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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Mar 09. 2020

물리학자는 세상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독서노트 #70 < 떨림과 울림 >

사실 물리는 다정하지 않다.
물리는 나의 짝사랑 상대였을 뿐,
물리가 나를 사랑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30년 동안 물리를 공부했지만
물리가 나를 다정하게 대한 적이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그럼에도 나는 다른 사람들에게
물리를 다정하게 소개하려 했다.

그것은 내가 물리를 정말 사랑했기 때문이지,
물리 자체가 다정해서는 아니다.
물리가 사랑받아 마땅한 대상이라 그런 것이지,
물리가 사랑스러운 존재라 그런 것은 아니었다.


이 책 <떨림과 울림>은 내가 자발적으로 집어 든 책이긴 하지만, 지인의 소개 없이는 절대 알지 못했을 책이기도 하다. 함께 책을 읽는 모임의 멤버가 알쓸신잡의 김상욱 교수가 핫한데, 우리도 과학 서적을 읽는 것이 어떻겠냐는 의견에서 시작된 것이다. 최근, 아니 어쩌면 대학 졸업 이후 전공 서적 이외에 과학 관련 서적을 읽어본 적이 없는 것 같다. 과학 서적을 모를 땐 검색을 하면 되지만, 검증된 유명인의 서적을 고르는 게 빠르리라. 그래서 그냥 김상욱 교수의 저서 <떨림과 울림> 책을 지정하여 읽기 시작하였다.


카이스트 물리학을 전공한 저자는 누가 뭐래도 굉장히 명석한 두뇌를 갖고 있었으리라. 냉철하고 차갑게만 느껴질 것 같은 물리학의 세계를 나름 이해하기 쉽게 풀어낸 저자의 어투가 인상적이었다. 고전역학과 양자역학 사이에서 일어나는 물리에 관심이 많다고 하는 감상욱 저자는 과학을 널리 알려 과학적 사고방식으로 사회를 좀 더 행복하게 만들고 싶은 듯했다.


저자에 대한 배경지식이 전혀 없는 상태에서 온전히 책으로 처음 마주한 저자는 매우 놀랍고 신기하고 매력적이었다. 과학 서적인데, 인문학적인 생각을 끌어내기도 하고, 사회적으로 민감할 수 있는 종교와 관련된 부분, 역사적으로 항상 사회적 약자였던 여성에 관련된 부분 등 저자의 생각이 고스란히 담긴 이 책은 굉장히 흥미로웠다.



짝사랑 상대가 멀리서 나타났을 때 우리의 심장은 떤다. 하지만 그 상대가 내 앞을 무심히 지나쳐버리면 우리의 심장은 운다. 떨림과 울림은 물리를 대하는 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인지도 모른다. 사랑은 대개 보답 받지 못한다. 하지만 사랑은 보답을 바라고 이루어지는 행위가 아니다. 사랑은 사랑받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울림은 다시 새로운 떨림의 시작으로 이어진다.

- p5

처음 책 제목을 보자마자 '왜 떨림과 울림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그러한 독자들의 마음을 미리 읽기라도 한 듯 (헵타포드인가...ㅎ) 책 앞부분에 떨림과 울림에 대한 생각을 이야기한다.

사실 책 가장 앞부분에 물리에 대한 사랑이라니! 짝사랑에 대한 심장의 떨림과 울림이라니! 이 무슨 감성적인 이야기인가 싶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페이지에서 한참 동안 떠나지 못했다. 어쩌면 저자는 물리학을 진심으로 사랑하는지도 모른다고 생각이 들었다.



세상은 왜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는 것에는 이유가 필요 없다. 하지만 무엇인가 존재한다면 왜 그것이 있어야 하는지 설명이 필요하다. ... 우주의 신비를 탐구하는 물리학자라면 세상이 왜 존재하는지 답할 수 있을까?

... 우주는 시공간과 물질이라는 두 부분으로 구성된다. 시공간은 무대, 물질은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우주는 시공간이라는 무대 위에서 자연법칙이라는 대본에 따라 물질이라는 배우가 연기하는 연극이다.

