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는 여자
⭕ 라라크루 [금요문장: 금요일의 문장공부] 2024.11.15
1. 오늘의 문장
구멍이 점점 뚜렷이 보인다면 환영할 일이야. 이제야 자기 모습을 제대로 본다는 거니까. 이젠 받아들여. 네가 너의 구멍을, 네가 너를. 지금 너의 문제는 구멍이 났다는 게 아니라 구멍이 나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는 걸 믿지 못하는 거야.
그런데 말이야. 신은 그렇게까지 대책 없는 구조로 인간을 설계하지 않았거든. 인간의 영혼은 벽돌담이 아니라 그물 같은 거야. 빈틈없이 쌓아올려서 구멍이 생기면 와르르 무너지는 게 아니라 그들처럼 구멍이 나서 '무엇'이 새로 들어올 수 있게 하는 거야. 바로 그 '무엇'이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새로운 세상으로 데려가. 그렇게 조금씩 영혼이 자라는 거지.
사람의 영혼은 자랄수록 단단해져. 구멍이 난 채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어. 오히려 그 덕에 더 잘 살 수 있어. 정말이야. 믿어도 좋아.
<유선경(2023), 구멍 난 채로도 잘 살 수 있다, 사랑의 도구들, 콘택트, 101p>
2. 문장들을 키워 만든 단편
한 여자가 있었다. 그녀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다시 오지 않을 사람이라는 걸 알면서도 기다림을 멈출 수가 없었다. 기다림이 오래되면서 그녀는 서서히 상대를 잊어갔다. 자신을 바라보던 깊고 슬픈 눈빛도. 바람결에 물결치던 그의 곱슬머리도. 가늘고 길지만 단단했던 그의 손가락도 점차 기억에서 흐려졌다. 마치 연필로 썼던 글씨가 세월을 타고 종이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그의 모습은 사라졌는데 그리움만은 계속 남아있었다. 그녀는 어느 순간부터 자신의 그리움이 그를 향한 마음이 맞는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늘 그 자리에 있었던 존재처럼 이제 그리움은 그녀의 일부가 되었다. 그리움이 항상 그녀를 지배하지는 않았지만, 처음 태어난 순간부터 뛰기 시작한 심장을 숨이 찰 때 한 번씩 느끼듯이 유독 마음이 힘든 날에는 그 존재를 뚜렷이 느꼈다.
그런 날 그녀는 자신이 혼자가 아니라는 믿음이 필요했다. 괜스레 휴대전화를 만지작거리다가 한동안 연락이 뜸했던 친구에게 전화를 걸곤 했다. 친구들 대부분은 처음에는 반갑게 전화를 받았다. 곧 그들의 삶에 대한 푸념이 이어졌다. 그녀는 자기 모습이 친구에게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도 잊고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며 맞장구를 쳤다.
그 시간이 끝나도 외로운 마음이 사그라지지 않으면 다음으로 카톡 보낼 상대를 물색했다. 온라인 대화의 특성상 대화가 연속으로 진행되지는 못했다. 그녀는 그걸 알면서도 답장이 왔는지 몇 번씩 확인했다. 답장이 바로 오지 않으면 손톱을 물어뜯고 마음을 안정시켰다. 그 시간도 지나면 결국 혼자만 남겨진 느낌이 다시 찾아왔다. 설령 옆에 누가 있더라도 그들과 자신 사이에서 마음의 거리감이 생겼다.
그런 일들이 반복되자 그녀는 조금씩 지쳐갔다. 남들은 힘들어도 잘만 살아가는데 왜 이까짓 아픔에 이 모양 이 꼴로 사는지 자신도 이해할 수 없었다. 가족 모두 잠든 깊은 밤. 그녀는 눈을 감은 채 스스로에 대해 생각했다. 억울했다. 이 모든 시작이 다 그 때문이라는 원망이 올라왔다. 의지와 상관없이 눈물이 났다. 한참을 울었더니 왜 우는지도 모르고 울었다.
그녀는 더 이상 그런 삶을 살고 싶지 않았다. 그녀는 자신을 끌어내리는 힘겨운 마음을 하찮게 여기거나 외면하지 않기로 결심했다. 세상에는 힘든 인생을 사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이 자신의 힘겨움을 하찮게 여길 이유가 될 수는 없다.
그녀는 이제 힘들 때는 힘들다고 고백하기로 했다. 그 누구도 말을 들어줄 사람이 없다면 자신에게 말하기로 했다. 그녀는 이제 그를 기다리지 않기로 했다. 대신 오늘보다 단단해질 자신을 기다리기로 했다.
세상의 모든 상처받은 사람이 그렇게 강해지는 것처럼.
그녀는 인생을 다시 시작하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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