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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안희정 Jan 20. 2023

당신의 인생이 빛나길 바라는 존재, 친구라는 이름.

“뭘 입을까... 원피스? 아니면 블라우스에 정장 바지? 겉옷은 로 하지? 코트를 입기에는 좀 춥긴 한데...” 여느 날과 다를 것 없는 출근 전 아침, 나는 소개팅이나 첫 데이트에 나가는 스무 살 아가씨처럼 부산스럽게 옷장 문을 몇 번이나 열었다 닫기를 반복했다. 전날 밤 입고 갈 옷을 미리 정했었지만, 아침이 되자 마음이 계속 바뀌었다. 이번이... 3년 만이던가. 4년 만이던가. 정확히 기억나진 않지만, 꽤 오랜만인 건 확실하다.


지난주 호주에 사는 친구가 한국에 들어왔다고 연락을 해왔다. 친구는 지금 지방의 부모님 집에 있는데 돌아가기 전 마지막 일주일은 강남역 근처 원룸 오피스텔을 단기 임대해 머무를 예정이라고 말했다. 나는 고민 끝에 미리 하루 연차를 냈고 퇴근 후 친구가 머무는 오피스텔에 놀러 가 하룻밤 자고 다음 날까지 함께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친구가 호텔이 아닌 오피스텔을 빌려서 누구의 눈치도 없이 잘 수 있었고, 지난번 친구가 왔었을 때 밤새도록 얘기하고 새벽에 헤어지는 바람에 다음날 출근해서 종일 제정신이 아니었었기 때문이다.      


‘그래 날도 추운데 그냥 편하게 입고 가자.’ 결국 나는 평소처럼 편한 바지에 니트 티셔츠 그리고 롱패딩 점퍼를 입고 출근했다. 시간은 역시 사람의 감정 무게에 따라 길이가 달라지는 고무줄이다. 오늘따라 더 무거운 시계추를 달고 있는 듯 시간은 느릿느릿 늘어져만 갔다. 지루한 시간을 이겨내고 퇴근 후 쏜살같이 전철역으로 가서 전철을 탔다. 강남역까지는 1시간이 좀 넘게 걸렸지만, 전자책을 읽으며 가다 보니 그리 지루하지 않았다. 강남역에 내려 네이버 지도 앱을 켜고 친구가 알려준 주소를 따라갔더니 10여 분 만에 금방 오피스텔에 도착했다.      


친구에게 도착했다고 카톡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몇 발짝 못 가 문을 열고 활짝 웃으며 서 있는 친구를 발견했다. 우리는 문 앞에서 서로를 얼싸안고는 이게 얼마 만이냐고 흥분하며 인사했다. 오피스텔은 작은 싱글 침대 하나와 소파, TV, 세탁기, 냉장고 등이 있는 전형적인 원룸이었으며 벽 한쪽에는 '당신의 하루가 별보다 빛나길'이란 글씨가 깔끔하게 붙어 있었다. 우리는 소파에 앉아서 그간 어떻게 지냈는지 얘기를 나눴다. 잠시 20년 전 친구가 자취하던 원룸에 놀러 갔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았다.     


우리는 바로 밥부터 배달시키기로 했다. 메뉴는 초밥이었다. 친구는 몇 년 사이에 한국이 왜 이렇게 좋아졌냐며 배달이 안 되는 게 없다고 감탄했다. 음식을 기다리는데 친구가 내 생각이 나서 샀다며 드라이 케이크와 녹차를 선물로 주었다. 아무런 선물도 준비하지 않은 난 괜스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 만났을 때도 친구는 나를 위해 호주산 비타민을 들고 왔었다. 나는 뭘 줬었던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럴 때 나는 참 무심한 경향이 있다)     

 

친구가 호주로 떠난 이후 몇 번 한국에 왔었지만 이렇게 둘이서만 만나는 것은 처음이다. 호주 사람과 결혼한 친구는 남편의 휴가 기간을 이용해서 한국에 왔었기에 늘 부부 동반이었다. 이번에는 남편의 일정이 맞지 않아서 먼저 돌아갔다고 했다. 우리 둘 다 아줌마가 된 이후 술을 거의 하지 않는데 지난번 만났을 때는 취할 때까지 마시고 서로를 부둥켜안고 오랜 시간 울었다. 그날 한국어를 못하는 친구의 남편은 영문도 모르고 조용히 우리 옆을 지켰다. 헤어진 다음 날 겨우 정신을 차리고 친구와 통화하며 간밤의 기억 퍼즐을 맞췄더니 내가 친구의 남편에게 아내한테 잘해주라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던 장면이 완성되었다. 그때 친구를 통해 몇 번이나 사과했었는지 모른다.      


