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인의 분노에서 멀어지기
⭕ 라라크루 [금요문장: 금요일의 문장공부] 2024.11.1.
1. 오늘의 문장
사랑해, 행복해, 미안해, 고마워, 파이팅... 하루에 열두 번도 더 쓰는 말들이죠. 너무 많이 써서 그만 닳아버렸습니다. 이런 닳은 단어들은 마음에 와 닿지 못하고 데구루루 굴러가 버립니다. [중략]
나에게 사랑을 고백하는 사람이 매일 그저 사랑한다고만 몇천 몇만 번을 반복한다면? 더 이상 설레지 않을 겁니다. 슬슬 지루해질 것 같아요.
당연한 말을 당연하게 반복하면 그렇습니다. 이럴 때는 당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어떤 기분이 드는지를 말하는 게 낫죠. 구체적으로 어떤 각오, 어떤 마음이 생겼는지를요. 너무 커서 한 입에 먹을 수 없는 추상적인 단어, 사랑. 이걸 먹기 쉬운 크기로 잘라주는 겁니다.
‘사랑해! 오늘도 파이팅!’이라고 메시지를 백 통 보내는 것보다 ‘오늘 너를 생각하면서 셔츠를 골랐어. 만날 것도 아닌데, 괜히 네가 좋아하는 색으로 고르게 되더라. 출근했지? 네가 싫어하는 사람은 한 번도 안 마주치는 그런 하루 보내길’이라고 한 번 보내는 게 낫다고 생각합니다.
두 메시지는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결국 사랑한다는 말이죠. 다만, 두 번째 메시지를 읽은 사람은 사랑의 모양을 더 구체적으로 그려볼 수 있습니다. 둘 사이에 생긴 감정이 그의 일상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생생히 알게 되었으니까요.
사랑이라는 말은 흔하기도 하지만, 도무지 한 번에 깨어물 수 없는 커다란 단어입니다. 그 대신 셔츠 고를 때의 내 기분, 네가 좋아할 만한 걸 고르게 되는 마음, 평화로운 하루를 보내길 바라는 소망. 이렇게 소화하기 좋은 크기로 쪼개어 입에 쏙쏙 넣어주는 거죠.
ㅡ 박솔미 저, <글, 우리도 잘 쓸 수 있습니다> 133-135쪽
2. 나의 삶. 나의 문장
아침부터 상사가 화가 나 있었다. 아래 직원이 자기 말을 듣지 않는다며 모두 자기를 무시하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혹시 화가 나한테까지 미칠까 두려웠다. 고개를 내리깔고 잠자코 듣다가 얼른 자리를 피했다. 잠시 후 보고할 일이 있어 상사에게 다시 갔다. 강한 어조로 내 잘잘못을 가리는 그의 말에 소금을 가슴에 뿌린 듯 저릿했다. 겸연쩍게 웃으며 다음부터는 말씀대로 하겠다고 대답했다. 조금 더 있다가 말할 걸 괜히 지금 얘기해서 화를 자초했다고 후회했다.
퇴근해서 집에 왔다. 저녁에 엄마와 남편이 대화하다가 두 사람 모두 마음이 상했다. 둘 사이에서 화살 같은 말이 서로에게 순식간에 꽂혔다. 이윽고 엄마가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철컥하는 소리가 났다. 남편도 방문을 닫고 들어갔다. 이번에는 좀 더 큰 쿵 소리가 났다. 거실에 덩그러니 혼자 남겨졌다. 어느 쪽으로도 갈 수 없었다. 어찌할 바를 몰라 가만히 소파에 앉았다. 순식간에 집 전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진 것만 같았다.
한 사람의 화를 받았을 때는 참을만한 아픔이라 여겼다. 그럴 수 있다고. 누구나 그럴 때가 있다고. 이 정도 통증 따위는 살아가며 으레 겪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분노의 조각들이 계속 더해지자 조각들끼리 끈끈히 들러붙었다. 조각이 덩어리로 커지자 혼자 감내하기에 버거웠다. 고요한 공기 속에서 그들이 던진 분노에서 떨어지려고 나 홀로 사투를 벌였다. 가슴이 요동쳤다. 어디론가로 멀어지고 싶었다. 곧장 일어나 딸아이 방으로 갔다.
딸이 책상에서 음악을 들으며 숙제하고 있었다. 딸의 등 뒤로 다가가 꼭 안았다. 딸은 나를 돌아보더니 씩 웃으며 내게 몸을 기댔다. 무언가 생각난 듯 이어폰을 빼고 말을 시작했다. “엄마 오늘 학원에서 선생님이 퀴즈를 냈는데 내가 많이 맞췄어. 상으로 과자를 받았어.” 딸의 말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잘했다고 연신 칭찬했다. 순간 몸에 살가운 바람이 들어왔다. 바람결에 분노 한 조각이 몸에서 떨어졌다.
숙제를 마친 딸이 화장실에서 샤워하는 동안 책상에 앉아서 유튜브를 훑었다. 곧 드라마 영상 하나를 보았다. 만화에서 막 튀어나온 듯한 풋풋한 얼굴의 남자 주인공이 오랫동안 품어왔던 짝사랑을 여자 주인공에게 고백했다. 예상치 못한 고백에 여자 주인공은 놀란 토끼 눈이 되었다. 그 자리에서 그대로 얼어붙어 버린 여자 주인공에게 남자 주인공은 기습적인 키스를 날렸다. 남자는 입술을 떼고, 깊고 그윽한 눈으로 여자에게 말했다. “좋아해….” 기분 좋은 설렘이 내게도 날아왔다. 분노 한 조각이 또 떨어졌다. 아줌마들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마음을 이해하게 되었다.
잘 시간이 되었다. 불을 끄고 누웠다. 휴대전화로 책 읽어주는 팟캐스트를 틀었다. 잔잔하고 부드러운 목소리가 생텍쥐페리의 자전소설 [바람, 모래 그리고 별]로 데려가 주었다. 그 소리에 마음이 차분해졌다. 세상만사 시름이 하찮게 느껴졌다. 마지막 분노 한 조각마저 떠났다.
오늘, 타인의 화에 상처 입었던 나를 위로했던 건 딸의 사랑스러운 재잘거림과 싱그러운 스무 살의 사랑, 위로를 주는 잔잔한 목소리였다. 상처받고 억울한 마음이 가득한 날에는 아무리 사소하더라도 기분이 좋아질 수 있는 일을 시도해야겠다. 그건 내 분노를 또 다른 이에게 쏟는 것보다 한결 고아한 방법이 될 테니까. 물론 내 속에 전부 품고 있다가 썩어서 흘러나올 때까지 기다리는 것보다도 훨씬 낫다.
머리 위로 달빛이 은은한 미소를 비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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