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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Dec 03. 2020

수능은 나에게 지독한 지병이었다.

고통 버튼을 누르다 #1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을 나의 이야기

마치 그것을 얘기하면 안 되는 것처럼
둬 버릇하면 안 돼요.


우연히 보게 된 JTBC <싱어게인> 이라는 음악 오디션 경쟁 프로그램에서 김이나 작사가 심사위원이 사고로 인해 아픔을 간직하며 '웃으면 안 될 것 같아' 힘들어하던 레이디스 코드 가수에게 한 말이었다. 나는 폭풍 오열을 했다. 가수의 입장에 감정이입이 되어 슬프기도 했지만, 김이나 심사위원의 말은 내 가슴을 후벼 팠다. 나는 내 고통을, 내 아픔을 항상 이야기하면 안 되는 것처럼 살아왔기 때문이다. 한참을 울었다. 그리고 지나간 고통을 쿨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되고 싶었다. 과거는 과거고 현재는 현재라는 걸 알고 살아가고 싶었다. 그리고 그 가수처럼 나도 '이제는 웃을 수 있는' 사람이고 싶었다. 물론 그 가수처럼 누군가를 잃은 중대한 슬픔은 아닐지라도 각자 다들 자기만의 아픔을 하나씩은 끌어안고 살지 않는가. 별것도 아닌 일을 별거처럼 생각해온 나를 청산하고 싶었다.


음악을 너무 좋아했지만
음악이 날 배신했다는 생각이 들어서
이후로는 음악을 아예 안 했다.


타이니지 출신 가수의 이야기였다. 나의 이야기 같았다. 음악 대신 수학이 들어가 내 가슴을 쿡 찔렀다. 이 가수 역시 노래를 잘 불렀고, 김종진 심사위원은 격려와 위로의 말을 건넸다.


운명이 나를 배신했다고 느끼는 걸 저도 겪었어요.
그런데 지나고 보니 계절이 바뀐 거더라고.
그동안 잠깐 겨울잠을 잤다고 생각해요.


코끝이 찡하고 눈시울이 붉어졌다. 나에게 하는 소리 같았다.




오늘은 대학입시를 준비한 학생들에게 가장 중요한 수능 날이다. 나에게 수능은 아픔이다. 그리고 웬만해서는 내 입으로 스스로 꺼내지 않는 나만의 금기어이기도 하다. 열에 아홉은 하는 말,

"나 수능 망했어."

이 말은 내게도 해당되었다. 그래서 참 별일 아니다. 대부분 망하고 나는 그 대열에 들어있는 평범한 사람이니까. 열에 한 명 정도 운 좋게 평소보다 좀 더 잘 나오거나, 평소만큼 했다는 말을 한다.


대한민국에서 고3을 보냈다면 누구나 거치는 일이며, 수능 안 망해본 적 없는 사람이 거의 없는데 왜 나는 그토록 '수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던 것일까. 이제는 15년 됐다. 그런데도 매년 8월쯤 수능 D-100이라는 둥, 11월쯤 수능일이 어쩌고 저쩌고 하는 뉴스가 나올 때마다 나는 귀를 닫았고, 눈을 돌려야 했다. 15년이 지나도 쉽게 괜찮아지지 않았으니까. 수능은 그렇게 나에게 오랫동안 쉽게 떨어지지 않는 지독한 지병이었다. 언론에서 '수능'이 잘 치러지도록 모든 준비와 시스템이 잘 굴러가길 기원하고, 모두가 수험생들을 다 함께 응원하자는 메시지가 나올 때마다 나는 어떠한 감정도 일지 않도록 외면하는 거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나는 수능을 세 번 치렀다. 수능도 수능이지만, 내가 갖고 있는 상처는 '대학입시'라는 말과 '학벌'이라는 말이 더 맞을지도 모른다. 중학교 시절 외고 준비를 했었다. 외고 입시 학원에서 어떤 선생님이 뇌리에 잊히지 않는 말을 했다.

"인생에는 크게 3가지가 평생을 쫓아다닐 거야. 학벌, 직업, 결혼. 그러니까 너희들은 첫 번째 관문인 대학입시부터 성공해야 해."

