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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Nov 16. 2022

가해자가 된 피해자. 당신이 몰랐던 감춰진 진실.

아침에 걸어서 출근했다. 뚜벅뚜벅 걷다 보니 사방에 가을의 흔적이 역력했다. 이 계절은 평범한 사람에게도 시인의 감성을 선물로 주는 특별함이 있다. 길가에 서서 붉은 유혹을 내뿜는 단풍나무가 아름다웠고, 찬란한 황금빛 물결을 담고 있는 은행나무는 구스타프 클림트의 그림에서 막 튀어나온 듯했다. 살랑살랑 바람에 내리는 갈색의 낙엽 눈은 오직 이 시기에만 눈에 담을 수 있는 자연이 그린 작품이다.


새벽에 환경미화원이 청소한 듯 낙엽이 길 가장자리에 일렬로 모아져 소복이 쌓여 있었다. 마른 낙엽을 밟을 때마다 버서석버서석 낙엽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나는 그 소리를 계속 듣고 싶어 조심스럽게 낙엽이 쌓인 쪽을 쭈욱 따라 걸어갔다. 여름과 겨울은 길어지고 봄가을은 점점 더 짧아지고 있다. 마치 종일 칭얼대던 아기가 자는 시간처럼 그래서 더 소중하고 아쉽다. 이렇게 기분 좋은 가을의 한가운데에서 걸을 수 있다는 건 참 행운이다. 나는 한껏 기분이 고양되었다.


계속 걷다가 보니 큰 사거리가 보였다. 저 멀리 있는 신호등이 여전히 빨간색인 걸 확인하고 느긋하게 걸어갔다. 그런데 사거리에 조금씩 가까워지자 신호등 앞에서 어떤 여자 둘이서 꽤 험악한 분위기로 얘기하고 있는 게 보였다. 그 옆으로는 차 한 대가 길가에 세워져 있었고, 조금 떨어진 곳에 자전거 한 대가 덩그러니 세워져 있었다. 순간 접촉 사고가 났나보다 생각하고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쪽으로 더 가까이 다가가자 그들의 얼굴이 더 잘 보였다. 50대 중반으로 보이는 한 여자는 화가 난 듯 양손을 허리에 올리고 목에 핏대를 세우며  소리로 말하고 있었고, 그 앞에 족히 60대 중반은 훌쩍 넘어 보이는 여자가 자전거 헬멧을 쓴 상태로 상대방의 말을 들으며 연신 고개를 조아리고 있었다. 아니 무슨 일이길래 노인에게 저렇게 함부로 소리를 지르나 싶어 나는 신호를 기다리는 척하며 그들 옆에 서서 50대 여자가 하는 말을 엿들었다.


“아니, 생각이 있는 거예요. 없는 거예요? 그러다 사고가 나면 어쩔뻔했어요! 제가 진짜로 칠 뻔했잖아요!”


그들의 대화로 미루어 짐작해본 사건을 이랬다. 50대 여자는 옆에 세워져 있던 SUV 차량의 운전자이고, 그 앞에서 미안해하던 60대의 여자는 자전거의 주인이었는데 아마 적색 신호등에 자전거가 신호를 무시하고 횡단보도를 건너려다가 우회전을 하려던 차와 부딪힐 뻔한 것이다. 다행히 다친 사람은 없어 보였다. 그제야 나는 무례하다고 생각했던 차주의 행동이 어느 정도 이해가 되었다.


세상에는 이렇게 얼핏 보았을 때 편견의 자로 쉽게 재단했던 일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완전히 다른 결말이 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찰리 채플린의 유명한 말을 들어본 적이 있다.

Life is a tragedy when seen in close-up, but a comedy in long-shot.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다.'


원래는 희극배우이자 영화감독이었던 채플린의 삶과 영화에 대한 신념이 드러나는 말이지만 나는 이 명언을 방금 내가 보았던 일에 적용해보고 싶다. 내가 멀리서 보았을 때 사건의 전말과 완전히 다른 짐작을 했던 것처럼 우리가 만약 한두 가지 단서만으로 쉽게 판단하고 결론을 낸다면 그 속에 감춰진 진실을 놓칠 수 있다.


그러고 보니 비슷한 사건이 하나 생각났다. 1993년 방영되었던 드라마 ‘걸어서 하늘까지’로 명성을 크게 얻었던 터프가이 이미지의 대표 배우 최민수 씨가 2008년 노인 폭행 사건을 일으켰다. 당시 언론에서는 그가 힘없는 한 노인을 폭행한 후 자동차에 매달아 끌고 갔다고 보도하여 한동안 세간이 떠들썩했다. 사람들은 그를 비난했고 이에 최민수 씨는 기자회견을 열어 무릎을 꿇고 사죄했다.


그러나 그 사건은 훗날 최민수 씨의 무혐의로 종결되었다. 알고 보니 피해자 노인은 수백억 원대 자산가로 노인 소유의 음식점 앞에서 일어난 불법 주차를 단속하는 과정에서 노인이 구청 직원을 막고 있던 모습을 본 최민수 씨가 구청 직원을 돕기 위해 항의를 하다가 시비가 일었던 것뿐 노인을 폭행한 적이 없었다고 한다.


이것 역시 미디어 매체의 자극적인 기사에만 끌려 모든 걸 판단해 죄 없는 사람을 마녀사냥  경우이다. 그러니 어떤 경우든지 신중하게 판단해야겠다. 진상을 알기 전에는 타인을 함부로 비난하길 지양해야겠다. 나태주의 시 '풀꽃 1’처럼 자세히 봤을 때 아름다운 풀꽃조차 스쳐 지나갈 때는 어지럽게 흩어진 잡초로만 보일 수 있다.


한 줄 요약 : 무엇이든 함부로 판단하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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