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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Jun 26. 2020

아무튼, 술

독서노트 #76 < 아무튼, 술 >

뭐니 뭐니 해도 가장 좋아하는 소리는 
소주병을 따고 첫 잔을 따를 때 나는 소리다.
똘똘똘똘과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에 있는,
초미니 서브 우퍼로 약간의 울림을 더한 것 같은
이 청아한 소리는 들을 때마다 마음까지 맑아진다.


소주 오르골이라니!!! 이 책 <아무튼, 술>을 쓴 김혼비 저자는 정말 진정한 술꾼인 듯싶었다! '아무튼'으로 시작하는 책 시리즈 제목들을 많이 봤었는데, 사실 이 책이 어떤 책인지 아무런 정보도 없이 그냥 제목에 이끌려 덥석 사버린 것이었다. 술에 관한 책이겠거니 했던 이 책은, 술을 좋아하는 저자의 술 이야기였던 것이다.


소제목 하나하나, 그리고 그 에피소드 하나하나가 참 재미있고 표현이 찰지다. 소주 오르골이라니!! 소주 오르골이라니!!!!!!! 너무 웃겼다. 그리고 저자는 '똘똘똘똘' 내지는 '꼴꼴꼴꼴' 사이 어디쯤 나는 이 소주 오르골을 다시 듣기 위해 소주 2병을 한 번에 시켜서 모두 병을 오픈한다. 그리고 A병의 소주를 한 잔 따르고, B병의 소주를 다시 A병에 옮겨 담아 마치 꽉 찬 소주병으로 다시 만들어버린다. 이걸 반복하면 최소 A병을 모두 마셔 없앨 때까지 소주 오르골을 들을 수 있다는 기발함과 참신함을 선보였다!! 정말 신박한데!!!?!



기사님께 무척 고마웠다. 전화를 끊자마자 장문의 문자를 보냈다. 어젯밤 정말 죄송했다는 사과와 지갑 정말 감사하다는 인사를 담아서. 몇 시간 후. 그에게서 답이 왔다. 이모티콘 하나 없는 짤막한 답, "네. 힘내세요."
...
친구도 웃겼는지 숨넘어가는 소리를 섞어가며 폭소를 터뜨렸다.
"그러니까. 아, 웃겨. 다짜고짜 힘...."
이상한 일이었다. 웃음이 채 멎지도 않았는데 갑자기 목이 콱 메었다. 목소리를 가다듬으려는데 어찌 해볼 수 없는 속도로 눈물이 밀려오더니 순식간에 툭툭 바닥으로 떨어졌다.
...
나는 어려서부터 힘내라는 말을 싫어했다. 힘내라는 말은 대개 도저히 힘을 낼 수도, 낼 힘도 없는 상태에 이르렀을 때에서야 다정하지만 너무 느지막하거나 무심해서 잔인하게 건네지곤 했고, 나를 힘없게 만드는 주범인 바로 그 사람이 건넬 때도 많았다. 나는 너에게 병도 줬지만 약도 줬으니, 힘내. 힘들겠지만 어쨌든 알아서, 힘내. 세상에 "힘내"라는 말처럼 힘없는 말이 또 있을까. 하지만 이때만큼은 "힘내"라는 말이 내 혀끝에서 만들어지는 순간, 매일매일 술이나 마시고 다니던 그 시간들 속에서 사실 나는 이 말이 듣고 싶었다는 걸, 스스로에게 말하고 싶었다는 걸 깨달았다. 누가 무슨 의도로 말했든 상관없이. 그냥 그 말 그대로, 힘내.
...
전화를 붙잡고 둘이서 한바탕 울었다. 아, 진짜 끝까지 엉망진창이야...
...
아무런 힘이 없어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도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지는 말일지라도, 때로는 해야만 하는 말이 있다. 해줄 수 있는 게 이런 쉬운 말밖에 없을지라도, 이런 쉬운 말이라도 해야만 하는 순간이 있다. 언젠가 가닿기를, 언젠가 쉬워지기를 바라는 누군가의 소망이 단단하게 박제된 말은 세상에 있는 것이 없는 것보다는 나으니까. 바닥에라도 굴러다니고 있으면 나중에 필요한 순간 주워 담아갈 수 있으니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어쨌든 우리는 언젠가 힘을 내야만 하니까. 살아가려면.