우리는 누가 왜 연극을 제작했는지, 아니 왜 우주가 존재하는지 알지 못한다. 하지만 우주가 항상 존재하고 있었는지, 아니면 어느 순간부터 존재하기 시작했는지는 알고 있다. 철학자 칸트는 그의 책 <순수이성비판>에서 우주에 시작점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두 정당화될 수 있어 이율배반이라고 했다. 우주에 시작점이 있다면 무한한 시간 가운데 하필 그 순간 시작했을 이유가 없고, 시작점이 없다면 모든 사건 이전에 똑같이 무한한 시간이 있어야 하므로 모순이라는 것이다. 즉, 이성으로는 답을 알 수 없다는 말이다. 하지만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은 우주의 시작점에 대한 질문을 과학적 탐구대상으로 만들었다.

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은 연극무대와 같이 고정된 것이 아니라 살아 움직이는 배우와 같다. 배우의 특성이나 움직임에 따라 무대의 구조가 매 순간 함께 바뀌기 때문이다. 상대성이론에서 시공간은 물질과 마찬가지로 기술되어야 할 하나의 대상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이제 시공간의 변화, 나아가 시공간의 시작과 끝을 묻는 것이 가능해진다. 1920년대 조르주 르메트르는 상대성이론에서 우주가 팽창하고 있다는 수학적 가능성을 찾는다. 우주가 팽창한다는 말은 시간을 거꾸로 돌려보면 한 점에서 출발했다는 뜻이니, 우주에 시작점이 있다는 거다. 바로 빅뱅이론이다.

... 빅뱅이론은 우주가 한 점에서 시작하여 팽창해왔다고 이야기한다. 그 이유는 모른다. 아무것도 없는 빈 공간에 어느 날 "꽝!"하고 우주가 나타난 것이 아니다. '꽝'하는 소리와 빈 공간이 존재한다는 개념조차 빅뱅과 함께 생겨났다.

- p40

사실 부끄럽게도 '빅뱅이론'이라는 말을 접한지는 오래되었으나, 그 개념에 대해 한 번도 알아보려고 노력한 적이 없었다. 이 책을 통해 우연히 접한 빅뱅이론에 대한 이야기는 지금의 내 상황에 여러모로 도움이 되었다. 두어 달 전부터 아이가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냐'는 매우 어려운 질문을 해왔다. 아기가 어떻게 태어나는지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사람이 어떻게 생겨났는지를 묻는 것이었다. 나는 제대로 조리 있게, 논리 정연하게 답할 수가 없었다. 나의 무지를 탓했다. 종교가 없는 나는 신이 인간을 만들었다고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진화론을 어디서부터 설명하지? 그런데 진화론을 설명하려면 최초 어떤 생물체가 언제부터 어떠한 원리로 만들어졌는지부터 시작해야 하는데 나는 지식이 없었다. 배웠는데 잊은 건지, 아니면 애초에 배운 적이 없는 건지 조차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무지한 나를 마주해야 했다. 

추측하건대, 아이는 자연관찰 책 시리즈에 나오는 사람, 동물의 '뼈' 이야기와 세계명작 책 시리즈의 '제우스' 책 등을 읽으며 아이는 인간의 최초 생성에 대해 궁금증이 생긴 모양이다. 그것을 5~6세의 입장에서 조리 있게 멋진 문장의 형태로 표현하지 못하니 그저 질문이 '사람은 어떻게 생겨났냐'는 말 이외에 달리 표현할 길이 없었으리라. 


138억 년 전에 꽝! 하고 우주가 생겨났고, 그로부터 38만 년 후에 오늘날 물질이라고 부르는 것들로 우주가 자신의 모습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아이에게 설명해야 할까? 아니면 호모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그 과정의 시초를 찾아 설명해야 하는 걸까? 이 복잡한 과거의 역사와 아직 알아내지 못한 수많은 현상의 원리에 대해 쉽고 간결하게 설명한다는 것은 정말 쉽지 않다는 것을 느낀다. 특히 내가 잘 모르는 분야라면 더더욱이 말이다.



