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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Life Designeer Jan 19. 2020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그 간극

독서노트 #60 < 디자이너 사용설명서 >

이 책 <디자이너 사용설명서>는 예전에 제목이 흥미로워 집어 들게 된 책이었다. 박창선 저자의 책으로, 저자의 이력을 살펴봤을 때 더욱 흥미로워서 읽게 되었다. 책 속 저자의 소개에 의하면, 판매직 사원부터 공사장 인부, 콜센터 상담원, 영업 사원, 영어 강사, 전시 디자이너, 청소년센터 프로그램 기획자까지 안 해 본 일이 없을 만큼 다양한 직업을 어깨너머 배운 디자인을 밥벌이로 만든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돈 주고도 살 수 없는 자신의 '삽질'을 많은 독자와 나누는 것이라고. 아마도 그 '삽질'은 자신만의 '통찰'에 대한 겸손의 표현일 테지. 자신을 이렇게까지 재미나게 표현하는 저자는 처음 봤다. 그래서 더 궁금하고 친숙한 마음으로 읽게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입찰 제안서 디자인은 네가 가장 불편하고 미칠 것 같은 모습으로 만드는 것이 정답이야."

- p213

디자인과 관련된 감각이 발달한 사람과 그렇지 않은 사람 사이에는 보이지 않는 차이가 하나 있다. 바로 '시각적 불편함'이라고 나는 칭하고 싶다. 디자인적 자신의 철학 또는 관점이 분명한 사람들은 자신만의 미학적 기준과 취향이 존재한다. (사실 디자인을 전공했다고 다 있는 건 아니었다.) 디자인을 전혀 고려할 필요 없는 산업군이나 직무 담당자들은 그러한 미학적 감각이 예민하진 않다. 그래서 쏟아져 나오는 많은 홍보물, 광고 전단지, 기관 홈페이지, 어플, 프리젠테이션을 감각이 예민한 사람이 보면 눈이 불편하다. 여백, 컬러, 폰트, 조화, 비율 등 눈에 거슬리는 것들이 많다. 하지만 말하지 못하는 순간들이 많다. 바로 어딘가에 고용되어 상사나 클라이언트의 입맛을 맞춰야 할 때가 훨씬 많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로서 타협의 순간은 아마도 시각적 불편함을 감수하고 클라이언트의 니즈를 최대한 맞추기 위해 노력해야 할 때 일지 모른다.



직관성과 맹목성은 사회적으로나, 기업의 전략 면에서나 주목해야 할 요소이다. 디자인이 중요해진 것은 이러한 시각 정보를 다루는 행위이며 나아가 '인간의 행동'을 만드는 요소이기 때문이다.
디자인의 본질은 그 의도와 과정을 떠나서 일단 '가시화'에 뿌리를 두고 있다. 좀 더 정확히 말하면 '가시화를 통한 행위유발'에 뿌리를 둔다고 하겠다. 그것이 어떤 행위인지는 제작자의 의도에 따라 다를 수 있다.

- p104

저자의 말대로 가시화는 중요하다. 특히 요즘 시대에는 더욱더. 인간은 전체 감각 중 70%가 시각의 영향을 받기 때문에 눈에 의존도가 높다. 눈에 보이는 것으로 행동이 유발된다. 공간을 어떻게 기획, 설계하느냐에 따라 인간의 행동을 유도하기도 하고, 전시장에서 어떻게 기획하느냐에 따라 관람자의 전시행동에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의도된 디자인인 것이다. 수도꼭지 모양을 보고 어느 쪽으로 돌려 힘을 가해야 할지 판단하는 것에도 사용자의 행동을 유도하는 디자인이 포함된다. 이것이 바로 지각된 행동유도성 즉 Perceived Affordance다. 디자이너가 원하는 의도대로 사용자의 행동이 유도될 경우 지각된 행동유도성이 매우 잘 적용된 것이다. 그만큼 제품이나 서비스의 가시화를 통해 얼마나 의도한 목적대로 행동이 유도되었는지가 곧 디자이너의 역량일지 모른다. 하지만 이렇게 평가되면 솔직히 너무 가혹하다. 디자이너는 모든 변수를 컨트롤하기 어렵고 때로는 실수도 하는 사람이니까 말이다.



