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든 날엔 소울 OO을 먹자.

by 안희정

"난 너무 힘든 날엔 순댓국을 먹어요. 순댓국이 내 소울 푸드거든요."


어느 날, 같이 일하는 부장님과 대화를 하던 중 상대로부터 나온 말이다. 그 말을 한 부장님은 차도녀라는 이미지가 찰떡같이 어울리는 골드미스인데 절대 부러지지 않는 강철 같아 보이는 그녀의 입에서 나 같은 아줌마들이나 좋아할 만한 순댓국이란 말이 튀어나와 꽤 인상적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날 이후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여전히 뇌리에 콕 박혀 한 번씩 생각이 난다.


소울 푸드

소울푸드(Soul Food)라는 단어 자체가 주는 근사함이 뚝뚝 떨어진다.

사전적 정의를 찾아봤다.

소울푸드(Soul Food)란 원래 미국 남부 흑인들의 전통 음식을 가리키는 용어였으나, 한국어와 일본어에서는 '소울'이란 단어의 뜻 때문에 영혼의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음식 또는 영혼을 흔들 만큼 인상적인 음식을 가리키는 용어로 쓰인다. 주로 자신만의 추억을 간직한 음식이나 한 나라를 대표하는 음식을 일컬을 때도 사용한다. 영미권에서는 실제'solul food'를 이런 뜻으로 쓰지 않으니 잘못 썼다가 이상한 오해를 사는 일이 없도록 주의해야 한다. 한편, 국립국어원에서는 이 용어를 '위안 음식'이라는 순화어로 명명했다.
(출처: 네이버 지식백과, 나무 위키)

비록 원래의 의미와는 변용되어 사용되고 있지만 그 속에 담긴 뜻만은 명확히 전해진다.

소울푸드는 '마음의 위안'을 주는 음식이다.


'영혼을 위한 닭고기 수프'라는 한때 유명했던 책 제목이 기억 속에서 올왔다. 원래 닭고기 수프는 미국 사람들이 감기나 몸살에 걸렸을 때 끓여서 먹는 일종의 기력 회복용 음식인데 그것에 착안하여 마음에 위로와 감동이 되는 글들을 모아 책 제목으로 출시했다는 걸 본 기억이 있다.


자연스레 나를 치유할 수 있는 약 같은 음식은 무엇이 있나 곰곰이 생각해본다.


음...

아무리 생각에 생각을 거듭해봐도 떠오르지 않는다.

잘 먹는 것을 자부심으로 가진 자로서 소울이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는 음식이 한 가지도 없다니 황당하기 그지없다.

나는 여태까지 40년을 (훨씬) 넘게 살면서 무엇을 한 게냐.

다시 한번 좋아하는 음식을 찬찬히 기억의 밥상 위에 올려본다.

스테이크, 연어샐러드, 초밥, 참치회, 념치킨..

다 맛은 있으나 소울이라는 멋진 이름을 부여할 만한 자격은 없어 보인다.

막연하게 그런 이름을 감히 가지려면 최소 10시간 이상 뼈를 고아서 우려낸 국물로 만드는 곰탕이나 어머니의 손맛으로 깊이 우려낸 김치찌개 같은 국가대표급 음식이어야만 할 것 같다.


내친김에 책상에 앉아 가부좌를 한 번 더 틀고 생각을 개척해본다.


좋아.

음식이 없다면 이 거친 세상으로부터 마음을 다쳤을 때 나를 치유할 수 있는 대상은 무엇이 있나 생각해 보자.


첫 번째, 책.

마음이 바싹바싹 말라서 물을 뿌려주고 싶어지면 꺼내 보는 책들이 있다. 대표적으로 '어린 왕자'와 '빨간 머리 앤'이다. 공교롭게도 올 초 어린 왕자 원서 읽기에 도전했었고, 현재는 빨간 머리 앤 원서를 읽는 중이다. (그러고 보면 나는 현재 심적으로 힘든 상태였던가? 무의식적으로 마음의 안식을 주는 책을 자꾸 드는 걸 보면 어느 정도 일리가 있는 추측이다) 괜스레 자신의 상태까지 점검하게 된다.


두 번째, 해피엔딩 영화.

기분이 울적할 때나 슬플 때. 행복한 결말이 예상되는 영화는 나를 즐겁게 만든다. 해피엔딩에 현실과 동떨어진 판타지까지 더하면 금상첨화다. 내가 좋아하는 그런 결을 가진 영화는 '스타더스트','비틀쥬스', '캐리비안의 해적', '맨 인 블랙' 그리고 최근작으로는 '신비한 동물사전' 등이 있다. 나는 이 감정을 현실로부터의 '회피'라기보다 '잠깐의 쉼표', '휴식'이라고 부르고 싶다.

세 번째, 슬픈 노래.

영화나 만화는 행복한 결말을 좋아하는데 역설적으로 노래는 구슬프고 처량하기까지 한 노래에 더 마음이 끌린다. 쓸쓸한 멜로디와 시적인 가사에 잠길 때면 구구절절 다 내 얘기인 것만 같아 유난히 힘든 날이면 무한 반복으로 듣게 된다.

좋아하는 노래로는 이소라의 '바람이 분다", 김윤아의 "고잉 홈", "도쿄 블루스", "샤이닝", "야상곡", 이적의 '거짓말 거짓말 거짓말', '빨래', 럼블 피쉬 버전의 '비와 당신' 등이 있다.


네 번째, 사람. 사람의 마음. 나를 향한 사람의 마음. 나를 향한 따스한 사람의 마음.

책이나 영화, 음악은 지친 영혼에 치유의 손을 잡아주지만, 그걸 잡을 힘조차 부족할 때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역시 나를 향한 사람의 마음이 건네주는 다정한 말이나 글이다. "엄마 사랑해" 같은 자식의 말 한마디, "네가 최고야"라는 벗의 힘이 되는 말, "글 재미있게 읽었어요." 같은 댓글을 타고 전해지는 정겨운 마음은 가장 강력한 백신 또는 치료제가 되어 순식간에 세상 모든 슬픔이나 우울, 외로움 같은 막강한 바이러스들에 대항할 수 있는 항체를 형성한다.


쭈욱 적고 보니 진짜 소울 푸드는 없지만 내 영혼을 위한 수프들은 예상보다 꽤 많다. 정도면 궁핍한 영혼의 주린 배를 충분히 채우고도 남을 것 같다.


힘들고 어깨가 처지다 못해 빠질 것 같은 날이 되면 이어폰을 방패 삼아 귀를 단단히 싸고, 책란 무기를 손에 들고 좋아하는 구절로 마음을 전하자. 그리고 주말이 되면 기분을 붕 뜨게 만들어 하늘 위 날아갈 수 있게 만드는 영화를 보자. 마지막으로 나를 응원하는 누군가의 자양강장제 같은 글로 내일을 시작할 수 있는 의지를 얻자.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