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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Oct 15. 2024

부족한 엄마라도

⭕ 라라크루 [금요문장: 금요일의 문장공부] 2024.10.11.     


1. 오늘의 문장     


어젯밤에는 소설을 막 끝낸 팸과 함께 지아 레스토랑에서 저녁을 먹었다. 직업을 바꿔볼까 생각 중이라고 했더니 그녀가 말했다.

"흠, 나는 계속해서 책을 쓰게 될 거야. 그건 분명해. 문제는 글을 쓰는 동안 어떻게 생계를 해결하느냐 하는 거지."

그녀의 말을 들으며 어차피 인생은 선택의 문제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당장 먹고살 돈이 충분한 나는 글쓰기의 고통이 문제다. 만약 돈이 없다면 빈곤의 고통이 문제일 것이고 글쓰기는 약속의 땅이 될 것이다. 자, 이제 다들 이 이야기의 교훈을 눈치챘을 것이다. 이런저런 핑계 대지 말고 그냥 쓰라는 얘기다. 그 무엇도 변명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 나탈리 골드버그, 『글 쓰며 사는 삶』, 페가수스, 251쪽     



2. 나의 문장     


토요일 퇴근 후 모처럼 딸과 만화방에서 데이트했다. 같이 만화방에 가기로 한 딸과의 약속을 더는 저버릴 수 없었다. 딸이 요즘 유행하는 웹툰 만화책을 보는 동안 옆에 앉아서 책을 읽었다. 만화방에 가면 꼭 먹어야 한다던 라면도 먹고 치즈 나초도 시켜 먹었다. 들어와서 얼마 지나지 않은 것 같았는데 순식간에 3시간이 입속으로 들어갔던 면발처럼 후루룩하고 사라졌다.      


그대로 집에 들어가기 아쉬워 이번에는 근처 코인 노래방에 갔다. 애초 몇 곡만 부르려고 했는데, 현란한 조명과 목소리를 든든히 받쳐주는 반주에 엄마와 딸은 신이 났다. 노래가 끝날 때마다 한 곡만 더 한 곡만 더 하자고 읊조리다 결국 수중에 있던 만원을 모조리 썼다(코인 노래방은 한 곡 부르는데 500원이다). 노래방을 나왔을 때는 아까 먹었던 라면과 나초가 이미 다 소화된 뒤였다.  

    

공교롭게도 노래방 건물 1층에 딸이 좋아하는 떡볶이를 파는 가게가 있었다. 우리는 동시에 서로를 바라보며 씩 웃었다. 한 치의 망설임 없이 곧장 떡볶이 가게로 들어갔다. 처음 가본 곳이었는데, 이름난 맛집이었던지 10평 남짓한 공간에 여섯 테이블 중 딱 한 테이블만이 비어 있었다. 얼른 가방을 내려놓고 자리부터 맡았다. 가게 안쪽 키오스크에서 떡볶이와 순대를 시키고 다시 앉았다.   

   

음식을 기다리며 딸은 오늘 본 만화책의 줄거리에 대해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특히 남자 주인공의 멋진 외모와 성격을 언급할 때는 딸의 얼굴이 흥분으로 붉게 상기되었다. 나는 꼬이고 꼬인 만화 줄거리를 마치 다 이해하는 것처럼 맞장구를 치며 웃었다. 카운터 너머 주방에서는 부부처럼 보이는 중년의 남녀 주인이 음식 준비로 매우 분주했다.      


우리 옆 테이블에는 아빠와 십 대의 아들로 보이는 두 남자가 앉아 있었다. 아빠로 보이는 남자는 별로 먹지 않고 떡볶이를 먹는 소년을 지긋이 쳐다보았다. 건너편에는 갓 중학생이 됐을 법한 여자아이 세 명이 라면을 먹고 있었다. 아이들은 10대 특유의 과장된 표정과 몸짓을 하며 연신 재잘거렸다. 한 아이가 감탄사를 연발하며 어떤 말을 하자 다른 두 아이가 박장대소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사랑스러워 그들을 몇 번이나 힐긋거렸다.  마치 몇 년 후의 딸을 보는 것만 같았다.


잠시 후 주인 남자가 우리 테이블로 음식을 가져왔다. 주인은 오래 기다리게 해드려서 죄송하다면서 쿨피스 한 캔을 서비스로 주었다. 공짜 음료라는 소리에 기분이 퐁퐁 솟아올랐다. 주인을 쳐다보며 냉큼 감사하다고 말하고 음료수를 받았다. 소란스러운 공기에 둘러싸여 먹는 소박한 음식. 그 모든 것들이 소소한 기쁨이 되어 가슴으로 들어왔다.      


딸은 배가 고프다며 젓가락으로 떡볶이를 한 번에 두 개씩 집어 먹었다. 그런 딸의 모습이 귀여워 사진을 찍으려고 슬쩍 핸드폰을 들었다. 눈치 빠른 딸은 앙칼진 말투로 자기 사진을 찍지 말라고 거부했다. 조금 아쉬웠지만 어쩔 수 없다. 이런 소중한 순간에 짜증이 끼어들게 할 수는 없으니까.


대신 기억창고에 오늘을 꼭 저장하겠다고 마음먹었다. 매일 바쁘다는 핑계로 딸을 스마트한 세상(유튜브, 웹툰, 게임 등)에만 내버려두었는데 모처럼 딸에게 모니터 속이 아닌 현실의 행복을 알려준 것 같아 뿌듯했다. 이만하면 나도 꽤 괜찮은 엄마라는 생각까지 들었다.

   

사진을 저장해 둔 네이버 웹사이트에서 가끔 3년 전 사진이나 5년 전 사진을 보고 가라고 소식을 전한다. 저장 공간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는 사진 속에 아기는 언제나 앙증맞은 손발에 천사 같은 미소로 나를 쳐다보고 있다. 그 시절을 볼 때마다 아련한 기분이 들지만, 사실 그때도 지금처럼 딸과 많은 시간을 보내지는 못했다. 퇴근 후 집에 돌아오면 이 아기가 대체 언제 잘 것인가에만 몰두하다 마침내 잠든 아이의 얼굴에 일말의 죄책감을 떨구었던 일상들. 그 시간도 다 지나고 나니 힘든 기억은 희미해지고 그리움만 선명히 남았다.     


이제는 사진 속의 조막만 한 얼굴의 아기는 간데없고 손바닥을 펼쳐도 가려지지 않는 보름달 같은 얼굴이 내 앞에 있다. 키도 언제 이렇게 컸는지. 내가 입던 티셔츠를 입어도 꽤 잘 맞는다. 그래도 표정만은 여전히 천진난만한 웃음이 살아 숨 쉬며 나를 설레게 한다.      


내 아가. 10년 후에는 또 오늘을 그리워하겠지. 그때의 그리움을 달래기 위해서라도 이젠 이런저런 변명하지 말고 너와 더 많은 시간을 보내야겠다. 그 어떤 변명도 네 앞에서는 연기 같은 존재일 뿐이니까. 이 세상 무엇보다 엄마는 너를 사랑한다.


한 줄 요약 : 부족한 엄마라도 사랑만은 넘친다


#라이트라이팅#라라크루#금요문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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