취향이라는 것은 대부분 '그냥'이란 단어와 친밀하다.
어차피 타인의 취향은 바꾸기 힘들다. 그리고 우리는 일을 해야 한다. 그러니 안 맞는 사람과 계속 일하지 말고 애초에 맞는 사람을 찾자.
...
디자인 취향을 엿볼 수 있는 요소를 다섯 가지로 정리해보자.
- 여백의 비중
- 선호 컬러
- 레이아웃
- 사진 톤
- 선 위주, 면 위주

- p49

'취향'이라는 단어는 저자의 말대로 '그냥'이라는 말과 친하다. 다른 말로 하면, 그냥 좋은 것. 여기엔 논리가 배제된다. 이성보다 감성의 영역이다. 개개인마다 취향은 제각기 다르다. 그리고 내가 생각하기엔 '취향의 강도' 역시 다르다. 자신이 좋아하는 스타일을 강하게 고집할수록 강도가 센 것이다. 자신의 선호 스타일이 있지만 충분히 양보할 수 있고, 이해해줄 수 있고, 상대의 취향을 즐겨보려고 노력하는 사람일수록 그 강도가 약하다. 그런데 문제는 디자인이라는 영역에는 '취향'이 많이 개입될 수밖에 없는 환경이라는 것이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수 있지만, 디자인은 시각적으로 모든 것이 드러나기 때문에 더욱 두드러진다.

클라이언트 취향의 유형과 강도, 그리고 디자이너 취향의 유형과 강도. 이 두 사람의 성향에 따라 줄다리기 싸움이 거칠게 왔다 갔다 할지 유연하게 넘겨서 성과를 낼지가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IDEO CEO인 팀 브라운은 그의 저서 <디자인에 집중하라>에서 "디자인은 만족스러운 경험의 전달에 대한 것이다. 디자인 싱킹은 모두가 대화에 참여하는 기회를 통해서 다극화된 경험을 만들어 내는 과정이다"라고 언급했으며 "디자인적 사고란 소비자들이 가치 있게 평가하고 시장의 기회를 이용할 수 있으며 기술적으로 가능한 비즈니스 전략에 대한 요구를 충족시키기 위하여 디자이너의 감수성과 작업 방식을 이용하는 사고방식이다"라고 규정했다.
...
디자인 싱킹에서 중요한 것은 현상을 관찰하고 문제점을 발견하고 다양한 시각으로 생각한 뒤 필요한 것들을 추려 빠르게 프로토타입을 만들고 개선하는 일련의 사이클이다. 한 문장으로 줄이면 '만들고 개선한다'는 방식이다. ...
디자인 싱킹이 모든 문제 해결의 만능열쇠는 아니지만, 경우에 따라 낮은 비용으로 리스크를 최소화하고 빠른 실행으로 좀 더 실질적인 솔루션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점에서 훌륭한 전략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것은 실상 엄청나게 어렵다. 사고방식을 늘어놓았다가 정리하는 것을 동시에 해야 하고, 실행력과 통찰, 분석, 사용자 관점의 인사이트까지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수많은 것이 몽땅 모여 있는 극강의 고난도 종합 선물 세트와도 같다.  

- p89

몇 년 전 디자인씽킹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번지다 요즘은 좀 사그라들었다. 디자인 공부를 하면서 디자인 씽킹에 대해서 함께 공부했다. 경영 자체에 재미를 느꼈던 터라 디자인씽킹을 경영에 잘 조합하고 요리조리 연구해보고픈 욕심이 있었다. 실제로 프로젝트에서 최대한 활용하려 애썼다. 하지만 내가 그 과정에서 깨달은 것은, 실무 경험이 특히 부족하거나 단순히 툴만 잘 쓰는 디자인 전공자들에게 디자인씽킹이라는 말은 허상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저자의 말에 공감하는 부분이 바로, 디자인씽킹은 실로 엄청나게 어려운 과정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시장을 보는 눈, 전략을 짜기 위해 전체를 분석하는 능력, 진짜 문제를 문제로 정의하는 능력, 문제 해결을 위해 창의적인 아이디어를 내는 능력, 그 아이디어가 실제 사용자에게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는지 시스템에 대한 이해, 기능과 미학적 요인을 함께 고려할 수 있는 능력, 사용자들에 대한 인사이트와 데이터 분석 능력까지 있어야 제대로 된 디자인 씽킹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 단기 워크숍에 참여하는 것만으로는 디자인씽킹 능력을 키우기가 어려운 것이다.



행위의 관점에서 '디자인을 한다'는 무엇인가. 디자이너는 어떤 행위를 해야 하는 사람인가.
디자인을 한다는 것은 상대의 욕망을 구현하는 것이다. 욕망이란 단어가 내포한 범위는 상대방의 머릿속에 그려진 그림과, 그 뒷면에 존재하는 맥락까지를 포함한다. ... 디자이너가 가져야 할 고집은 디자인 본연의 정의와 도덕성, 미에 대한 철학이다. 하지만 그것이 '그러니까 내가 옳다'라는 의미는 아니다. '내 마음대로 디자인하겠어. 내가 원하는 대로'라는 의미도 아니다.
디자이너 행위의 구심점은 클라이언트, 즉 상대방의 욕망이어야 한다. 그 욕망을 어떤 식으로 해석하고 결과물로 만들지 상대방 입장에서 생각하고 고민하는 과정이 없다면 그 결과물은 그저 자기만족을 위한 전시물일 뿐이다. ... 돈을 받고 자기 집에 전시할 디자인물을 만드는 건 좀 이상하지 않은가?