자유낙하하는 물체를 생각해보자. 뉴턴의 관점에 따르면 물체를 손에서 놓는 순간, 물체는 중력에 의해 가속되어 수직으로 낙하하기 시작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낙하 속도는 점점 빨라진다. 하지만 해밀턴의 관점에서는 이렇다. 물체는 여러 경로와 과정을 거쳐 땅바닥에 도달할 수 있다. 원형의 경로나 하트 모양의 경로를 따라 낙하하거나, 직선으로 떨어지더라도 처음에 빨랐다가 나중에 느리게 갈 수도 있고 그냥 일정한 속도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운동경로가 주어지면, '작용량'이라 불리는 물리량을 계산할 수 있다. 가능한 모든 경로와 과정들에 대해 이 값을 계산해보면, 이 가운데 가장 작은 값을 갖는 경우를 찾을 수 있다. 바로 이때의 경로와 과정이 뉴턴의 관점으로 구한 운동과 정확히 같다. 그래서 그렇게 낙하하는 거다.

... 결국 뉴턴역학과 해밀턴역학은 물체의 운동에 대해 동일한 결과를 준다. 하지만 철학적으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해밀턴역학에서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드려는 '경향'이 물체의 운동을 결정한다. 그래서 이것을 '최소작용의 원리'라고 부른다.  
- p91

우주에 의도가 있다고 하면 모든 과학적 난제가 일거에 해결된다. 우주는 왜 생겨났나? 신의 의도 때문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나? 신이 원해서다. 신의 의도 때문이다. 인간은 왜 존재하나? 신이 원해서다. 고온초전도현상은 왜 존재하나? 신이 그런 현상이 있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실제 많은 문명이 이런 식으로 이해할 수 없는 문제에 답을 해왔다. 우리도 뭔가 이해 안 되는 일이 벌어지면 하늘의 뜻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서양의 근대과학이 특별한 것은 신의 의도를 제거하고 세상을 이해하려 시도했다는 점이다.
- p95

물리학에는 세상을 보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하나는 지금 이 순간의 원인이 그다음 순간의 결과를 만들어가는 식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작용량을 최소로 만들려는 경향으로 우주가 굴러간다는 거다. 두 방법은 수학적으로 동일하다. 동일한 결과를 주는 두 개의 사고방식인 것이다. 후자에 대해 우주의 '의도'라고 부르고 싶은 것은 신의 존재를 믿는 인간의 본성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그것은 일어난 일을 인간이 해석하는 방법일 뿐이다. 두 경우 모두 세상은 수학으로 굴러간다. 수학에 의도 따위는 없다.  
- p99

물리와 역학에 대한 개념은 그저 고등학교 일부 과목 혹은 대학 필수 과목 정도로 훑고 지나간 사람 입장에서 물리학에 대한 철학적 관점의 이야기는 매우 흥미로웠다. 단순히 개념 이해, 수식의 논리성, 적절성, 방정식의 암기와 같은 방향으로 공부를 해왔는데, 하나의 현상을 바라보는 관점에 따라 다른 접근이 가능하다는 것이 새삼 놀라웠다. 또한, 종교적 신념에 위배되는 것을 알면서도 세상의 현상을 이해하려는 서양 근대 과학자들의 도전이 있었기에 지금의 과학이 있었다는 사실을 다시 인지하게 되었다.

과학자 중에 종교가 있는 사람, 특히 특정한 신의 존재를 믿는 사람이라면 어떤 마음가짐과 생각을 가지고 연구하는지 갑자기 궁금해진다.


"최초의 획을 긋기도 전에
문장 전체가 어떤 식으로 구성될지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는 뜻이다."
테드 창의 소설 <네 인생의 이야기>에 나오는 문장이다. 영화 <컨택트>의 원작이기도 하다. 어느 날 하늘에 거대한 외계비행선이 나타나고, 사람들은 외계인들을 '헵타포드'라고 불렀다. 하지만 그들의 언어를 전혀 이해할 수 없었고, 대화하려는 시도는 난항을 거듭한다. 인용한 소설의 구절은 헵타포드의 언어에 대한 설명이다.