- p61

저자는 술과 관련된 수많은 에피소드를 들려주었다. 내가 이 책을 읽는 도중에 유일하게 눈물을 흘리게 만든 부분이 바로 이 부분이었다. 책을 읽다 말고 나는 엉엉 울어버렸다. 책을 덮고 휴지로 코를 흥 풀어대며 서럽게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왜 그랬을까... 어쩌면 나에게도 지금 당장 필요한 말이 '힘내'라는 뻔하디 뻔한 말 한마디였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 역시 다른 사람과 비슷하게, 타인에게 '힘내'라는 말을 자주 해왔다. 항상 진심이었다. 물론 때로는 누군가의 귀에 가닿기 전에 허공에서 툭 떨어질 때도 있는 말이었지만, 진심이든 인사치레든 '힘내'라는 말은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다 우연히, 그런 말을 들었다. 2030 세대들이 가장 듣기 들어하는 말. 힘내라는 말. 현실은 지옥 같고 시궁창 같고 N포자들이 넘쳐나는데 힘내라는 말이 얼마나 무책임한 줄 아느냐는 말. 그 말을 들었을 때 친구나 동료나 후배들에게 '힘내'라는 말을 건네기가 두려웠었다.


그런데 결국 아무리 필요 없어도 힘이 되는 말 한마디는 '힘내'라는 말이었다는 저자의 말에 공감이 되었던 모양이다. 이렇게 글을 적는 순간에도 또다시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떤 술꾼들은 취기에서 술맛을 보듯이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 치기 어린 상태가 아니면 모험할 엄두를 못 내는 겁 많은 나 같은 사람이.
...
완전히 '닫는다'는 인생에 잘 없다. 그런 점에서 홍콩을 닫고 술친구를 열어젖힌 나의 선택은 내 생애 최고로 술꾼다운 선택이었다. 그 선택은 당장 눈앞의 즐거운 저녁을 위해 기꺼이 내일의 숙취를 선택하는 것과도 닮았다. 삶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지만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이기도 하니까. 가지 않은 미래가 모여 만들어진 현재가 나는 마음에 드니까.

- p90

몇 가지 단어가 눈에 들어왔다. 선택의 총합, 하지 않은 선택의 총합, 가지 않은 미래, 현재, 그리고 치기라는 말들. 인생은 선택의 기로 그 자체다. 무언가를 택할 것인가로 길을 만들어 간다. 반대로 말하면, 무언가를 버릴 것인가로 길을 만들어 가기도 한다. 비우지 않으면 채울 수 없는 것이 우리 삶의 그릇이지 않은가. 그런데 그 선택은 얼마나 신중히 이루어지는 걸까? 찰스 두히그의 말을 빌리면 우리가 하는 결정의 40%는 습관에 의한 것이라고 한다. 신중한 의사결정의 과정을 거친 것이 아니다. 저자가 말한 '어떤 사람은 치기에서 결단의 힘을 본다'이라는 말이 자꾸만 눈에 밟혔다. 내가 한 선택 중에 많은 부분이 혹시 치기에서 나온 결단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한들 소용없지만, 때로는 무언가에 의지해 결단을 내리는 것, 어쩌면 자기 합리화가 필요할지도 모른다. 그렇게라도 용기 낼 수 있음에 감사하기도 하니까 말이다. 이 부분을 읽었을 때 딱 떨어지게 표현하긴 어려웠지만, 이런저런 생각이 뒤엉켜 마음속 소용돌이가 일어나는 느낌이었다.



