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수명록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수명록 Apr 20. 2023

존재의 시간

수명록 壽命錄

침대 머리맡에는 항상 커터칼이 있다.

사라져야 할 그때를 놓치지 않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날은 장식용일 뿐이다.

오늘이 장식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 한다.

물건이 제 쓰임을 알 때, 그것은 존재를 인정받는다.

칼이 무언가를 자르고 나면 존재는 변화한다.

그리고 존재를 인정받기 위해 선택한다.


나는 2022년 12월 31일에 죽었다.

그리고 111일째 되는 날 숨을 쉬고 있다.

그날, 그 해까지만 나의 존재를 인정하기로 선택한다.

필요 이상의 관계를 만들지 않고, 부재로 인한 피해를 최소화하는데 애썼다.

따라가야 할 길도, 따라야 할 표지도 아무것도 없었다.*

마치 의지할 무언가처럼 나를 이끌던 생각과 그에 따랐던 행동이 다시 운동을 시작한다.

항상 항해하면서도 도달할 곳을 영원히 찾지 못하는 돛단배처럼** 의식은 끝없이 방황한다.

지금 보이는 현실이 허구인지, 혹은 망상이 더해진 현실인지 알아차리기 어렵다.

아마 그 누구도 구분할 수 없을 것이다.


존재의 시간이 거기에 있었다.

아무것도 없고, 아무것도 아닌 시간에도 흐르고 있을 고독한 저울질

언제까지고 계속될 시간의 속박과 변명

그 시간이 존재를 말하고 있다.


* <사건>, 아니 에르노

**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매거진의 이전글 수명록 서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