- p218

그렇다. 일반적으로 조직 내에서 일하는 디자이너 혹은 파트너가 아닌 갑을 관계의 계약으로 일하는 디자이너에게는 클라이언트 중심으로 작업이 이루어지는 것이 맞다. 하지만 종종 자신의 예술적 감각과 취향을 담아내고 싶어 하는 디자이너들을 보기도 했다. 클라이언트가 디자인에 대한 오더에 제약을 안 줄 정도로 디자인에 대해 무지하거나 자율권을 모두 넘기지 않았다면, 힘과 의사결정권은 어쩔 수 없이 클라이언트에게 있는 것이 당연하다. 자신의 취향이 아닌, 클라이언트의 취향에 맞추거나 능력이 되면 그 사이를 적절히 조율하는 것. 그것은 디자이너의 역량에 달렸다.


'디자이너'라고 하는 단어의 정의가 사람들의 머릿속에 각자 다르게 정의되기 때문에 디자이너에 대한 기대치와 환상이 각기 다르다. 우리는 종종 언론이나 방송 프로그램에서 '세계적인 디자이너', 'OO출신 디자이너'와 같은 표현으로 누군가를 소개하는 것을 본다. 하지만 맥락을 잘 짚어보면 그들은 위에 말했던 디자이너와 다르다. 아티스트에 가깝다. 비록 계약관계에 있어도 돈을 주는 사람보다 더 큰 권력을 지닌 디자이너가 자신의 생각을 마음껏 표현할 수 있는 권리를 획득한 경우다. 여기서부터 디자이너의 역할이 아티스트로 바뀐다. 자신의 예술혼과 철학을 표현하는 사람들, 아티스트로서의 역할을 하는 그들을 언론에서 디자이너라고 소개하기 때문에 대중들은 '디자이너'에 대한 환상을 각기 다르게 갖게 되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유럽, 미국, 일본 등과 같은 디자인 선진국에 비해 디자인 자체에 대한 인식 수준이 높지 않다. 단기간에 경제발전을 이루는 과정 속에서 디자인의 철학이 자리 잡을 시간적 여력 자체가 없었다. 그래서 디자이너를 단순히 보기 좋게 만들어주는 기술자 정도로만 보는 시각이 강하다. 그러다 보니 국내의 회사 안에서의 디자이너에 대한 기대와 국외 및 통용되는 개념의 디자이너에 대한 기대와 대우가 사뭇 다르다. 디자인을 둘러싼 언어의 혼재, 개념의 혼란, 철학의 부재 속에 살고 있는 것이다.


이 어지러운 혼돈 속에서 자신의 위치와 역할을 제대로 파악하여 능력을 발휘라는 디자이너가 진짜 인정받는 디자이너가 아닐까.




저자가 자신의 온전한 삶의 '삽질'을 통해 알게 된 통찰은 실로 어마어마하다. 그것은 디자인 세계에 발을 들인 사람들이라면, 그 안에서 일을 꽤 잘 해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이해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디자인 세계가 엄청나게 심오하다는 것과 디자이너와 클라이언트 사이의 간극이 거대하다는 것, 그리고 이 간극을 해소하기 위해 디자인 역량 이외의 다른 능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을 저자는 알게 되었다고 한다. 물론 이 책은 디자인 자체의 이론적인 부분이나 이상적인 부분보다는 실무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는 전제를 인지하고 읽어야 한다. 비즈니스의 생태계를 잘 모르면 이해하지 못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울 수도 있을 것이다. 저자의 의도대로 이 책은 디자이너에게도 클라이언트에게도 모두 유용한 것 같다. 양쪽 모두 자신의 입장만 주장하면 그 간극은 좁힐 수 없으니까.


저자가 꼬집은 간극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디자인 영역에만 국한되지는 않을 것이다. 어느 분야든 컨텐츠를 만드는 제작자와 그것을 요구하는 클라이언트 사이에는 비슷한 문제로 여전히 그 간극이 유지되고 있을 테니까 말이다. 하나의 조직 안에서 부서 간에도, 혹은 특정 부서 안에서도 큰 강을 사이에 둔 채 소통을 하는 사람들이 많다. 결국 내 주장을 펼치기 전에 먼저 상대의 입장을 헤아리려는 마음, 그것이 간극을 줄일 수 있는 힌트가 되지 않을까.




* 책 제목 : 디자이너 사용설명서

* 저자 : 박창선

* 출판사 : 부키

* 출간일 : 2018년 5월 29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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