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징어 짬뽕이냐, 너구리냐. 그 심오한 문제

by 안희정

"내 인생은 갈수록 망해가고 있어."


대학 동기 단톡방에서 한 친구가 말했다.


그녀는 올해 초 인생의 쉼표를 찍기 위해 서울에서의 삶을 정리하고 제주살이를 하는 중이다.


우리는 20년 지기 친구답게 처음에는 무슨 소리냐, 네가 어디가 어때서, 네가 그동안 해낸 일이 얼마나 많은데 그러냐, 그럼 나는 어떡하라고, 제주의 아름다운 풍경 속에 살면서 그게 대체 할 말이냐 등의 위로를 무심한 척 그러나 츤데레적으로 툭툭 던졌다.


그러나 일련의 말들이 별 위안이 되지 않는 듯 그녀는 다시 말했다.


"인생 그만하고 싶다. 노력도 지겹고, 노력하려고 노력하는 것도 지겨워. 노력해봐야 결과가 거지 같아."


되처 다양한 위로의 말들이 쭉 정렬되던 중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사는 친구가 한마디를 던졌다.


"어릴 적 영어에 미쳤을 때는 꿈속에서도 공부를 했어. 그러고 나니 허망하네.. 지금은 나도 사십 춘기를 심하게 앓고 있어. 풍선에 바람 빠지듯 무기력하구나."


이번에는 샌프란 무기력증의 그녀를 향한 따뜻한 말이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이 와중에 감정 이입의 달인인 내가 질소냐.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나도 알아. 별 재능도 없는데 이제 와서 글 한번 써보겠다고 혼자서 바둥거리는 것도 창피해서 사실은 말 안 하려고 했었어."


한 비행기 안에서 우울의 바닷속으로 다 같이 추락하듯 우리는 그렇게 동시에 급속도로 어두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호주 멜버른 사는 친구가 결정타를 날렸다


"난 어제도 울었어. 혼자 핸드폰에 비디오 켜고 말하다가.. 나 미쳤지! 인생이 이리 외로워.. 근데 너도나도.. 우리의 정서에 외로움이 많은 거야. 그뿐이야."


사람의 감정이 얼마나 빨리 타인에게 번지는지 그 전염력에 대해 생각하면 한 번씩 소스라치게 놀라게 된다.


특히 그 사람이 우리와 매우 가까운 가족, 친구, 연인, 또는 마음이 맞는 동료일 경우에도 그 속도는 가히 LTE 급이다.



이 일은 베르테르 효과를 떠올리게 했다.


베르테르 효과란 미국의 자살 연구학자 필립스(David Philips)가 이름을 붙인 현상으로, 유명인의 자살 사건이 언론에 보도된 이후 일반인의 자살이 급증하는 패턴을 말한다.

지금으로부터 200여 년 전 그 유명한 독일의 작가 괴테가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이라는 소설을 발표했는데, 주인공 베르테르의 권총 자살로 끝나는 소설을 읽은 유럽의 많은 사람에게 자살이 유행처럼 번져 나간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때 사회적 파장이 얼마나 심각했던지 일부 국가에서는 이 책을 금서로 지정할 정도였다고 한다.


우리나라에서도 국민 배우라는 호칭이 무색하지 않았던 "최진실"의 자살 사건 이후 몇 달간 그 사건을 조명하는 TV 및 각종 매체에 의해 온 국민이 함께 울었고, 우울증에 빠졌으며, 일부 모방 자살까지 시도했던 사람들도 있었던 것 역시 이 효과라고 할 수 있겠다.


하물며 유명인의 우울한 감정에도 이렇게 쉽게 전염되는데 나와 가까운 친구는 오죽하랴.


나는 단톡방 너머 어딘가에 있을 친구들의 슬픈 얼굴을 상상하고, 한편으론 내 처지를 비관하며 그렇게 가슴을 무자비하게 후벼파고 있었다.




그런데 그때,

여태껏 대화에 참여하지 않았던 서울 용산구의 친구가 갑자기 사진 한 장을 생뚱맞게 올렸다.


용산 무념무상녀 : "아 고민된다..."


고민과 함께 올라온 사진은 바로 다름 아닌 "오징어 짬뽕과 너구리".


용산 무념무상녀 : “뭘 먹을까?

샌프란 무기력녀 : “너 우리 글 읽었니? ㅋㅋㅋㅋㅋ

용산 무념무상녀 : “아니.”


아놔... 얘는 어디서 뭐하다가 이제와 눈치 없이 이럴까.


제주 망한 인생녀 : “중요해.

샌프란 무기력녀 : “하긴. 나도 지난주에 여행 갔다가 집에 오자마자 너구리부터 끓임… 인도 음식 미국 음식만 먹다가 너구리 국물 마시니 체증이 내려가더라."

제주 망한 인생녀 : "아씨. 오짬에 한표.


우리는 그렇게 오짬과 너구리 중 어느 것을 고를까 심각하게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너구리에 한 표를 던졌다.

그게 고민할 거리인가? 당연히 면발의 최강자 너구리지!


이윽고 오짬과 너구리의 면발과 국물에 대한 진지한 토의가 이어졌다.


그리고 그렇게, 절대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슬픔의 기운이 라면 사진 한 장을 시발점으로 한순간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가버렸다.

그 후 우리는 언제 그랬냐는 듯 농담을 지껄이며 다시 평소처럼 서로를 돌려 까기(?) 시작했다.


채팅창은 다시 활기가 넘쳤고 나락의 늪으로 내려갔던 내 기분도 한순간에 날아올랐다.


삶이 나를 힘들게 하고,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고,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지고 싶을 때,


그럴 때는 고달프고 힘든 인생을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버거워 하기보다 일단 지금 뱃속에 무엇을 넣을까부터 고민해 보자.


인생의 처량이 뜨거운 라면의 면발을 불 때 한순간에 함께 날아갈 수도 있다.

게다가 성공한 인생도 알고 보면 별거 없지 않을까.


그냥 이렇게 배고플 때 맛있게 먹고, 밤에 잘 자고, 열중할 수 있는 일에 몸을 계속 움직이며, 나와 내 주변 사람들을 사랑으로 돌보면 그걸로 충분하다고.


친구가 올린 인증샷을 보며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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