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노트 #75 <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
삶을 알고자 한다면
주변의 수많은 사물을 느끼고 감상하라.
아름다움은 그것을 볼 수 있는
'눈'을 가졌을 때만 볼 수 있다.
이쪽저쪽 바쁘게 뱅뱅 돌아보지만 여전히 '이해'라는 두 글자에 발목 잡히기 일쑤다. 이해관계에 있어서만큼 사람들은 절대 타협하려 들지 않는다. 자기 자신이 늘 1순위니 말이다. 사기, 학대, 갈취 등 온갖 악행이 벌어지는 것도 이 때문이다. 심미적 세계는 이해관계를 초월한 독립된 세상이다. 의지의 세계라고 해두자.
예술을 창조할 때나 감상할 때, 사람들은 이해관계가 얽힌 현실세계에서 이해관계가 전혀 존재하지 않는 이상세계로 옮겨가고자 한다. 예술 활동이란 '무소위이위無所爲而爲', 즉 목적 없이 하는 행위에 해당한다. 나는 학문을 하건 사업을 하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목적 없이 하는 행위'에 대한 기대를 갖고 있다고 믿는다. 자신이 하고 있는 학문이나 사업을 그 자체로 하나의 예술품처럼 여기는 것이다. 이는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고 이상과 감정에 대한 만족을 추구할 때 진정한 성취감을 맛볼 수 있기 때문이다. 멀리 내다볼 줄 아는 뛰어난 안목과 대범한 마음가짐이 있을 때라야 사업도 성공하는 법이다. 이러한 안목과 마음가짐이 없다면 이 사회엔 출세에 눈이 먼 정치꾼, 경제범들만 득실거리게 될 것이다. 이런 인종들이 많아질수록 사회는 점점 더 부패할 수밖에 없다. 당과 직위를 악용하는 정치가, 경제학자 그리고 사이비 철학자와 과학자들이 주는 인상을 딱 한마디로 정의하면 바로 '저속함'이다.
... 세속적인 사람은 '심미적 세계에 대한 소양이 없는' 사람이다.
내가 이 편지를 쓰는 목적은 아주 단순하다. 바로 세속적인 것을 피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기 위해서다. 사실 이 문제는 개인의 성격, 성향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어서 말로 표현하기 쉽지만은 않다.
- p8
사물을 바라보는 시각은 천차만별이다. '아름다운가, 추한가'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하나의 시각이다. 그것이 '진짜인지, 가짜인지'를 보는 것 역시 하나의 시각이며 '선한 존재인지, 악한 존재인지' 눈여겨보는 것도 또 다른 시각이다. 같은 사물을 두고도 보는 시각은 제각각이며 이를 통해 발견하는 현상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 p16
사람은 자신이 처한 환경 속의 사람과 사물에 대해 애증의 감정을 갖기 마련이며, 이를 추종하거나 또는 벗어나려는 의지와 행동도 보인다. 이것이 바로 실용적인 태도이다. 실용적인 태도는 실용적인 인식에서 비롯되며 실용적인 인식은 개인의 경험에서 우러나온다. ...
'인식'은 어떤 사람이나 사물을 접했을 때 마음속에서부터 그 의미를 이해하려는 작용이다. 의미에 대한 이해는 처음에는 단지 그 사람, 또는 그 사물이 갖는 실용적 가치에서 시작된다. 실용적 가치에 대한 이해를 하고 나면 그 사람이나 사물에 대한 개별적 반응과 행위가 수반된다. ...
과학적 태도는 실용적 태도와 완전히 다르다. 매우 객관적이며 이론적이다. 객관적 태도라 자신의 선입견과 감정을 완전히 배제하고 '목적 없이 하는 행위'에 근거해 진리를 탐구하는 자세를 말한다. 이론은 실용성, 즉 실제와 상반되는 개념이다. 이론은 본래 실용성에서 출발했지만 과학자들의 목적은 단순히 실용성을 찾는 데 있지 않다. ...
과학적 태도에는 감정과 의지가 배제되며 추상적 사고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과학자들은 혼돈스러운 상황 속에서 사물의 관계와 질서를 찾아내 개념을 정의하고 원리로부터 사례를 도출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원인과 결과를 규명하고 고유성과 우연성을 가려낸다. ...
