니 '핫핑크' 바구니였다. 아들은 여동생을 본 이후로 본인도 여자가 되고 싶다는 말을 자주 한다. 우리가 볼 때에는 여동생을 너무 사랑한 나머지 동생과 같은 성별을 갖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이후로 녀석은 핑크색을 많이 좋아한다.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맙소사! 남자 둘이 목욕탕을 가는데 핫핑크가 왠말이니. 아들의 취향을 존중해주고 싶었지만, 그러기엔 아빠인 내가 받아야 하는 사회적 시선이 너무 압박스럽다.

결국 내 진정성 있는 읍소가 통했다. 우리의 절충안은 흰색핑크색도 아닌 시원해보이는 파란색 바구니를 사는 것이었다. 가격은 이천원. 우리는 모두 만족스러운 마음이 되었다. 별 것도 아닌데 목욕탕에 들어가는 어깨가 뭔가 더 으쓱하다. 마치 새 신발을 신고 등교를 하는 느낌이랄까.

우리의 절충안은 흰색도 핑크색도 아닌 시원해보이는 파란색 바구니를 사는 것이었다.

3월 1일의 목욕탕


3층에 주차를 하고, 지하 2층으로 내려간다. 사우나 엘리베이터의 문이 열리니 녀석이 자연스레 달려가서 외친다. 이래뵈도 목욕탕 경력 2년차.


어른 한 명, 어린이 한 명, 사우나만요!(찜질방이 있기 때문에)


주인 아주머니는 귀엽다는 듯 웃으시며 열쇠 두 개를 내미신다. 이제 숫자를 알게 된 김영원 어린이는 두리번두리번 살피더니 열쇠에 적힌 숫자와 같은 신발장을 찾아낸다. 다만 키가 닿지 않는다. 아빠가 나설 순간은 이럴 때이다. 왠만한 것은 다 녀석이 스스로 할 수 있다. 아빠는 녀석이 할 수 없는 일이 나타나거나 정말 위험이 눈 앞에 있을 때에만 영웅적으로 나타나야 한다. 시도 때도 없이 나타나게 되면 아들의 자존심에 자꾸 상처만 내게 마련.

옷을 후다닥 벗고, 목욕탕 입성. 아들은 탕에 앉아 아빠와 물고기 놀이를 하는 시간을 제일 좋아한다. 아니나다를까. 탕으로 직행하려고 하길래 다시 가르친다.

"영원아, 탕은 여러 사람들이 함께 사용하는 공간이기 때문에 몸을 한 번은 씻고 들어가야 해."


다행히 내가 느꼈던 숨막히는 기운을 이 녀석은 잘 느끼지 못하는 것 같다. 왠만한 어른들보다 탕에 오래 앉아있는다. 심지어 나와 씻다가도 다시 탕으로 몇 번은 들어갔으니까.

탕에서 나와 때 수건으로 서로의 등을 밀어주는 시간이다. 섬세함이 아주 부족한 나는 아들의 때를 밀 때마다 나는 매우 섬세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목욕탕을 꺼려했던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었으니까. 나는 세게 밀지 말아야지. 그래서 다행히 아들은 내가 어렸을 때 받았던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이제는 아들이 내 등을 밀 차례.

아들의 때를 밀 때마다 나는 매우 섬세하고자 노력한다. 내가 목욕탕을 꺼려했던 지점이 바로 이 지점이었으니까.


녀석의 힘이 제법 세졌다. 저번에 왔을 때랑은 확연히 힘이나 스킬이 많이 발전했다. 이제는 정말 등이 후련하고 시원하다. 아들에게 괜히 미안해지기까지 한다. 사실 아들을 위한 것 같은 명분을 내세웠지만 사실은 나를 위한 시간인 것 같은 느낌이 강하게 엄습해온다. 만 4년을 키운 보람을 이런데서 느끼면 안되는데 이미 너무 강하게 느껴버렸다.


서로 물줄기를 쏴주면서 서로의 몸을 헹궈준다. 녀석은 이게 너무 재밌나보다. 집에서 하면 화장실 사방팔방에 물이 튈까봐 조심을 시키지만 목욕탕에서는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만 없으면 마음껏 하게 한다. 그러니 녀석도 스트레스가 좀 더 풀리는 것 같다. 아들들은 제약이 없이 본인이 마음대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필요하다.

아들들은 제약이 없이 본인이 마음대로 에너지를 발산할 수 있는 기회가 많이 필요하다.


녀석은 목욕탕에 들어가서 계산하는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양치, 머리 감기, 나와서 수건으로 몸 닦기, 드라이기로 머리 말리기, 체중 재기, 옷 다시 입기 등의 모든 활동들을 스스로 해냈다. 아빠는 지켜보며 아들의 친구가 되어준다. 탕 속에서 하는 물고기 놀이나 끝말 잇기는 밖에서 하는 것보다 뭔가 훨씬 끈끈한 느낌이다.


휴일(休日)의 만찬


옷을 꺼내 입다보니 핸드폰에 부재중 전화가 와 있다. 아내에게서 온 것이다. 목욕이 끝났으면 함께 점심을 먹고 싶다고 한다. 분위기를 눈치 챈 아들이 외친다.

난 미니 탕수육이 먹고 싶어요!


결국 우리의 점심 메뉴는 중화요리가 되었다. 하지만 미니 탕수육을 외치던 아들은 정작 주문할 때가 되니 '대(大)'자를 시켜야 한다고 한다. 녀석에게 낚인 기분이었지만 자꾸 등을 세게 잘 밀어주던 아들의 진정성 있는 서비스가 생각났다. 괜히 이런 탕수육 사이즈 같은 걸로 휴일의 기분을 망치게 할 수 없지. 주문을 번복했다. 덕분에 우리는 그 어느 점심보다 배불리 먹었다.


그렇게 우리의 휴일은 아들과 함께 순삭되고 있었다. 아들이 밀어준 등 덕분인지 그 날 하루 종일 몸이 가벼웠다.


이상 아들 가진 아빠의 로망 일기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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