S의 경우, 혼자 순두부찌개에 반주를 하다가 집요하게 쳐다보는 일군의 남자들을 마주쳤는데 그날따라 이상하게 좋지 않은 느낌이 들어 혼술 인생 17년 만에 처음으로 먹다 말고 그냥 계산하고 나왔다고 한다. C의 경우, 포장마차에서 혼자 우동과 소주를 마시는 중년 남자가 옆에 와서 화를 내기 시작했고, 주인아주머니는 C에게 돈 안 받을 테니 지금 먹던 거 멈추고 그냥 빨리 가라며 한쪽으로 도망갈 길을 터줬다. 그날 이후 C는 포장마차에서 절대 혼술을 하지 않는다. 그밖에 이 사례들과 비슷한 M의 경우, 또 다른 H의 경우, Y의 경우 등등...
이니셜로 등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여자다. 사실 여자들의 혼술에는 예전부터 감수해야 할 몫들이 늘 있어왔다. ...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이야~ 세상 참 좋아졌다. 여자가 초저녁부터 밖에서 혼자 술도 마실 수 있고" 같은, 세상이 그리 좋아지지 않았다는 증거이자 이유 그 자체인 사람들의 비아냥 섞인 시비를 겪었다는 이야기는 아직도 어딘가에서 들려왔다.
...
그동안 여자 밖혼술러들은 크고 작은 그런 반응들을 '그러려니' 하는 상수로서 이미 계산에 넣은 후 무시하거나 외면하는 방법을 터득했고, 때로는 그러면 그럴수록 전투력이 상승해서 보란 듯이 더 당당하게 술을 마시고 나오기도 했다. 남자 밖혼술러들에게는 없을 상수였다. 여자 혼자 타는 택시와 남자 혼자 타는 택시가 다른 세계를 싣고 달리듯이.  

- p153

슬펐다. 남녀 편 가르기할 생각은 없지만, 과거의 통념과는 많이 달라지는 지금 시대를 서로 이해하기 위해 진통을 겪는 과도기라고 생각이 들었다. 저자는 집혼술러가 아닌 밖혼술러였다. 나는 밖혼술보다는 집혼술을 선호하는 편이다. 아마도 저자가 말하는 '그러려니'하는 상수로 계산에 넣고 꾸역꾸역 눈치 봐가면서 먹는 술이 맛이 없을 거라 생각했기에, 내 돈 주고 맘 편히 먹을 수 없는 세상과 싸우느니 그냥 회피해버리는 비겁한 방관자의 길을 택한 게 아니었나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택시와 비유하다니... 예전에 부모님이 내가 택시를 타면 항상 택시 기사 이름과 차번호를 외우거나 문자로 남기라고 했었는데... 우리 오빠한테는 그런 적이 없었는데... 뭔가 모를 씁쓸함이 마구 밀려들었다.



그렇게 짧고 굵었던 와인 대탐험은, 살다 보면 이제 막 움트려는 새로운 세계를 확장하는 대신 축소해야 하는 순간 또한 있다는 것을 알려주며 막을 내렸다.
...
지금 당장 감당할 수 없다면 때로는 나의 세계를 좀 줄이는 것도 괜찮다. 축소해도 괜찮다. 세상은 우리에게 세계를 확장하라고, 기꺼이 모험에 몸을 던지라고 끊임없이 메시지를 보내지만 감당의 몫을 책임져주지는 않으니까. 감당의 깜냥은 각자 다르니까. 

- p137

그렇다. 많은 선구자들, 성공자들은 말한다. 시도하라. 경험하라. 확장하라. 그릇을 넓혀라. 하지만 어떤 행동이든 내가 하는 행위에는 자유와 동시에 책임이 따른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지 없는지 주제 파악을 먼저 해야 한다. 뱁새가 황새를 따라가면 다리가 찢어진다. 남에게 좋은 것이 반드시 나에게도 좋으라는 법은 없다. 감당의 깜냥을 가늠하는 것, 스스로를 객관화해서 보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필요하지 않을까. 




어떠한 기대나 정보를 갖고 이 책을 읽은 것은 아니었다. 단순히 호기심에 집어 든 책. 술에 대한 지식이 들어있을까, 다양한 술에 관한 이야기를 접할 수 있을까 등 궁금했다. 그런데 술을 정말 좋아하는 애주가의 신념, 과거의 경험, 술과 인생의 관계 등이 실린 술꾼의 재미난 에세이였다. 가볍게 읽으면서도 때로는 현재를 살아가는 우리의 인생을 돌아보게 해주는 달콤 쌉싸름한 책이었다. 무엇보다 저자의 맛깔스러운 입담이 예술이었다.




* 책 제목 : 아무튼, 술

* 저자 : 김혼비

* 출판사 : 제철소

* 출간일 :2019년 5월 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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