나는 외고 입시에 실패했지만, 그렇게 큰 아쉬움은 별로 없었다. 그냥 학교에서 공부 좀 한다는 아이들이 우르르 과학고와 외고를 준비하는 건 마치 트렌드와 같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대학입시는 달랐다. 그 부담감이. 서울대, 연, 고대를 가지 못하면 마치 큰 일이라도 나는 것처럼 주위의 모든 어른들은 말했다. 그리고 그 프레임 속에 모든 생각이 갇혔고, 나는 그 모든 부담감을 꾸역꾸역 감내해야만 했다. 공부에만 집중할 수 있었던 시기였다면 더없이 괜찮았을 텐데 내겐 모든 게 순탄치만은 않게 느껴졌다.


기억이 희미하지만 고1 때인지, 고2 때인지 아버지의 사업이 완전히 망했다. 그리고 집안 분위기는 어두워졌다. 집에 조금이라도 돈이 될만한 물건들은 하나둘 처분되었다. 부의 상징이었던 그 당시 운동기구도, 잘 치진 않았지만 거실 한 구석 차지하던 내 피아노도 하나씩 사라져 갔다. 그리고 가장 큰돈이 되는 집마저 팔아야 했고, 아주 작은 월세 집으로 이사를 가야 했다. 드라마에서 보던 빨간딱지가 붙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사업이 망해 모든 재산이 압류되고 경매로 넘어간다는 게 뭔지 조금은 알게 되었다. 개인 파산 신청을 했다지만 늘 빚쟁이가 언제 쫓아올지 모르는 두려움에 떨어야했다.


학교 급식이 얼마였는지 기억은 잘 안 나지만, 나는 불우한 가정임을 입증하여 학교에서 지원을 받아 급식을 먹게 되었다. 다른 친구들이 알까 그 급식 신청서를 낼 때의 창피함을 매 분기별 감내해야 했다. 석식은 다이어트를 한다는 허무맹랑한 이유로 신청조차 하지 않고 늘 굶었다. 저녁 시간은 늘 쪽잠을 자는 시간이었다. 나는 학교에서도 집에서도 더 이상 웃을 수 없었다. 집이 망했는데 내가 무슨 자격으로 웃을 수 있겠는가. 근심 걱정이 가득한 집에서 웃는 것은 사치였다. 힘들어하는 부모님 앞에서 내가 웃는다면 그건 죄를 짓는 것과 같이 느껴졌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오로지 좋은 대학에 들어가 부모님의 어깨를 펴 드리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었다. 나는 그래야만 했다.


고등학교 내신 성적을 적당히 잘 유지해서 이과 2등이었다. 서울대 수시전형 중에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지역균형 전형인지 내신만 가지고 3명에게 지원서를 낼 수 있는 자격이 주어졌었다. 문과에서 2명, 이과에서 1명이 뽑혔다. 당연히 내가 아닌 이과 1등에게 그 자격이 주어졌다. 대신 나와 우리 반 친구 1명에게 수시 전형 중에 특별전형으로 추가로 지원할 수 있는 자격이 부여되었다. 명칭은 기억이 안 나지만, 수학 또는 과학 중에 상위 1프로 안에 들면 해당 분야를 잘한다는 증명으로 특수 전형을 지원할 수 있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나는 수학, 친구는 과학으로 자격을 부여받았다. 열아홉 인생 처음으로 자기소개서라는 것도 작성하게 되었다. 처음 써보는 자소서에 심혈을 기울여 무사히 서류를 통과했다.


당시 집과 학교에서 좀 떨어진 학원에 다녔다. 대부분의 학생들이 그렇듯이 국영수 과목을 들었다. 하지만 학원비를 감당하지 못하게 될 형편이 되자 그만두려고 했다. 하지만 당시 유명 스타 강사였던 수학 선생님은 나의 딱한 사정을 봐주셨다. 학원에 강력한 힘이 있었던 그 선생님은 원장 선생님에게 말해 내가 모든 과목을 무료로 듣도록 힘써 주셨다. 하지만 국어를 잘 못하고 영어 실력도 더 이상 잘 오르지 않는 나에게 무료로 수업을 듣는 것은 점점 부담이 되었다. 결국 수학 과목만 꾸준히 들었다. 수능 전 마지막 강의까지 돈 한 푼 내지 않고 말이다.