인간과 헵타포드는 다른 방식으로 우주를 이해한다. 인간은 시간의 한순간만을 볼 수 있지만 헵타포드는 과거와 미래를 한꺼번에 본다. 인간에게 과거는 기억 속에만 존재하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은 것이지만, 헵타포드에게는 과거뿐만 아니라 미래마저 생각 속에 이미 한꺼번에 존재한다. 그들은 정보를 전달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이미 정해진 사건을 현실화하기 위해 언어를 쓴다. 말도 안 되는 듯 들리겠지만, 헵타포드의 인식 틀에 대한 이런 설정은 물리학적인 근거를 가지고 있다. ...

그렇다면 헵타포드는 왜 사는 걸까? 소설의 주인공은 헵타포드를 만난 후 그들의 언어를 알게 된다. 그들의 언어를 익혔다는 건 미래를 알 수 있게 되었다는 의미다. 주인공은 그의 옆에 있는 연인이 언젠가 그를 떠나리라는 것을 알고, 태어날 아이가 병으로 일찍 죽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렇지만 살아간다. 그들을 사랑하며 현재를 산다. 미래를 다 아는 존재에게 현재를 산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소설에서 작가는 이렇게 설명한다. "어떤 대화가 되었든 헵타포드는 대화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미리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지식이 진실이 되기 위해서는 실제로 대화가 행해져야 했던 것이다."

- p97

과학적 지식이든, 어떤 분야의 특정 지식이든 '아는 만큼 보인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소설을 읽은 지 몇 년이 지났고, 영화도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내게 엄청난 임팩트가 없었다는 것은 과학적 지식을 활용해 새로운 관점으로 접근하지 못했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이러한 저자의 요약을 통해 다시 헵타포드의 행동과 소설 속 흐름을 상기시켜본다. 과거와 미래를 모두 아는 입장에서 현재를 살아가는 것에 대한 의미는 굉장히 철학적이다. 이에 대한 스스로의 해답을 그려보기 위해 소설과 영화를 다시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전자가 특정 위치에서 발견될 확률은 정확히 예측할 수 있다. 일상용어로써의 확률은 불확실하다는 느낌을 강조하지만, 양자역학의 확률은 수학적으로 완벽하게 결정되는 실체와 비슷하다. 측정할 때마다 전자는 제멋대로 행동하는 것 같지만 결과를 모아보면 슈뢰딩거 방정식이 예측하는 확률분포와 완벽하게 일치한다는 뜻이다. 주사위 던지기를 생각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매번 무작위로 숫자가 나오지만 모아보면 각 면이 나올 확률은 정확히 6분의 1이다. 이런 의미에서 양자역학은 완전히 모른다는 의미의 불가지론이 아니다.

이쯤에서 정신이 혼미해지지 않으면 양자역학을 제대로 이해한 것이 아니라고 보어는 말했다. 리처드 파인먼(1965년 노벨물리학상)은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라고 단언했다. 그러니 너무 좌절하지 마시라.

- p129

리처드 파인먼의 말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말에 정말 빵 터졌다. 진심으로 소리 내어 웃었다. 두 가지의 감정이 들었기 때문이다. 

하나는 대학교 전공과목 중 하나로 배운 양자물리학 과목에서 양자역학을 처음 접했다. 슈뢰딩거의 고양이라는 황당한 실험 얘기를 들으며 고양이가 어떻게 되었을지에 대해 답하는 과제를 제출했던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하다. 이해가 안 가면 답답해하는 성격인 나는, 당시 양자역학을 이해하기 위해 해당 전공서적을 도서관에서 빌려 그 내용을 5회 정독했다. 1주일 내내 그 한 과목의 그 내용을 이해하기 위해 끙끙대다가 결국 '양자역학에 대한 이해'를 포기했다. 그리고 인정했다. 나는 멍청해서 양자역학을 진심 모르겠다고 말이다. 그래서 '양자역학을 이해하는 사람이 한 명도 없다'는 파인먼의 말은 그 자체로 위로가 된다. 

그때로부터 시간이 흐른 지금, 저자의 적당한 생략과 적절한 비유를 통해 양자역학의 개념을 다시 상기시켰다. 10여 년 전 이해하지 못했던 개념을 어렴풋이 떠올리며 윤곽을 그려내고 있었다. '오! 10여 년이 지나니 이제 조금 양자역학이 이해가 되려나 봐!'라고 생각했다. 그러던 찰나 '이 세상에 양자역학을 정확히 이해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다'는 파인먼의 이야기를 듣고 하마터면 오만해질 뻔한 나에게 코웃음을 쳐주었다. 이래서 사람은 겸손해야 하나보다. 하핫.