실용적 태도, 과학적 태도를 통해 찾아낸 사물의 이미지는 독립적이지도 절연해 보이지도 않는다는 특징이 있다. ... 모든 정신을 집중해 독립적이고 절연한 이미지를 찾아내는 과정, 이것이 바로 심미적 태도의 가장 중요한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
의지와 추상적 사고를 벗어난 심리 행위를 '직감'이라고 한다. 그리고 직감으로 보는 독립적이고 절연한 모습을 '형상' 또는 '이미지'라고 부른다. 심미적 경험은 직감으로 이미지를 찾아내는 과정이다. '미'는 직감을 통해 발현된 사물의 이미지라는 특징이 있다.
실용적 태도에서는 '선善'을 최고의 목적으로 삼는다. 과학적 태도에서는 '진眞', 즉 진리가 최고의 목적이다. 그렇다면 심미적 태도에서 최고의 목적은 무엇일까? 바로 '미', 아름다움이다.
- p22
'생명'과 '행위'는 동일한 의미를 지닌다. '행위'가 자유로울수록 '생명'은 더욱 의미 있다. 인류의 실용적 행위는 모두 '유소위이위有所爲而爲', 즉 '무언가를 하기 위한 행위', '목적이 있는 행위'에 해당한다. 이러한 행위는 삶을 영위하기 위해 필요한 행위이다. 하지만 인간의 심미적 행위는 '무소위이위', 즉 '목적이 없는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필요에 의해 움직이는 행위가 아니므로 온전히 자신의 소망에 따라 이뤄지는 행위다. 목적이 있는 행위를 하다 보면 사람은 환경에 좌우되는 노예가 되기 쉽다. 이에 반해 목적이 없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자신의 정신까지 자유로이 주재하는 존재로 거듭난다. ... 과학의 세계에서는 고립되고 절연 관계에 있는 사물이 아무런 의미가 없다. 반면 심미적 세계에서는 오히려 고립되고 절연한 존재가 그 본연의 가치를 인정받는다. 즉 '미'는 사물의 가장 가치 있는 일면을 부각시키고, '심미적 경험'은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순간에 해당하는 것이다.
- p24
정신분석학의 창시자 프로이트는 예술을 '성욕의 구현'이라고 보았다. 그는 성욕이 가장 원시적이고 강렬한 본능이며 사회의 도덕, 법률적 제약으로 충분히 만족되지 못하여 '무의식' 속에 잠재되어 있고, 이로 인해 콤플렉스가 생긴다고 주장했다. ... 종합해보면 프로이트의 예술관은 쾌락주의에 포함시킬 수 있을 것이다. ...
그런데 나의 원칙에서 보자면 프로이트 역시 쾌감과 미감을 혼동하고 있다. 예술적인 필요와 현실적인 필요를 헷갈리고 있는 것이다. 심미적 경험의 특징은 '목적 없이' 그 이미지를 감상하는 것이다. 창작 또는 감상의 순간에는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에서 반드시 빠져나와 객관적인 입장을 견지해야 한다. 마치 스스로 감상하는 자의 입장에 서 있듯 해야 한다. ...
미적 경험은 직관적이며 따지지 않는다. 예술품에 정신을 집중하다 보면 자신마저 망각하게 된다. 내가 감상하는 이미지를 좋아하는지 어떤지 따지지도 않는다. 또 이미지를 보고 쾌감이 있었는지 없었는지 따지지 않는다. 예술품을 감상하는 집중력이 클수록 자신이 그것을 감상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잊게 되며, 이때 생기는 감정이 쾌감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쾌감을 느꼈다면 그것은 직관적 감상이 아니라 무수한 생각이 반복과 성찰을 거듭해 형성된 '반성'의 감정이 변질된 것이다.
- p62
비평적 태도는 '감상적 태도' 즉 '심미적 태도'와 상반된다. 비평적 태도는 냉정하고 감정의 개입을 허용하지 않는다. 이 책의 서두에서 사려본 '과학적 태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이 책의 서두에서 살펴본 '과학적 태도'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다. 감상적 태도는 나의 감정과 사물의 형상이 서로 교류하는 것이다. 비평적 태도는 반성과 이해를 요하지만 감성적 태도는 오로지 직감에 의존한다. 비평적 태도는 아름다움과 추악함에 대한 보편적 기준이 확립되어 있다. 그래서 작품 밖에서 그것을 판단하도록 요구한다. 감상적 태도는 그 어떤 편견과 선입견도 배제한 채 작품 안에서 작품의 생명을 함께 나눈다. 문학예술 작품이 비평적인 태도만을 견지한다면 나는 나, 작품은 작품일 뿐이므로 작품에 깊이 도취될 수도 없고 진정한 심미적 경험도 영원히 할 수 없다.