서울대 면접을 위해 강남 유명 학원을 알아내어 다니게 되었다. 일주일에 2번, 2주일을 가는데 80만 원이었나 하는 어마 무시한 가격이었다. 요즘 학원비는 잘 모르겠지만 15년 전 당시 무료로 받았던 수학 강의도 대략 월 20만 원 언저리였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수학 선생님도 강남에서는 몸값이 훨씬 높았지만 강북에서는 저렴하게 해 주셨던 걸로 기억한다. 그 면접 학원이 터무니없는 수업료를 불렀지만 엄마는 딸의 입시를 위해 요즘 말로 영끌해서 갖다 바쳤다. 드디어 면접 날. 서울대 공대 건물에서 면접을 마치고 나온 나는 간신히 눈물을 참았다. 완전 망했기 때문이다. 한껏 기대에 부푼 부모님의 낯을 볼 수 없어 고개만 떨구고 돌아왔고, 혼자 이불속에서 울었다.


수줍음이 많던 나는 고3 내내 무료로 학원을 다녔음에도 그 학원 수학 선생님께 감사하다는 마지막 말 조차 하지 못했다. 그 선생님은 서울대 합격해서 내가 잘되는 게 보답하는 길이라고 했는데, 나는 결국 합격하지 못했다. 나는 학원을 공짜로 다녀놓고도 아무런 보답도 해드리지 못했다. '나 수능 망했어.'라고 허허 웃으며 말을 하면 보통 친구들은 '나도 망했어. 하하하하 한 50점 더 떨어진 거 같아.' 이런 화답이 돌아왔다. 정확히 기억은 안 나지만 나도 가채점을 하고 절망했다. 대략 120점 정도가 떨어졌으니까. 무엇보다 나는 믿었던 '수학'에서 뒤통수를 맞았다. 수학이 나를 배신했다. 단 한 번도 모의고사에서 1등급 밑으로 내려가 본 적이 없던 내가... 말 그대로 폭 망했다. 주식 그래프로 보면 완전 역대급 하한가를 쳤다고나 할까.


고3 담임을 하면 선생님들끼리 자기 반 학생들이 얼마나 좋은 대학에 많이 보내느냐가 실적인 듯하다. 당시 담임 선생님은 나의 폭망 소식을 듣고 전략을 짜기 시작했다. 이 점수로는 서울 상위권은 글렀다. 그런데 담임은 내가 예체능도 잘한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다. 나는 수학만 1등이 아니라 미술도 1등, 체육도 1등이었으니까. 담임 선생님은 고대 체육학과에 넣어보자고 했다. 담임 선생님이 고대 출신이다. '너 정도 실력이면 체력 테스트 통과할 수 있을 거'라며, 대학 간판을 위해 과를 조정하는 방법을 고안해냈다. 우리 학교 예체능과 친구들이 들으면 아주 큰 일 날 소리였다. 3년 동안 엉덩이 붙이고 앉아 공부만 한 나에게 가서 뛰고 오라니. 나는 대신 미대로 전향할 방법을 찾았다. 미대로 유명한 서울대, 홍익대, 국민대 위주로 알아봤다. 물론 내신만 보는 전형이 극히 드물게 있었지만, 역시 실기가 걱정이었다. 3년 동안 실력을 갈고닦은 예체능 친구들을 실기에서 무슨 수로 이긴단 말인가. 미술학원에서 상담을 받아봤지만 나는 가능성이 없어 그것도 접었다. 마음엔 안 들지만 이 성적으로 어딜 갈 수 있을지 가늠해보고 싶었다. 정시로 가나다군을 살펴 어느 대학 한 군데에 넣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이미 집에다간 수능 망하자마자 '난 재수할 거야'라고 말한 상태여서, 지원서를 넣겠다는 나의 말에 엄마는 딱 잘라 거절했다. 지원 비용이 부담스러운 8만 원이었기 때문이다.