물리학자의 눈에 <그래비티>가 재난영화였다면, <인터스텔라>는 상대성이론의 탈을 쓴 SF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상대성이론에 대해 관심을 가진 적이 있었을까? 다 이 영화 덕분이다. 하지만 달을 가리키는데 왜 손가락을 보느냐는 화두가 있다. <인터스텔라>의 과학적 진위를 두고 말들이 많지만,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메시지는 다른 데 있는 게 아닐까? 지구는 인간의 소유물이 아니며,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도 아니다. 지구가 우리를 버리면 우리는 멸종되거나 떠나는 수밖에 없다. 인생은 빈손으로 와서 빈손으로 가는 거다. 우주도 그렇다. <인터스텔라>의 진짜 주인공은 블랙홀이 아니라 지구다. 영화는 우리가 지구의 주인이 아니라 세입자라는 것을 일깨워준다. 지구가 나가라면 나갈 수밖에 없다.

- p148

이 영화도 사실 기억이 정확히 나질 않는다. 하지만 과학 관련 영화를 관람할 때면, 종종 과학적 지식으로 말이 되네 안되네, 잘 만들어졌네 아니네 라는 평가의 잣대를 들이댔었던 과거의 나를 반성하게 만들었다. 달을 가리키는데 손가락을 보며 이러쿵저러쿵 이야기하는 것. 창작물에 있어서 창작자의 의도와 관점을 먼저 이해해보려 노력한 후에, 그리고나서 내 생각을 자유롭게 이야기해도 늦지 않을 것 같다. 


다른 주제의 얘기일 수 있지만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요즘 코로나19 바이러스 때문에 우리나라뿐 아니라 전 세계가 혼란스러운 시국이다. 인간이 만들어낸 여러 인공화합물질 때문에 자연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고, 결국 이전에는 발견되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현상이 다시 인간을 위협해오고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말이다. 자업자득. 인과응보. 어쩌면 정말 지구가 나가라면 인간은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 우리는 세입자니까. 멸종되거나 어디론가 떠나거나.



로또는 1부터 45까지의 숫자 6개를 맞히는 게임이다. 당첨 확률은 대략 800만 분의 1. 동전을 연속으로 23번 던져 앞면만 나올 확률과 비슷하다. 2017년 1등 당첨자의 평균 상금이 세금 빼고 16억 정도라니까 기댓값은 200원에 불과하다. 현재 복권 한 장의 가격은 1,000원이다. 필자 같은 빡빡한 물리학자는 절대 안 살 거라는 이야기다.

- p149

확률의 기댓값이 200원이라니! 로또를 몇 번 사봤지만, 로또를 사고 싶은 마음이 뚝 떨어져 나갔다.


결국 물리학이 우주에 대해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주는 걸까? 
물리는 한마디로 우주에 의미가 없다고 이야기해준다. 우주는 법칙에 따라 움직이다. 뜻하지 않은 복잡성이 운동에 영향을 줄 수도 있지만 거기에 어떤 의도나 목적은 없다. 생명체는 정교한 분자화학기계에 불과하다. 초기에 어떤 조건이 주어졌는지는 우연이다. 하루가 24시간이거나 1년이 365일인 것은 우연이다.

... 진화의 산물로 인간이 나타난 것에는 어떤 목적이 있을까? 공룡이 멸종한 것에 어떤 의미가 있을까? 진화에 목적이나 의미는 없다. 의미나 가치는 인간이 만든 상상의 산물이다. 우주에 인간이 생각하는 그런 의미는 없다.

그렇지만 인간은 의미 없는 우주에 의미를 부여하고 사는 존재다. 비록 그 의미라는 것이 상상의 산물에 불과할지라도 그렇게 사는 게 인간이다. 행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행복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게 인간이다. 인간은 자신이 만든 상상의 체계 속에서 자신이 만든 행복이라는 상상을 누리며 의미 없는 우주를 행복하게 산다. 그래서 우주보다 인간이 경이롭다.