- p86
'미감'이란 무엇인가? 능동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미감은 이미지에서 비롯된 직감이고, 이러한 이미지는 독립적이며 현실적인 삶과는 거리를 두고 떨어져 있다. 심미적 경험 가운데 자신과 사물의 관계에 대해 알아보았고, 자신의 감정과 사물의 형상이 서로 교감할 때 진정한 미의 이미지를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소극적인 측면에서 보자면 미감은 의지와 욕망이 수반되지 않으므로 실용적 태도와 다르며, 추상적 사고를 거치지 않았으므로 과학적 태도와도 다르다. 보통 사람들은 쾌감과 연상, 고증과 비평을 심미적 경험으로 여기는 경우가 있으나 이는 큰 착각이다.
'미', 즉 '아름다움'은 심미적 경험에서 생겨난다.
- p90
철학자들은 대개 이성을 믿는 약점이 있다. 하지만 예술을 감상하기 위해 필요한 것은 감정이지 이성이 아니다. 사물이 아름답다고 느끼는 건 온전히 직감에 의해서지 칸트가 말한 것처럼 판단에 따른 것이 아니다. 또 헤겔이나 톨스토이의 주장처럼 각각의 사물에서 보편적 원리를 찾아내는 것도 아니다. 이러한 행위는 모두 과학적 또는 실용적 행위에 해당하는데, 심미적 경험은 이들 행위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아름다움은 온전히 사물에 있는 것도 아니지만 사물과 무관한 것도 아니다.
... 아름다움은 사람의 마음과 사물이 결합해 탄생한 신생아와 같다.
미감은 이미지에 대한 직감이다. 이미지는 사물에 속하지만 사물의 것만은 아니다. 내가 없다면 이미지를 보는 주체가 없기 때문이다. 직감은 내 것이지만 온전히 내 것이라고만 보기 어렵다. 사물이 없다면 직감이 동요할 리 없기 때문이다. 아름다움 속엔 사람의 감정과 사물의 이치가 있다. 둘 중 하나만 없어도 아름다움은 나타나지 않는다.
- p93
예술가는 절반은 시인이요, 절반은 장인이다.
시인의 오묘한 언어와 장인의 솜씨가
함께 발휘되어야 한다.
장인의 솜씨만 있고 시인의 언어가 없다면
창작이 불가능하다.
또 시인의 언어만 있고 장인의 솜씨가 없다면
완벽한 창작이라 하기 어렵다.
'현실적 삶'은 인생을 다소 편협한 시각으로 본 것이다. 현실적 삶이 인생이라고 착각하는 사람들은 예술과 현실적 삶은 서로 동떨어져 있다고 여기며 자신의 삶에서 예술에 큰 가치와 비중을 두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예술의 가치와 지위를 보호하려는 사람들은 예술을 억지로 현실적 삶 속에 끼워 넣으려 한다. 이는 모두 예술을 오해하고 인생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행위이다. 현실적 삶은 인생 전반을 놓고 볼 때 하나의 단편적인 단계에 불과하다. 따라서 예술과 현실적 삶의 거리를 인정할 때 예술과 인생의 장벽을 무너뜨릴 수 있다.
엄격히 말해 인생을 떠난 예술은 무의미하다. 예술은 감정과 감흥의 표현이다. 인생은 감정과 감흥의 원천이다. 따라서 예술을 떠난 인생도 무의미하다. 창작과 감상은 모두 예술 행위이며 창작도 감상도 없는 인생은 모순투성이다. 인생은 넓은 의미의 예술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개인의 삶의 역사는 그 자신의 작품이다. 이 작품은 예술일 수도 있고 예술이 아닐 수도 있다. ... 삶을 이해하는 사람은 예술가이며 그의 삶은 예술 작품이 된다. 삶을 사는 것은 글을 쓰는 것과 같다. 올바른 삶에는 훌륭한 문장에서 발견되는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 p183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감상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