재수학원에서도 이과반에서 가장 우등한 반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기적은 일어나지 않았다. 나는 두 번째 수능도 망하고 말았다. 같은 반 사람들은 의대, 약대, 못 가면 상위권 공대 정도였다. 나는 쭈그리가 되었다.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도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이제는 성적에 맞춰 대충 대학에 들어가는 게 맞았다. 대학에 가서도 모든 게 만족스럽지 않았던 나는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수능을 보기로 결심했다. 수능이라는 큰 시험에 약하다는 걸 이미 두 번이나 겪었기에 나는 눈을 낮추었다. 약간 상위권이라 생각되는 대학에 수시전형을 알아보고 다시 넣게 되었다. 3년간 유지한 내신이 아까웠기 때문이다. 그런데 추천서가 필요했다. 얼굴에 철판을 깔고 고등학교로 갔다. 고2 담임 선생님을 찾아갔다. 그리고 추천서를 부탁했다. 흔쾌히 적어주시면서 '우리 반 애들도 너같이 열심히 하면 좋겠다'라고 응원해주셨다. 감사했지만 나는 왠지 삼수씩이나 하는 이 상황이 선생님이 말하는 그런 인재가 아닌 것 같아 죄송스러웠다. 그리고 나는 모 대학 수학과인지 건축학과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거나 늘 두 전공을 선호했다) 지원했고 서류에 붙었다. 그리고 면접을 보았다. 수능 두 과목 최저 기준이 걸려있었다. 나는 세 번째 수능도 역시 망했다. 가채점도 하지 않았고, 성적표를 가지러 가지도 않았다. 고등학교 담임선생님들을 마주할 낯이 없었다.




세 번째 수능은 이미 예견된 실패였을지도 모른다. 나는 휴학을 하지도 않았고, 2학기 중간, 기말고사를 모두 소화해냈기 때문에 내 에너지는 다른 수험생들에 비해 분산되었을 것이다. 겸허히 결과를 받아들여야 했다. 세 번째 수능은 구질구질하게 떠나간 연인을 붙잡고 늘어지는 미련과 같은 것이었으리라.


편입도 잠깐 생각했지만 접었다. 더 이상 대학 간판 하나 때문에 내 20대 초반을 깡그리 날리고 싶지 않았다. 나는 왜 그토록 대학입시에 목을 매야 하는지 스스로에게 질문하기 시작했다. 3번의 수능을 통해 그 당시 내가 얻은 결론은 '나는 큰 시험에 약하다'였다. 편입 공부해봤자 어차피 떨어질 것이다. 공무원 공부를 하는 선배들도 많았다. 공무원 시험 준비를 해야 하나? 아니다. 나는 큰 시험에 약하니 보나 마나 떨어질 것이다. 입시가 지긋지긋했다. 매년 '이번에는 될 거야'라는 희망을 갖는 N수생이 되고 싶지 않았다. 이미 나보다 훨씬 똑똑한 사촌오빠가 교사 임용을 N수생으로 보내다가 결국 실패한 것을 알기에, 나라고 단번에 잘되리라는 보장이 없지 않은가. 큰 시험을 보는 것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생겨버렸다. 집안의 모든 친지들이 그 오빠만을 주목했는데 그 부담감이 오빠 인생을 크게 잡아먹은 듯 보였다. 나는 입시지옥에서 벗어나야 했다. 좋은 대학의 간판은 내겐 못 먹는 감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했고, 내게 맞지 않는 옷이라 내게 주어지지 않는 것이라는 걸 슬프지만 받아들여야만 했다. 학벌이 평생을 따라다닐 걸 알기에 두렵고 싫었지만, 이제는 다른 방향을 찾는 게 정신건강에 좋다는 걸 알았다.


지나고 보면 대학입시의 실패는 내 인생의 가치관에 꽤 많은 영향을 미친 듯싶다. 특히나 두려움을 극복하는 방법을 깨우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항상 인생의 첫단추를 잘못 끼웠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괴로움 속에서 지냈다. 나는 대학입시의 실패가 죄스러웠다. 부모님의 어깨를 펴 드리지도 못하고 오히려 엉뚱한데 돈만 날린 것 같아 죄스러웠고, 기대가 컸던 학교 선생님과 학원 선생님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해 죄스러웠다. 학교에서 공짜밥을 먹고, 학원에서 공짜 수업을 들었으면서 나는 그 어느 누구에게 보답하지 못했다는 죄스러움이 나를 따라다녔다. 나의 무능력함에 스스로 좌절감이 너무나 컸다.