- p253

저자의 말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우주는 정말 어떠한 의도도, 어떠한 의미도 없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하더라도 우리 인간은 행복을 추구하며 현재를, 오늘을, 지금을 살아간다. 어제보다 오늘 더 성장하기를 바라고, 함께 살아가는 가족 및 지인과의 교류 속에서 소소한 즐거움을 추구한다. 개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 사고가 물리라는 관점에서는 그저 원자로 이루어진 물질에 어떤 요인에 의한 에너지 변화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그래도 하나의 좁은 관점으로 세상을 보는 것보다, 다각도의 관점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것은 재미있는 일인 것 같다. 그만큼 인간으로서 사유의 폭이 넓어질 수 있지 않을까.  



필자가 과학자로 훈련을 받는 동안, 뼈가 사무치게 배운 것은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인정하는 태도였다. 모를 때 아는 체하는 것은 금기 중의 금기다. 또한 내가 안다고 할 때, 그것이 정확히 무엇을 의미하는지 물질적 증거를 들어가며 설명할 수 있어야 했다. 우리는 이것을 과학적 태도라고 부른다. 이런 의미에서 과학은 지식의 집합체가 아니라 세상을 대하는 태도이자 사고방식이다.

과학은 물질적 증거에 입각하여 결론을 내리는 태도다. 증거가 없으면 결론을 보류하고 모른다고 해야 한다. 증거 없이 논리로만 이루어진 이론이나 주장은 과학적이지 못하다. ... 종교나 철학은 자신의 이론으로 때론 지나치게 많은 것을 모순 없이 설명할 수 있다고 주장했으나, 과학자가 보기에 그냥 모른다고 했으면 좋을 부분도 많다는 생각이 든다. 이처럼 과학은 무지를 인정하는 태도이기도 하다. 무지를 인정한다는 것은 아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말할 수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과학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다. ... 과학의 진정한 힘은 결과의 정확한 예측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결과의 불확실성을 인정할 수 있는 데에서 온다. 결국, 과학이란 논리라기보다 경험이며, 이론이라기보다 실험이며, 확신하기보다 의심하는 것이며, 권위적이기보다 민주적인 것이다. 과학에 대한 관심이 우리 사회를 보다 합리적이고 민주적으로 만드는 기초가 되길 기원한다. 과학은 지식이 아니라 태도니까.

- p272

과학은 불확실성을 안고 가는 태도라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우리의 인생은 불확실성으로 가득 차 있다. 그 어떤 것도 정확히 예측할 수 없다. 그렇기에 미래를 미리 예측하는 사람들의 말에 귀 기울이고 때로는 열광하기도 한다. 사실 그것이 맞고 틀리기 보다 그러한 정보를 먼저 얻었다는 사실에 안도하고 싶은 사람들의 심리가 투영된 현상일지도 모른다. 잘 몰라도 아는 체하며 자신의 무지를 숨기려 하는 사람도 많고, 내가 알고 있는 지식과 내가 경험한 것이 세상 전부인 것처럼 틀에 갇혀 사는 사람도 있고, 수많은 이론을 알고 있지만 실제 현실에서 적용 가능성이 없는 것들을 주장하는 사람도 많은 것이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세상이다. 저자의 말대로 과학이 지식의 집합체가 아닌 세상을 대하는 태도로 받아들이고, 불확실성을 인정하여 알고자 노력하는 사고방식을 갖춘다면 지금보다 좀 더 멋진 세상이 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과학 서적이라 과학적 지식이 잔뜩 들어있다. 하지만 저자는 과학적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이 책을 쓴 것 같지 않다. 물리학자들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을 소개하고, 그 지식을 공유하고, 기존의 잘못 받아들일 수 있는 통념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분명한 건 과학과 공학을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읽기엔 다소 전문용어가 많아 속이 울렁거릴지도 모른다. 이 책을 문과생에게는 추천하기가 조심스럽고, 이과 출신자들에게는 한 번쯤 읽으며 세상을 바라보는 자신만의 관점에 대해 생각해보길 권해보고 싶다. 




* 책 제목 : 떨림과 울림

* 저자 : 김상욱

* 출판사 : 동아시아

* 출간일 : 2018년 11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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