엎치락 뒤치락하던 약속이 한 날짜에 모였다. 너를 만나러 가는 길.
요 며칠 컨디션이 좋질 않았다. 속이 울렁대기도 했고 머리가 띵하기도 했다. 급기야 손가락 관절부터 아파왔던 거다. 근 30년 사무기술직 밥벌이에 어딘가 탈이 나면 꼭 손가락 관절부터 아프더구나.
꼬불 꼬불 시골길 벗어나니 면소재지 약국이 하나 나왔다. 찡그린 얼굴을 애써 펴보며 약국에 들어섰다. 지긋한 나이의 약사선생님이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내 앞에 선 사람. 익숙한 얼룩덜룩 군복이 눈에 들어왔다.
깔끔하게 쳐 올린 머리밑이 퍼럿퍼럿했다. 각이 진 다부진 어깨에 체크 표시 2개, 모자엔 금색 표장이 하나 올라가 있었다. 무슨 모양인지 어떻게 생겼는지 설명이 어렵구나. 재잘재잘 설명해 주던 그 용어들이 낯설어도 더 모른 척해야 참새 같은 너희와 놀 수 있어 나는 외우지 않았으니까.
그러다 약사님이 들고 온 뭉터기 약봉지에 숨이 턱 멎었다. 단골인 듯 약사님이 안경을 고쳐 쓰며 친근하게 말을 건넸다.
여전히 바쁜 거죠?
그렇죠. 뭐.
사람 좋게 웃는다. 순둥순둥한 표정이 살짝 들썩이는 어깨에 묻어나는 것만 같다. 속이 좋아 웃는데 나는 속이 팍 상했다. 아직 흰머리 하나 안 보이는 퍼런 머리밑이 자꾸만 자꾸만 눈에 들어왔다.
뭉티기 약봉지에는 당뇨, 혈압, 고지혈증 치료제가 들어 있었다. 한눈에 봐도 1회분 복용량이 꽤 된다. 약사님이 참 살뜰히 도 물었다. 잠은 좀 자냐, 끼니는 제때 챙겨 먹냐, 스트레스는 어떻게 해소하냐... 야간 근무로 밤낮 맞질 않아 가끔 자고 싶어도 못 자기도 하고, 작전에서 늦으면 끼니를 건너뛰어 간단히 간편식을 먹기도 하고, 너무 바빠 스트레스가 뭔지도 모르겠다며... 호탕하게 웃는다.
코끝이 찡해왔다. 약국 모서리 귀퉁이에서 오질 없이 찔끔찔끔 울었다.
뒤늦게 주차하고 약국에 들어선 곰은 이 의문의 1패를 의아한 눈으로 바라본다. 왜? 라고 물으려 하는 통에 엄지손가락을 들어 좌우로 마구마구 흔들었다. 곰도 이제 안다. 얘가 오질 없이 울 땐 뭐가 있다는 걸.
이유도 모르는 눈물바람에도 곰은 말없이 등을 두어 번 토닥여 준다. 그리곤 귀에 대고 조용히 말했다.
"빨리 가자. 부끄릅따"
약국 판매대에 올려져 있던 '강력 파워! 피로는 가라!!'라고 적힌 자양강장제 두 세트를 집어 들었다. 한 세트에 만원. 싸다면 싸고 비싸다면 비싼 가격이지만 아까운 마음 없이 뭉터기 약봉지 위에 올려놓았다.
나 빼고 다 당황해하는 기색이었지만 눈물 지우고 희미하게 웃었다.
"여기가 카페였다면, 아메리카노 한잔 샀을 거예요."
늘 그렇듯 군복 입은 이들은 내 골든벨 대상이란다. 네가 먹고 네가 마시는 거라 생각하고 한 그릇 한잔 산다.
가장의 무게, 내 집 마련, 불확실한 미래. 이 불특정한 짐들을 진 젊은이가 약까지 지고 가는 게 속이 아팠다. 몇 번이나 감사 인사 하고 나가는 그의 뒤에서 그제야 내 증상을 말하고 약을 받았다. 찔끔 눈물을 훔치며 저이를 보고 내 속이 이리 아픈데 이럴 때 먹는 약은 없는지 물었다.
연세 지긋한 약사님은 예능을 다큐로 받아 대답해 주셨다.
세금 잘 내고, 법규 잘 지키고, 태극기 잘 다세요.
'강력 파워! 피로는 가라!!'라고 적힌 자양강장제를 세 개 더 샀다. 너 하나, 곰 하나, 나 하나. 셋이 먹고 한숨 자자꾸나.
그리고 너를 만났다.
살이 쏙 빠져 수척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이었지만 그 역시 너의 모습이었지. 있는 솜씨 없는 솜씨 부려 본다. 고기를 굽고 집에서 가져간 묵은지로 김치찌개를 끓였지. 여유롭게 숟가락 드는 네 모습에 나는 배가 불렀다. 그날 우린 '강력 파워! 피로는 가라!!'를 사이좋게 먹고 별을 봤지. 적당히 바람은 좋았고 저무는 노을은 온통 분홍빛이었고 어둠 깔린 바다는 고요했고.
막 심은 꽃나무가 땅내 맡고 단단한 뿌리를 가질때까진 많은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게다. 모진 비바람도 견디고, 따가운 뙤약볕도 견뎌야 할 테니깐. 그럼에도 그럼에도. 고마운 빗줄기에 감동하고 늘 내어주는 흙에 고마울 거다.
고마운 빗줄기 같은 나의 미카야. 그리고 늘 내어주는 흙과 같은 체크 표시 그이.
덕분에 나는 잎을 내밀고 꽃을 피우고 단단한 뿌리의 사회구성원으로 살아갑니다.
온 우주의 에너지를 다 모아 응원합니다. 소소한 잔소리지만 아무리 힘들어도 끼니는 꼭 이어가시길...
고맙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