수능에서 가장 큰 배신감을 안겨준 '수학'은 늘 나에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힌다'는 말을 상기시켰다. 대학에서도 미적분과 공업수학 등 필수 교과목들을 무난하게 소화해냈고, 미적분 튜터를 하면서 용돈을 벌기도 했지만, 이제 더 이상 나에게 '수학'은 '예전의 수학'이 아니었다. 타고난 재능인 미술보다 내게 훨씬 흥미 있고 관심 있는 수학을 선택해서 초등학교 5학년 때부터 8년 정도 애정을 쏟았다. 수학은 늘 즐거웠고, 각종 외부 경시대회와 올림피아드대회 등 수학 시험을 즐겼다. 공식 외우기가 아닌 수수께끼 같은 숨겨진 논리를 찾아 증명하는 것은 내게 가장 큰 재미였다. 하지만 수능 이후 수학은 나를 떠나갔다. 그토록 오래 쏟았던 애정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되었고, 내가 느낀 배신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떠나간 연인을 나는 더 이상 붙잡고 싶지 않았다. 내가 능력이 부족해서 관심이 부족해서 떠나갔겠지만, 공대생이 된 나에게 '수학'은 이제 큰 의미가 없었다. 필수 교과목 이수 이후에 나는 수학을 아예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나를 배신한 수학이 싫었다. 이때부터 시작된 것 같다. 수능이라는 단어를 회피하기 시작한 것이. '수능 이전의 나'를 완전히 덮어버리고 애써 외면했다.


수능 망했다고 이야기하면, '아 그렇구나. 안타깝다. 힘들었겠네.' 아주 짧은 공감의 멘트 한 번 하는 이를 찾기 어렵다. '너만 망했냐? 나도 망했어.' 늘 이런 식의 답변이 나온다. 사연 없는 사람이 어디 있겠냐마는, 나는 그저 나의 힘들었던 수험생활에 대해 아주 작게나마 공감해줄 사람이 필요했을지도 모른다. 누군가에게 지고 있는 이 마음의 짐을 어떻게든 덜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아주 친하다고 생각하는 한 명의 친구 외에는 집안이 기울었다는 사실을 입밖에 내지도 않았다. 어린 마음에 불쌍하게 보이는 게 싫었던 것일지도 모른다. 누군가 알까 봐 두려웠다. 미성숙한 청소년에게 창피함과 부끄러움은 세상이 무너지는 일처럼 다가왔던 것이다.


그래도 대학에서는 괜찮은 듯 늘 웃으며 다니긴 했다. 하지만 나 자신에게 더욱 엄격한 잣대를 들이대기 시작했다. 빈털터리가 된 집에서 내가 경제적 짐이 될 순 없었다. 그래서 나는 성적순으로 주는 전액 장학금을 받아야 했고, 4년 내내 장학금을 받았다. 그건 자랑거리가 아니었다. 단 한번도 자랑해본 적이 없었다. 그런 결과는 단순히 돈 때문만은 아니었다. 과에서 Top을 유지하는 것은 나에게 유일하게 남은 자존심이었다. 여기에서조차 과Top을 하지 못하면 스스로 너무 한심하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쓸데없는 자존심이었다. 물론 학교가 나에게 공짜로 공부를 시켜준 덕분에 취업도 잘할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우리집에서 경제적 가장이 되었다. 물론 해피엔딩은 아니다. 대학입시의 실패로 얻은 학벌은 나를 평생 따라다니는 꼬리표가 되었고,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낮아진 자존감으로 오랜 시간을 살았다. 부자가 되지도 않았다. 하지만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며, 성공도 학벌순이 아니란 걸 이젠 안다. 나는 그저 과거 나의 무능함으로부터 탈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


언젠가 돈을 많이 벌게 되면 공짜로 공부시켜준 모교에 꼭 기부하겠는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나처럼 돈 없고 백 없는 사람들이 돈 때문에 공부 걱정, 진로 걱정을 덜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에서다. 그럴 날이 올지 모르겠지만, 예전에 학생 때 엄마한테 약속했던 전원주택 지어주기도 언젠가는 지키고 싶다. 언제가 될진 모르지만, 요즘 서울 집값 생각하면 아무래도 서울 밖, 아니 수도권 밖에 지어야 할 듯싶다. 허허.




