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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Sep 18. 2024

셀린과 희정

last day

하는 일이라곤 눈을 껌뻑거리며 멍하니 있는 것뿐이었다. 이대로 소파의 일부가 되고 싶었다. 기분이 똑바로 세워 놓은 막걸리병의 침전물처럼 가라앉았다. 출근하면 해야 할 일. 다시 마주쳐야 하는 사람들. 돌아가야 할 일상들이 떠올랐다. 미국에서의 마지막 날이었다.      


언제까지나 이렇게 있으면 좋으련만. 무정한 시간은 이번에도 어김없이 나를 외면했다. 마음이 ‘아 맞다. 그 일도 해야겠다.’와 ‘아직 생각하지 말자.’ 사이에서 아슬아슬한 그네를 타며 흔들렸다. 잠시 후 근심을 털어내듯 머리를 흔들며 일어났다. 세수하고 풀어놓았던 짐을 차근차근 가방에 넣었다. 마트에서 샀던 초콜릿도 잊지 않고 넣었다. 전날 싸 온 치킨 비리야니를 냉장고에서 꺼내 전자레인지로 데웠다. 출정을 앞둔 군인처럼 경건한 태도로 음식을 먹었다.

     

설거지를 마치고 넷플릭스를 켰다. 이윽고 처음 보는 뱀파이어 드라마를 선택했다. 대사를 거의 알아들을 수 없어 등장인물들의 뇌쇄적인 눈빛과 과감한 옷차림에 집중했다. 아름다운 두 여자 뱀파이어가 막 한 남자를 먹어 치우고 두 번째 남자를 헤치려고 하려는 찰나, 셀린이 나타났다. 셀린에게 그간 쓴 돈의 정산을 부탁했다. 셀린이 여행 내내 신용카드를 많이 썼기에 계산한 금액을 전부 현금으로 주었다.      


그 후 우리는 렌터카 영업소로 갔다. 셀린이 처음 나를 공항으로 마중 나왔을 때 가져왔던 차도 렌터카였다. 셀린의 차가 짐 실을 공간이 부족한 세단이었고, 연식 또한 오래되었기에 편안하고 안전한 여행을 위한 조치였다. 우리는 그 차로 캐나다를 다녀온 후 집에 돌아온 다음 날 반납했다. 공항으로 가는 길에 탈 차도 예약해 둔 상태였다. 마지막 날에도 미세한 부분까지 신경 써준 친구의 배려가 고마웠다.

      

셀린의 차로 렌터카 영업소에 도착해 예약한 차를 받기 위해 접수했다. 직원이 잠시만 기다려 달라고 말했을 때 그 잠시가 20~30분이란 시간인 줄은 미처 몰랐다. 셀린은 기다리며 이 영업소는 언제나 느리다고 불평했다. 게다가 기다려서 받은 차는 예약한 차종과 완전히 달랐다. 셀린은 바로 항의했고 결국 원하던 차를 받을 때까지 또 한참 동안 기다려야 했다.      


렌터카 영업소에서 나와 집에 들러 캐리어 가방을 차에 넣고 병원으로 갔다. 그날은 셀린이 정기 피검사를 하는 날이었기 때문이다. 접수하고 기다리는데 접수처 사람이 우리보다 늦게 온 사람을 먼저 불렀다. 그 모습을 본 셀린이 갑자기 일어나더니 그냥 나가자고 말했다. 병원을 나오며 왜 접수처에 항의하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셀린은 아마 그 사람의 피검사 항목이 자기보다 좀 더 간단해서 그럴 수 있다고. 지금은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으니 그냥 내일 피검사를 다시 받으러 오면 된다고 대답했다.

      

공항으로 출발하기 전 마지막 식당은 평범한 ‘다이너’였다. 최애의 음식인 스테이크를 주문했다. 최후의 만찬을 음미하며 그 시간을 즐겼다. 셀린은 햄버거를 시켰고 냉장고에 넣을 햄버거 반쪽을 또 챙겼다. 식당을 나와 뉴어크 리버티 국제공항으로 향했다. 3시간 30분의 운전 후 공항에 도착했다. 공항으로 진입하는 도로는 차로 매우 혼잡했다.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는 생각이 들자 문득 셀린에게 마음을 표현하고 싶어졌다.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으로 말을 툭 뱉었다.      


“네가 나 때문에 얼마나 신경을 많이 썼는지 알아. 덕분에 정말 재밌는 시간을 보냈어. 돈도 물론 절약했고. (웃음)…. 그냥 고맙다는 말 하고 싶었어. 다음에는 네 차례인 거 알지? 한국에 꼭 와서 이 은혜를 갚을 기회를 주길 바라.”

셀린은 잠자코 앞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차에서 내려 짐을 꺼냈다. 누가 먼저라고도 할 것 없이 팔을 뻗어 진한 포옹을 나눴다. 마치 처음 이 공항에서 만났던 그날처럼. 잠시 가슴이 먹먹해졌지만, 울고 싶지는 않았다. 활짝 웃으며 또 보자고 말했다. 셀린이 차에 탔다. 빗물이 떨어져 땅에 모인 물의 일부가 되듯 셀린의 차가 공항을 떠나는 수많은 차 중의 하나가 되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공항에 홀로 남겨졌다. 혼자 있으니 금세 불안감이 엄습했다. 여기에 있는 동안 한 번도 혼자인 적이 없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셀린이 나의 친구였고 가족이었으며 보호자였다. 사실 셀린은 허리가 좋지 않아 직장에서 오래전부터 휴직 상태였다. 갑작스러운 제안에도 그녀가 나와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었던 데에는 이런 사정이 숨어 있었다.      


떠나기 전 엄마는 그냥 패키지여행을 가라고 말했다. 그래야만 여행다운 여행을 할 수 있다고. 나는 여행다운 여행보다 셀린의 일상을 나누는 소박한 여행이 더 좋았다. 내 친구가 나에게 얼마나 큰 노력을 했는지도 잊고 싶지 않다. 언젠가 그녀에게 신세를 갚아줄 날이 오리라고 믿기에. 그날이 오면 우리는 또다시 함께 웃고 떠들고 가끔은 세상을 불평하고, 그리고 매 순간 서로의 존재에 행복하리라.      


오래전 열광했던 영화 <델마와 루이스>가 떠오른다. 두 주인공인 델마와 루이스의 우정은 항상 동경의 대상이었다. 이제는 안다. 내가 가진 우정이 영화보다 현실적인 아름다움이라는 걸. 내가 했던 여행이 패키지여행보다 가치가 있었다는 진실을.


굿바이 셀린. 또 보자.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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