오랜만에 옛이야기를 하니 편집되었던 그날의 장면이 되살아났다. 나는 그때 정말 미안했다고 재차 사과했다. 친구는 “괜찮아. 그때 남편이 그러더라고. 넌 그 친구를 만날 때는 흐트러진 모습을 보여. 그 정도로 마음을 열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건 참 좋은 거야.”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듣는데 왠지 모를 감정이 훅하고 올랐다. 그의 말이 옳다. 망설임 없이 솔직한 감정을 드러낼 수 있는 친구를 가진 건 큰 복이다.      


함께 배달된 초밥을 먹고 와인을 마시며 서로 사는 얘기를 하다 보니 어느덧 밤 11시 반이 넘었다. 신체 리듬이 새벽에 맞춰진 내 의식은 더 이상 견디지 못하고 친구가 내어준 침대에 바로 뻗어버렸다. 다음날 습관처럼 4시에 눈떴지만, 여전히 는 친구가 깰까 봐 조용히 다시 잠이 들었다. 아침 7시가 넘어서야 부스스 일어나 화장실에서 머리를 감고 샤워했다. 그사이 친구도 일어났다. 오피스텔에는 헤어드라이어가 없었다. 친구에게 머리빗이라도 빌려 달라고 했더니 자신도 없어서 그냥 자연적으로 말리고 손으로 대충 머리를 묶었다고 했다.


머리도 안 빗고 묶다니. 예전의 친구를 기억하는 사람이 지금 그녀의 모습을 본다면 분명 매우 놀랄 것이다. 과거 친구는 짙은 검은색 아이라인이 어울리는 화려한 얼굴에 모델같이 도발적인 몸매를 갖춘 미인이었으나 어딘지 모르게 항상 불안하고 슬퍼 보였다. 오랜 해외 생활이 그녀를 그렇게 만들었을까 아니면 나이가 들면서 자연스럽게 변한 걸까. 어느 쪽이든 내 눈에는 화장기 없는 얼굴로 너그럽고 푸근한 미소를 짓는 지금의 모습이 훨씬 보기 좋고 안정되어 보였다.      


우리는 근처 식당에서 순댓국으로 해장하고 커피를 한 잔씩 사서 다시 오피스텔로 들어왔다. 그리고 주말 오후 여느 집 풍경처럼 TV를 켜고 오은영 박사가 진행하는 부부관찰 프로를 함께 보았다. “야 남편한테 문제가 있다.” “아니야 여자도 참 문제네.” 남의 가정사에 빠져들어 수다를 떨고 냉장고에서 간밤에 먹다 남은 음식을 꺼내 먹고 차를 마시니 오후 시간이 속절없이 흘러갔다.      


어느새 시간은 오후 4시가 넘어갔다. 마침내 나는 이제 가야겠다고 말했다. 천천히 패딩을 입고 더 굼뜨게 가방을 메고 가방 지퍼를 닫았다 다시 열어 뭐 빠진 게 없나 확인하고 다시 닫았다. “잘 지내...” “너도 잘 지내...” “또 보자...” “그래, 또 보자...” 그리고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았다. 문을 나서서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고 뒤를 돌아보자 친구가 여전히 문을 연 채 싱긋 웃으며 나를 보고 있었다. 나도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강남역으로 걸어가는데 길가에 잡화를 함께 파는 문구점이 보였다. 나는 문구점으로 들어가서 이리저리 살피다가 점원에게 물었다. “저, 여기 머리빗도 있나요?” 점원은 한쪽 벽을 가리키며 저쪽에 걸려있다고 말했다. 빗을 집어서 계산대에서 계산하고 다시 친구의 오피스텔로 돌아갔다. 초인종 소리를 듣고 문 안쪽에서 누구냐고 묻는 친구에게 나는 문을 열어 달라고 말했다.     


놀란 듯한 얼굴로 문을 열어준 친구에게 나는 점퍼 호주머니에서 불쑥 머리빗을 꺼내며 말했다. “그냥... 가다가 생각나서 하나 샀어. 가끔 머리빗을 때만 내 생각을 하라고.” 금방이라도 눈시울이 붉어질 것 같아서 애써 쿨한 척 말했다. 엷게 웃으며 고맙다고 말하는 친구를 등지고 돌아섰다. 이번에는 다시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역 쪽을 향해 다시 걸었다. 길가에 붕어빵을 파는 포장마차가 있었는데 스무 살 남짓 앳된 여자 세 명이 깔깔 웃으며 그 앞에서 붕어빵을 나눠 먹고 있었다. 그들을 스쳐 지나가면서 나는 우리의 웃음소리도 싱그럽게 들렸던 젊은 날을 떠올렸다.


앞으로 살면서 몇 번이나 더 그녀를 볼 수 있을까. 자주 보지 않아도 좋으니 다만 그녀가 그곳에서 잘 지내길 바란다. 오피스텔 벽에 붙어 있던 글귀처럼 내 친구의 남은 인생이 별보다 빛나기를 나는 진심으로 빌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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