중학교 때 들었던 가장 중요하게 인생을 따라다닌다는 그 말, '학벌, 직장, 결혼'은 뭐 틀린 말은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세 가지를 포함하여 경험해보니, 세상에 평생 따라다니는 것은 그 세 가지뿐만이 아니다. 내가 태어난 곳은 주민번호에 고스란히 숫자로 증명하고 있고, 내가 선택할 수 없는 부모님도 평생 따라다닌다. 내가 어딜 나와서 무엇을 하든, 내가 지나간 모든 흔적이 평생을 따라다니는 것이다. 내가 선택한 것이든 저절로 부여받은 것이든 내가 가는 모든 발자취가 나를 따라다닌다. 어느 하나 중요하지 않은 게 없고, 어느 하나 하찮은 것도 없다. 유독 수능에 그렇게 크게 의미 부여함으로써 감정에 취약한 청소년들에게 부담을 주거나 프레임을 씌우거나 잘못된 편견을 주지 않았으면 하는 생각이 든다.


처음으로 나의 아픈 과거를 글로써 적나라하게 표출하고 나니, 마음이 이상하다. 글을 쓰면서도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다. 아무도 궁금해하지 않고, 아무도 관심 없을 이 긴 나의 이야기는 온전히 나만을 위한 글이었다. 내가 내 안에 꼭꼭 숨겨두어 그대로 고여있는 고통의 우물을 여기저기 흩뿌리며 퍼내는 기분이다. 아마 한 순간에 이 고통에서 쉽게 벗어나진 못할 것이다. 하지만 말하면 안 되는 것처럼, 마치 발설하면 부모님의 얼굴에 먹칠이라도 하는 것처럼, 스스로 무능력함을 광고하는 것처럼 치부하면서 사는 게 얼마나 더 어리석은 행동인지 생각하게 되었다. 내게 일어난 일들은 누구에게도 일어날 수 있는 일이고, 엄청 큰 일도 아니었을 것이다. 내가 그 일에 대해 집착하고 스스로 더 큰 의미를 부여하고 끙끙댔던 것일지도 모른다. 지금 이렇게 글을 쓰고 보니 나에게 '수능은 죄책감이었고 수학은 배신감이었다'로 요약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글은 어린 시절을 완전히 외면하고팠던 지나간 상처를 훌훌 털어내기 위한 내 첫걸음이다. 나는 계속해서 내 안에 고이 간직해온 고통의 버튼을 하나씩 눌러댈 것이다.


나는 오늘 수능을 치른 수험생들이 나처럼 오랜 시간을 부담과 후회 속에서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설령 평소 실력 발휘를 못했을지라도 수능은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걸 말해주고 싶다. 잘 안 풀리는 한 계절을 맞닥뜨린 것이라고 생각하길 바라는 마음이다. 틀린 문항은 돌이킬 수 없고, 하락한 점수는 후회 한다고 다시 오르진 않는다. 다음 단계를 모색할 수 있는 쿨한 마인드를 갖고 살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너무 수능 수능, 대학 대학 이렇게 외치며 수험생들에게 부담을 안겨주지 않았으면 좋겠다. '힘내'라는 말 한마디, '화이팅'이라는 그 말 한마디가 응원이나 격려가 아닌 부담으로 꽂힐 수도 있다. 그저 모두가 평소와 같이 담담하게 하루를 보내기를... 그리고 이제는 나도 좀 담담해지기를. 그래서 '수능'이라는 단어를 더 이상 회피하지 않아도 되기를.


인생에 잘못 끼워진 단추는 없다. 정말 법적으로 도덕적으로 잘못되었다면 단추를 풀고 다시 끼우면 된다. 그게 아니라면 내가 입은 옷을 나에게 맞게 다시 디자인하면 된다. 그리고 나에게 맞는 나머지 단추를 차례로 하나씩 끼우면 되지 않을까.


p.s 그래도 여느 수능과 달리 코로나19로 더욱 힘들게 치렀을 수험생들에게 수고했다는 마음은 진심으로 전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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